영화 <다이빙 벨>과 <나쁜 나라>에서 드러나는 행위와 소통의 소외
초록
본 논문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두 영화 <다이빙 벨>과 <나쁜 나라>를 기호학적·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으로 유가족들 주체가 내포하는 사회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유가족들은 정부 및 국가, 여·야 국회의원들로부터 소외받는 존재로 무기력하지만 살아 있는 호모 사케르의 특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대타자로부터 소외당하는 히스테리 환자에 해당한다면 국가는 과학담화라는 보이지 않는 지배형식으로 그들을 통치하려고 시도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유가족들과 사회구성원들이 소외에 머무르지 않고 대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주체의 궁핍화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지평이 새로 열릴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이는 상징계의 소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됨으로써 상징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호모 사케르의 위치라고 요약할 수 있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identify the social implications for the subject of the bereaved families of the Sewol-ho. For this, two movies, <Cruel State> and <Diving Bell>wereanalysed using a semiotic-psychoanalytic perspective. Two stages of alienation were found. First, the bereaved families constitute alienated subjects who are helpless but living beings. Second, the bereaved families can be called ‘hysteric’ and alienated from one another. The state attempted to control bereaved families by an invisible form of scientific discourse. The new social horizon can open up if our society and the bereaved families were able to reach ‘destitution of subject’ through separation from the Other rather than being excluded. We can change the symbolic order by becoming the Real rather than persisting the symbolic alienation.
Keywords:
Lacanian Psychoanalysis, Isolation and Separation, Destitution of Subject, Homo Sacer and the Real, Sewol-ho키워드:
세월호, 라캉주의 정신분석학, 소외와 분리, 주체의 궁핍, 호모 사케르와 실재1. 들어가는 말
포우(Poe)의 <도둑맞은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인색한 부자가 자신의 병 증세를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얘기하며 선생님이라면 어떤 약을 권하겠냐고 의사에게 묻는다. 그러자 의사는 ‘의사의 충고를 권유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들의 대화에서 병의 증상은 있지만 실질적인 환자와 의사의 역할은 부재한다. 부자는 자신의 증상을 누군가의 증상으로 얘기했다면, 의사의 대답의 초점은 증상을 피해간다. 한마디로 이들의 소통은 어긋난 셈이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먼저 어긋난 소통으로 다가온 사회적 증상이었다. 라캉(Lacan)에 따르면 증상은 고통의 근원이자 성격상 주이상스(jouissance)이며 그 자체가 자폐증적인 것으로 분석은 그것을 기표로 형식화해내는 것을 말한다(Chiesa, 2007/2012, pp. 138-140). 증상은 아직 기표로 형식화되지 않는 무엇인데 세월호 참사가 오보라는 소통의 어긋남으로 우리 사회에 메시지를 던진 것에 주목해야 한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의 해상에서 침몰한 참사와 함께 일어난 것은 오보라는 또 다른 사건이었다. 승객 전원이 구출되었다는 오보에 정부까지 가세하면서 (어긋난 소통으로) ‘구조 없는 구조’가 이뤄진 셈이다. 이런 사회적 장치의 고장은 사회의 메커니즘이 삐걱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증상(Zizek, 1989/2003, p. 222)이 아니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지 오보라는 커뮤니케이션 상의 잘못에 국한되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지속성과 견고성을 지탱하는 환상(fantasy)이 앞의 뉴스를 뒤집는 전복적인 후발뉴스를 통해 파괴된 사건이자 증상이 아닐까? 이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불신과 국가의 결여와 불완전성을 노출한 외상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대통령이 부재한 ‘7시간’은 일종의 제유(提喩)로 유통된다. 잃어버린 시간은 구조를 위한 국가 지휘체계의 부재를 함축하는 동시에 세월호 탑승자들을 구제할 일명 ‘골든 타임(golden time)’의 상실을 나타낸다. 소통의 마비는 외상적 사건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어 무기력하게 말을 잃은 사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지시에 따라 배 안에 머물러 가만히 있어야 하는 희생자들의 한계상황을 표상한다. 국가의 부재는 현실에 부재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부재하는 그들은 존재하는 우리에게 역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 부재함은 존재1)의 증발이었지만, 그것은 역으로 실재(the Real)의 침입이기도 했다. TV를 지켜보던 전 국민은 경악했고, 그때까지의 상징계 질서가 파괴되는 경험을 했다. 비유하자면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것 같은, 그리하여 배우로부터 지켜지던 객석의 안전함은 어디에도 없는 불안이 찾아온 것과 같다. 마치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의 대사 한 구절처럼 지켜보는 자는 울타리 밖의 구경꾼이 아니라 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제가 되는(Handke, 1966/2012, p. 22)2) 셈이다. 이는 관객 모독적이기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결코 편안할 수가 없음을 뜻한다. 뉴스가 시청자에게 안전한 시청거리를 허용하지 않은 셈이다. 이를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불안은 상징계 너머에 있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확실한 무엇이라 할 수 있는 실재의 신호이기 때문이다(Salecl, 2004/2015, p. 69). 이 앞에서 상징계의 일관적이고 안정적인 주체의 위치는 흔들린다.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뉴스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이런 강렬한 실재의 신호, 불안에 사로잡힌 것이다.
본 논문은 세월호 참사를 주체의 안정적 위치가 붕괴하는 참사로 바라보기 위해 뉴스가 전달할 수 없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생생한 모습과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담은 다큐멘타리 두 편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영화 <다이빙 벨(The Truth Shall Not Sink with Sewol, 2014)>과 <나쁜 나라(Cruel State, 2015)>는 유가족들이 처한 소통 없는 막다른 곤궁의 상태를 추적·재현하는 작품들이다. 이는 매개적인 측면에서 뉴스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의미와 효과를 지닌다. 영화는 상상적 창작물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충격적인 실재와의 조우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현실, 환상의 틀을 개정하기도 한다. 영화 속 실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회현실 속의 실재를 영화가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떠맡아 전시할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내러티브 현실이 기능장애를 일으키며 실재가 노출된 경우이다. 전자가 영화 제작가의 의식적 개입과 실천의 소산이라면 후자는 등장인물의 무의식적 욕망이 드러난 결과라 할 수 있다(김소연a, 2008, 157-158쪽). 저 두 영화들은 뉴스 미디어가 보여준 현실 이면의 진실과 목소리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면에서 국가에 대한 일반적 환상의 틀을 파괴한다. 세월호가 우리 사회의 증상이라면 두 작품은 증상의 위치를 점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했듯이 세월호 참사 당시 뉴스의 오보가 제2의 참사였다면 또 다른 사건은 살아남은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국가와 소통되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저 두 영화는 그런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지난한 상황들을 추적하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본 연구의 목적은 이들 영화에서 국가와 소통하기 위해 다른 어떤 제안에도 타협하지 않는 유가족들이 내는 목소리의 실천적 의미 특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우선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를 참사 및 참사 이후의 유가족들의 실천 행위를 고찰할 이론적 근거의 하나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유가족이라는 주체의 인정투쟁 지형과 관계를 알기 위해 주체-대타자간의 소외와 분리, 인정투쟁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 주체와 대타자의 관계에서 벗어난 아감벤(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개념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실재와 호모 사케르 개념이 일치하는 의미지점을 드러내는 그레마스(Greimas)의 기호 사각형 도식을 파악하고 마지막으로 유가족들과 국민, 국가의 담화 유형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라캉의 네 가지 담화 유형을 고찰할 것이다.
2. 이론적 고찰
1) 상상계, 상징계, 실재
상상계는 감각적 지각에서 생겨난 개념작용을 저장하는 영역으로 거울단계와 관련되어 논의 된다. 아이는 거울 속 대상에 대한 관념들의 투사를 통해 자아 또는 이상적인 나를 세우게 된다. 이는 허상이자 이미지의 영역이다(Bailly, 2009/2013, pp. 140-143). 아이는 거울상의 타자성에서 자신을 인지하고 상상적 타자와 동일시한다. 자아는 타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 기만적 통일성의 인상을 주체에게 준다는 점에서 소외적이다. 이런 상상적 인식은 구조적으로 망상증적이다(Chiesa, 2007/2012, p. 43, 55). 오인과 소외, 타자와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 등이 거울단계로 대표되는 상상질서를 구성한다. 이는 인간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 또는 타자를 위한 욕망으로 정의되는 원형적 상황을 이룬다(박찬부, 2006, 182쪽). 상상계는 주체와 이미지의 이자관계에 뿌리를 둔 완전성과 통합의 환상을 주며 한편으로 언어에서의 의미작용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이미지를 매개로 구성되는 주체의 현실세계에 해당하며 동일시를 통해 구성되기에 소외 및 기만을 가져오지만 폐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김석, 2007, 147-150쪽).
그런데 언어 및 상징질서로의 진입은 주체의 탄생과 연관되며 상징계 안에서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대타자는 언어, 상징질서로 주체가 완전히 동화할 수 없는 것이며 주체는 기표에 의해 좌우된다. 주체의 상징계로의 진입은 주이상스의 포기를 조건으로 한다. 즉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적 애착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대신해야 한다. 이를 부성적 메타포라고 지칭한다(김경순, 2009, 32-42쪽). 아버지의 이름의 부재는 슈레버(Schreber) 판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아이가 상징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상징계가 언어적인 세계인 반면 상상계는 거울단계가 초석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Grigg, 2008, pp. 9-10). 언어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머니로부터의 자식의 분리를 가리킨다. 이는 실재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며 기표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즉 주체는 기표들에 의해 대리된다. 주체는 기표가 의미하는 것인 기의의 자리를 차지한다(Widmer, 1990/1998, pp. 62-75). 상징질서로의 진입은 주체의 대타자에 대한 복종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 복종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선택의 것으로 필연적이다. 라캉은 노상강도에게 돈이냐 목숨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은 행인의 상황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돈(언어)과 목숨(존재)의 양자택일 앞에서 행인(주체)은 돈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소외된 주체, 분열된 주체, 빗금 쳐진 주체로 나타난다(박찬부, 2006, 190쪽). 상징적 질서는 결여의 경험을 통해 접근되며 이는 상실되었거나 놓치고 있는 것을 지시한다. 결여된 것과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기표의 상호관계로 인해 그 의미가 주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상징계는 충만한 실재가 결여된 기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Bailly, 2009/2013, pp. 147-148). 이를 라캉은 문자가 언어 이전의 실재를 죽인다고 표현한다. 실재를 폐기함에 따라 상징적 질서는 현실을 창조한다. 그렇다면 실재는 상징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상징화될 것으로 남아있거나 아니면 상징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Pink, 1997/2010, pp. 61-64).
실재는 크게 두 층위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문자 이전의 선(先)상징적 실재인데 하나의 가정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문자 이후의 실재는 상징계 그 자체 요소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성된 곤궁과 불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다(Pink, 1997/2010, pp. 66-67). 이는 잔여물로서 오브제 a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박찬부, 2006, 253쪽). 라캉에게 실재는 기표가 현실의 몇 조각에 부착될 때 축출되는 무엇이다. 이는 기표가 포획하지 못한 작은 조각이다. 실재는 외존(ex-ist)하는 것이라 표현되는데 매끄럽고 분화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출생 이전에 경험될 뿐이고 어떤 상징으로도 고정될 수 없는 것이자 항상 같은 장소라는 속성을 갖는다(Bailly, 2009/2013, pp. 149-150). 실재는 결여된 것이 없지만 상징계는 늘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고 그 부재가 현존을 느끼게 한다. 실재는 언어 및 문화의 상징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며 언어의 개입에 종속된 인간으로서는 접근할 수가 없는 대상이다. 즉 실재는 말하는 존재가 문화 속의 존재가 되면서 상실되는 것이지만 계속 존재하며 우리를 되찾으려고 한다(Belsey, 2005/2008, p. 21, 22, 71). 실재의 구성력은 주체를 결핍의 주체로 드러나게 할 뿐 아니라 대타자 안의 결핍 또한 창조한다. 그리고 불가능한 실재의 구성력과 비환원성은 사회의 장을 분열시킨다(Stavrakakis, 1990/2006, p. 317).
실재는 일상생활의 균형을 뒤집으며 외상적 귀환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한편으로 균형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Zizek, 1991/1995, p. 66). 즉 실재는 사회현실의 기반이 되는 것과 동시에 현실을 파괴한다. 실재는 상징계와 상상계 너머의 것으로 그것들의 한계로 설정되는데 트라우마(trauma)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정신적 외상은 주체가 외부자극에 대해 이해하고 통제하는데 무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발생한다. 라캉에 의하면 외상이 상징화될 수 없이 남아있는 한 실재에 해당하며 상징계나 사회현실 내부로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언어로 변환시켜 바꾼다 할지라도 남아있는 잔여이자 초과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실재에 해당한다. 실재와 조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강조됨에 따라 이는 죽음 충동 및 주이상스와 연계된다(Homer, 2005/2006, p. 151, 155). 그리고 트라우마는 탈상징화 기능을 하는 뜻밖의 경험으로 끔찍한 사건에 대해 주체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언어적으로 구성된 상징의 장막이 찢어지는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발생한다(맹정현, 2015, 22-24쪽).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현실에서 추방되는 무엇이다. 하지만 실재의 존재에 대해서 쉽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재에 대한 실감이 날 때는 그것이 돌아오는 실재의 회귀가 있을 때다. 즉 상징계가 현실에 개입하면 실재는 추방된다. 이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회귀의 순간에 섬뜩함이 느껴지는데 이를 ‘unheimlich’ 또는 ‘uncanny’라고 부른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는 전형적인 불안의 대상으로 주체는 그에 대해 경악하게 된다. 실재는 표상되지 않기에 즉 상징화되지 않기에 불가능으로 정의가 된다. 표상은 실재가 추방된 자리에서 그것이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막고 서있는 셈이다. 실재가 돌아올 때는 우연이라는 모습을 띠는데 이런 실재와의 만남을 라캉은 투셰(tuché)라고 하고 실재를 가리는 기호형식의 망을 오토마톤(automaton)이라 부른다(Lacan, 1977, pp. 53-64). 실재는 오토마톤 뒤에 자리 잡고 있다(임진수, 2012, 202-208쪽).
여기에서 상징계와 관련해서 억압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라캉에 의하면 억압은 원 억압과 사후억압으로 나눌 수 있다. 원 억압은 언어 자체의 구조적 특징으로 인한 것으로 최초의 기호형식인 팔루스(phallus)가 대타자의 결핍의 기호형식이 되면서 대타자의 결핍의 기호형식이 아버지의 이름의 기호형식으로 대체되는 아버지의 은유와 연관된다. 이와 달리 사후억압은 주체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심리적 행위로 라캉은 억압물의 회귀와 동일하게 평가한다. 억압물의 회귀인 증상은 은유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미작용이라 볼 수 있다. 즉 원 억압의 최초의 기호형식은 대타자에 결핍된 기호형식 자체인데 반해 사후 억압에는 구체적인 형태가 있다(임진수, 2014, 160-163쪽).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된 증상이란 무의식적 욕망과 외상에 관한 암호화된 메시지인데 그 수신자는 가상적인 대타자이다(Zizek, 2005/2008, pp. 21-23).
살펴본 것처럼 라캉의 세 계(界)는 무엇보다 주체와 대타자가 자리 잡은 상징계와 밀접하다. 그렇다면 상징계에서 일어나는 주체와 대타자 간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주체, 대타자, 소외와 분리 그리고 인정투쟁
앞서 살펴보았듯이 상상계에 자아는 속하고 상징계에 주체가 소속된다. 자아는 고착과 나르시스적 애착의 자리인 반면 라캉의 주체는 사고와 존재 사이에서 분열된 주체이다. 즉, 주체는 타자로서의 자아와 타자의 담화의 무의식 사이의 분열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주체는 타자와 깊게 연관된 소외의 주체이다(Fink, 1997/2010, pp. 93-98). 물론 여기에서의 주체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의 주체로 타자와의 관계는 그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긴밀하고 뿌리 깊게 이뤄진다(손병우, 1988). 라캉은 언어를 주체성과 연관시키고 언어 없이 주체성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주체도 언어의 재현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언어의 포획이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는 없다고 보았다(Sarup, 1993, pp. 10-13).
라캉은 주체를 타자다움의 관계에서 탄생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타자를 소타자와 대타자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자아의 영상과 투사와 관련된 거울단계의 타자이다. 이런 소타자는 거울단계와 별도로 개인이 다른 이들을 소타자로 인식하고 투사와 동일시의 적절한 대상으로 취급하게 된다. 반면 대타자는 상징계의 근본적인 타자이다. 이는 언어와 법으로부터 오며 간혹 언어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법과 사회 규칙, 터부, 관행, 기대, 시간까지도 대타자의 다양한 모습이 된다(Bailly, 2009/2013, pp. 107-114). 지젝에 의하면 타자는 크게 상상계적 타자와 상징계적 타자 그리고 실재적 타자로 분류된다. 상상계적 타자는 나를 닮은 타자이며 경쟁과 상호인정의 거울상과 같은 관계를 맺는 동료들이다. 상징계적 타자는 대타자인데 사회적 존재의 실체이며 구성원들의 공존을 조합하는 몰개성적인 규칙들의 집합이다. 실재로서의 대타자는 불가능한 물자체이며 상징질서로 매개된 어떤 대칭적 대화도 불가능한 무엇을 뜻한다(Zizek, 2004/2011, p. 139). 그런데 대타자의 실체는 사실 우리의 환상인데 대타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남에게 맡기는 실질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대타자가 정태적이지 않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대타자의 역사는 곧 우리의 역사로 대타자는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성과 더불어 다양한 주체들이 출현했는데 그들은 이제 자기근거로 신, 나라, 혈통을 참조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탈근대사회인 오늘날의 대타자는 시장이 된다(Salecl, 2010/2014, pp. 94-95, 105-106).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로 태어나 욕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를 소외(aliénation)라고 부른다. 정신병, 성도착증, 신경증과 같은 병리적 현상은 주체의 욕망이 타자에 의해 소외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런 소외된 욕망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분리(séparation)과정을 거쳐야 한다(홍준기, 2003, 74-75쪽). 소외는 주체로 하여금 어떤 분열 속에서만 나타나도록 운명 짓는 데 라캉은 이를 소외의 벨(vel)을 통해 설명한다. 강도가 칼을 겨누며 “돈이냐 목숨이냐”고 물을 때 행인은 돈을 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목숨을 선택할 경우 둘 다 잃는 불합리한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징계의 법으로 주체는 이에 종속되고 소외된다. 상징계의 기표의 논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는 의미를 얻지만 존재는 무의미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이런 소외를 벗어나기 위해 주체는 분리라는 자신을 산출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주체는 타자 안에서 감지해낸 결여의 지점에서 자신의 사라짐을 위치시키게 된다. 주체는 소외로부터 되돌아오는 길을 분리를 통해 찾아내게 된다(Lacan, 1973/2008, pp. 316-331). 분리는 상징적 정체성인 나로부터 대상 a의 분리이자 상징적 세계로부터의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Zizek, 1992/1997, p. 93). 달리말해 주체가 상징적 질서인 대타자의 결여를 차지하는 한에서 대타자로부터 분리가 가능하며 그 지배를 중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Zizek, 2005/2010, p. 220). 소외로부터 분리, 환상 가로지르기 그리고 주체의 궁핍에 이르는 라캉의 이론적 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주체화의 첫 단계는 기표에 의한 소외상태로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에 절대적으로 휘둘리게 된다. 이어 주체는 기표에 의해 상징계의 주체로 태어날 때 상실한 부분이 자신의 존재임을 알게 되면서 분리를 단행한다. 이는 주체를 대리하면서 상징계에 도래하게 만든 기표의 빈자리를 찾는데서 시작된다. 분리는 주체가 자신을 결여 자체로 인식하면서 스스로를 욕망하는 주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제 분열된 주체는 순수 결여대상인 대상 a와 동일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환상 공식 $◇a인데 여기에서 기표에 의해 소외되고 거세된 주체가 자신의 결여를 가리키는 대상 a로 진행해 가면서 존재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원초적 결여가 대타자의 기표질서에 내재한 두 번째 결여의 원인임을 알게 되는 과정을 주체의 궁핍이라고 한다. 이는 주체가 자신이 의존하고 있던 대타자의 욕망에서 스스로를 분리해내며 대타자와 주체 자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는 철저한 비움의 과정이다(김석, 2014, 36-37쪽). 분리는 상징적 정체성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 나로부터 대상 a의 분리를 일컫는다(Zizek, 1992/1997, p. 93). 이는 주체와 대타자가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주체가 대타자가 아닌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주체는 증상의 실재와 동일시를 통해 대타자를 향한 믿음에서 떨어진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고 주체 역시 부재함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분리가 급진화 된 주체의 궁핍이다. 분석의 목적은 주체가 자신의 증상의 실재와 동일시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끈다. 타자의 결여에 대한 응답으로 주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체 자신의 존재에 길을 열어주게 된다. 이때부터 주체는 대타자에 대한 혹은 대타자의 응답으로 간주되지 않고 실재에 대한/실재로부터의 응답이 된다.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Verhaeghe, 1998/2013, pp. 226-230). 특히 환상 가로지르기에서 분석가는 주체가 환상을 구축한 구조를 홀로 변형할 수 있도록 윤리적 구제자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Apollon, 1995, p. 126). 라캉은 정신분석의 목적이 어떤 위반의 형태에도 벌을 내리는 전능한 대타자에 주체의 판타지가 매어 있었고 그동안 주체를 오도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Feher-Gurewich, 2003, p. 200).
이렇게 주체는 대타자에게 영향 받으며 그의 욕망은 곧 대타자의 욕망이 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대타자의 인정을 전제로 하며 주체와 대타자의 변증법 속에서 욕망이 구성되는 것을 ‘욕망의 인정’, ‘인정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즉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다. 주체의 욕망이 성립되기 위해선 대타자로부터의 인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주체가 욕망하는 대타자의 욕망은 항상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으며 그래서 주체는 인정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김석, 2007, 189-193쪽).
그런데 사회학자 호네트는 사회적 투쟁이 상호인정이라는 상호주관적 상태를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상호 인정관계는 사랑의 형태 속에 있으며 이는 동등한 권리의 인정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 속에서 개인은 자신만의 속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즉 인정은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되며 타인에게 무시 받는 존재들은 인정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사회적 투쟁은 언제나 무시나 부인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사회적 인정방식을 정서적 배려, 인지적 존중, 사회적 가치부여로 나눈다. 정서적 배려의 경우 인정의 형태는 사랑, 우정 같은 원초적 관계이며 인지적 존중은 권리관계를, 사회적 가치 부여는 가치 공동체의 연대를 인정형태로 갖는다. 이런 인정 관계는 사회 경험 속에서 다양한 인정방식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관여한다(Honneth, 1992/2011). 그런데 호네트의 인정 질서 개념만으로 오늘날 경제적 불의를 야기하는 원인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는 비록 분배의 문제를 권리 및 업적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결과로 제시했지만 모든 분배적 불의가 왜곡된 인정질서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기에 많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즉 인정 패러다임은 인정질서 외부의 경제적 요인들을 설명하기에 무리가 따른다(김원식, 2015, 143-144쪽).
이런 인정의 문제를 연구결과에서 취급하기에 앞서 주체와 대타자의 인정 관계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특이한 존재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라캉의 세계와 연관해서 그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기호 사각형에 적용한 이론적 고찰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국가는 폭력 활용의 배타적 권한을 갖는다. 근대 국민국가에서 정치의 중심에 주권의 힘이 놓인다. 그런데 지구화가 큰 추세로 자리 잡은 오늘날 국민국가는 여러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국가질서와 법질서 사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긴장이 존재하는데 이를 아감벤은 주권의 역설로 파악한다. 그런데 법질서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예외상태가 존재하는데, 이 예외상태라는 법의 공백이 시공간적 경계를 벗어나 바깥으로 유출되면 정상적인 질서와 겹쳐져 법질서 외부와 내부의 식별이 어려워진다. 그런데 공동체로부터 버려지는 추방령은 예외상태에 의해 끄집어내어진 것이 버림받는 방식으로 배제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추방령을 받은 자는 단지 법의 바깥으로 던져지거나 법과 무관해지는 게 아니다. 법으로부터 버림받고 생명과 법,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 속에서 돌출하는 삶을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이라 부른다(Agamben, 1995/2008). 내부와 외부에 주권자가 동시에 거주한다면 호모 사케르는 내부에도 외부에도 속하지 않는 비식별역의 존재이다. 주권자가 신화적 존재라면 호모 사케르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그리고 법의 효력이 미치는 내부를 ‘노모스(nomos)’, 효력이 미치지 않는 외부를 ‘퓌시스(physis)’라하고 또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살아있음을 ‘조에(zoe)’,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비오스(bios)’라고 아감벤은 얘기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기호 사각형이 그려진다(최용호, 신정아, 2012).
한편으로 상상계, 상징계, 실재를 기호 사각형 위에 배치한 그림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실재는 교차 모순의 지점으로 존재함 자체가 아니라 존재함의 역량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의미론적 기획과 시도에 대한 철저한 저항력을 뜻하며, 모든 지시를 결여한 채 오직 발화력 만이 발휘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위의 호모 사케르 기호사각형과 겹쳐서 읽어볼 경우 주권자는 내부와 외부의 대립 속에 위치한 상상계와 일치하며 비오스와 조에는 상징계에 그리고 호모 사케르는 실재에 위치한다. 즉 주권자는 내부에도 외부에도 속하지 않는 신화적-상상계적 존재라면 호모 사케르는 실재의 구역에 위치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주권자는 대표성과 상징성 자체가 중요할 뿐이고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반면 호모 사케르는 현시하지만 재현되지 않는 존재이다. 실제로 살아있고 존재하나 그 어떠한 대표성도 담보되지 않은 오직 생명뿐인 벌거벗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실재-호모 사케르의 위치는 예외 상태가 규범적으로 실현된 구조이자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될 때 열리는 공간을 말한다. 이는 근대국가의 확고한 기반으로 간주된 국민-국가-영토라는 허구적 삼위일체가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즉 이런 호모 사케르의 위치는 대립의 의미론적 구조 자체를 와해시키며 화행력적인 강제력만을 발휘하게 하는 곳인 교차모순의 역동지점이다. 즉, 호모 사케르 자체가 사회구조에 있어서 실재적인 무엇이 되는 셈이다(2012, 158-194쪽).
그리고 다음으로는 두 영화 분석에서 발견되는 담화는 어떠한 것이며 그 함의를 발견하기 위해 라캉의 네 가지 담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순수한 논리로 이뤄져있으며 무의식 또는 억압된 것이 회귀하면서 그것은 담화의 조직 속으로 투사된다. 이런 담화 이론의 장점은 개인적인 주체의 정신분석과 집단의 정신분석을 한데 묶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임진수, 2010, 114-115쪽). 그 담화는 주인의 담화, 과학 담화, 히스테리 환자의 담화, 분석가의 담화로 나누어진다. 주인의 담화는 네 가지 담화의 기본형으로 발생적으로 일차적 담화를 차지한다. 주인의 담화에서 지배적인 것은 S1이라는 주인기표이다. 주인은 노예(S2)에게 지시하는데 그는 주인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지식을 체현하게 된다. 하단의 대상 a는 생산된 잉여가치를 나타낸다. 이는 노동자의 활동에서 오며 자본가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향유이다. 주인은 상징적 거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며 자신의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기표에 의해 발생한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은 은폐된다(Fink, 1997/2010, pp. 240-241).
김소연은 주인담화를 전 혁명적 구체제 혹은 독재 체제의 지배형식으로 보며 과학담화를 후 혁명적 새 주인으로 지배관계를 합법화하는 형식으로 파악한다. 과학담화는 구성적 기만을 근거로 하며 주인의 칭호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인을 자처한다. 1980년대 신군부의 독재는 주인담화의 형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의 한국사회의 이행은 주인담화로부터 전문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과학담화 시대로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2008a, 82-83쪽).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과거 80년대의 독재정권이 주인담화가 국가에 의해 권위를 가진 담화였다면 오늘날의 과학담화는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초월적 명령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조선령, 2011, 234-235쪽). 과학담화는 중립적 지식의 위치에서 발화된다. 이는 실재의 잔류자를 주체($)로 바꾸면서 잔류자에게 말을 건다. 가로줄 아래 숨겨진 과학 담화의 진실은 권력이다. 이는 수행적 차원을 부정하는 담화이다(Zizek, 1998/2012, pp. 129-130).
히스테리의 담화에서 좌측 상단은 말을 하게 됨으로써 분열된 주체이다. 주체는 자신의 결여를 보상하기 위해 주이상스를 열망하는데 왼편 아랫단의 대상 a가 그것이다. 하지만 히스테리 중상 속에서 대상 a는 주체의 분열을 더 가속화한다. 주체의 말은 S1을 향한다. S1은 히스테리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해줄 것을 요청하는 의사나 아버지와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권력이다. 그 하단의 S2는 히스테리 환자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의사가 산출해내는 지식을 가리킨다(백상현, 2016, 144, 145쪽).
분석가의 담화에서 분석가는 히스테리 환자의 욕망이 지식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공백을 억압하지 않으며 공백 자체가 된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구성하게 된 다양한 지식들이 근거하고 있는 최초의 기표를 찾아내고 기존의 지식들이 아닌 삶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배치해내야 한다. 그리하여 S1은 현재 삶이 출현하게 한 폭력이자 새 삶이 가능해질 수 있게 하는 혁명적 개방의 기표가 된다(백상현, 2016, 151쪽). 이런 분석가의 담화는 정신분석 목표인 주체의 궁핍화를 지향하며(김석, 2015, 191쪽), 이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주체 자신의 실재적 결여와 상징계-기표의 결여를 이중적으로 파악하는 철저한 비움의 과정이다.
3. 연구대상 및 연구방법
1) 연구대상
본 논문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유가족들의 투쟁 상황을 다룬 두 영화 <다이빙 벨>과 <나쁜 나라>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다이빙 벨>은 세월호 침몰 사흘 후에 팽목항에 도착한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가 현장 상황에서 은폐된 사실이나 현상을 발굴해내어 공개하는 탐사 형식의 다큐멘터리이다. <나쁜 나라>는 2014년 6월 5일부터 2015년 4월 4일까지 약 1년 동안 유가족들이 세월호 침몰의 진상 규명을 위해 벌인 투쟁 양상과 자취를 추적하는 기록 영화이다. 전자가 현장에서 기자가 관찰하고 반대 세력들의 알력에 맞서서 상황에 개입한다면, 후자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일정 정도 둔 다큐멘터리이다. 우선 일반 뉴스가 전달하는 뉴스 이면의 사안들과 목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뉴스 담화와 차별된다. <다이빙 벨>의 경우 제 19회 부산 국제 영화제의 와이드 앵글 쇼 케이스 부문에 초청되었는데 부산시가 영화제 조직위원회에 상영 중지를 요구했고 이에 영화계 및 시민단체들이 반발한 뒤에 상영한 내력이 있는 영화이다. 그만큼 영화 자체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만큼의 담화로서의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을 나타낸다. <나쁜 나라>는 2015년 12월 3일 개봉하였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진도, 안산, 국회의사당, 효자동, 광화문 등지에서 유가족들이 벌인 투쟁 활동을 시민 기록위원회가 촬영하고 편집한 작품이다. 두 작품은 뉴스보다 긴 호흡을 하고 있고, 차가운 미디어(cool media)인 TV가 아닌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뜨거운 미디어(hot media)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점 또한 뉴스와 차별되는 특성이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킨 데이터로 가득한 미디어를 말한다(McLuhan, 1964, 1994/2011, p. 60). 또 영화는 발명 당시부터 사회성을 띤 매체였으며 소비에트 몽타주(soviet montage) 영화와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영화 등은 사회변동과 맞물려 사회를 반영하고 또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Stam, 2000)을 상기해야 한다. 영화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한편으로 현실 속에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의 층위를 노출한다. 즉 영화는 주체의 트라우마 혹은 사회적 적대가 노출되는 시공간이 된다. 사회 속에서 실재는 봉합되기 어려운 계급적, 성적, 민족적, 인종적 적대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김소연b, 2008, 140, 250쪽). 게다가 영화보기의 체험은 관객을 실재 앞으로 소환하여 난감한 윤리적 질문에 노출시키는 계기와도 같은 것이다(김소연c, 2008, 17쪽). 두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의 진실은 무엇인가, 유가족들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라고 말이다.
2) 연구방법
연구방법으로는 기호가 시간에 따라 연쇄적으로 배열되는 통합체, 대체될 수 있는 다른 기호들과의 대비 관계인 계열체에 대한 분석을 할 것이다(Smith, 2001/2008, pp. 187-189). 그리고 텍스트에 있어서 대상을 전달하는 자와 수신하는 자, 그리고 대상을 욕망하는 주체, 그리고 그를 둘러싼 조력자와 대립자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을 적용할 것이다(Greimas, 1984, pp. 201-207). 미디어 기호학이 그러하듯 매스 미디어 콘텐츠에 내포된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구조와 실천양식의 심층적 층위를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Dansei, 2015, p. 485) 할 것이다. 또 텍스트내의 의미의 기본 구조와 그들 사이의 대립, 모순, 함축 관계를 통한 심층적 도식을 제공하는 기호사각형을 통한 관계망을 찾아낼 것이다(Sebeok, 1986, p. 1016). 그리고 분석을 통한 해석에는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과 이론을 활용할 것이다.
4. 분석 결과
1) 통합체와 계열체 분석
두 영화는 이런 차이점을 보인다. <다이빙 벨>이 구조의 시급성을 요구하는 현장 상황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하다면, <나쁜 나라>는 정부로부터의 구조가 없는 유가족들의 소외된 상황을 조망한다. <다이빙 벨>은 현장 인터뷰를 통해 현장 탐사보도의 어려움을 보여주며 화자가 갈등 상황에 개입하거나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이 부각된다. 게다가 참사 이후의 시점에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인서트 장면이 군데군데 삽입됨으로써 화자의 현실 비판적 시각을 뚜렷하게 노출한다. 반면 <나쁜 나라>는 보이스 오버(Voice-over) 내레이션을 통해서 극의 전개 상황을 연대기적으로 축조한다. 먼저 이 두 영화의 통합체 구조를 파악해보기로 한다. 행위와 선택의 분기점을 중심으로 통합체를 분절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이빙 벨3)>은 7개의 의미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세월호 구조에 대한 오보와 침몰한 세월호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오보가 지닌 거짓이라는 의미특성을 띤다. 오보라는 거짓에 대한 진실은 세월호 침몰이며 다음 2번째 단락에서는 구제의 수단으로 다이빙 벨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벨이 세월호 침몰현장에 접근 불가능한 모순적 상황과 이에 대한 오보에 담화의 초점이 맞춰진다. 네 번째 단락에서는 벨의 투입이 이뤄지기까지의 해경과 유가족들의 갈등과 약속 위반, 바지선 접안 거부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다섯 번째 단락은 투입한 벨에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대해 실패라고 보도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여섯 번째 단락에서는 해경고속정과 충돌사태가 발생할 뻔하고 벨 재투입시도를 했으나 알파 잠수기술 대표 이종인씨가 감당할 수 없는 벽을 절감하고 현장에서 철수한다. 일곱 번째 단락에서는 벨 철수에 유가족들은 기만당했다고 항의하고 여당 국회의원들이 비난을 퍼부으며 보수 시민단체가 JTBC의 손석희 앵커, 이종인씨, 인터넷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를 고발하는 일련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유가족들은 진실규명을 위한 도보 및 추모행진을 한다.
이 작품에서는 벨을 투입하느냐 마느냐의 갈등의 축과 진실과 거짓이라는 진위의 축이 발견된다. 정리해보면 단락1에서는 사건과 이에 대한 거짓 오보가 단락2에서는 벨 투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단락3에서는 벨이 사고 현장에 접근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이에 대한 오보가 생겨난다. 단락4에서는 벨 투입을 둘러싼 갈등이 생겨나며 단락5에서는 벨이 투입되었으나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실패로 보도한다. 단락6은 벨을 재투입했으나 구조적 장벽이라는 문제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철수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단락7에서는 벨에 대한 비난과 이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한 유가족들의 행동이 시작된다.
첫 번째 이항대립은 벨을 투입하는데 있어서 유가족 및 이종인·이상호 일행의 결정권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행위에 있어서 주체적인 존재가 되기 어렵고 정부의 결정에 따라 행위가 제약되는 인물들이다. 두 번째 이항대립은 벨 투입 및 참사에 관한 언론 보도가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첫 번째가 결정에 있어서 주체가 될 수 없는 소외의 문제라면, 두 번째는 상황에 대한 소통에 있어 오류에 따른 소통의 문제이다. 결국 이런 소통에 있어서 유가족들과 이상호, 이종인 일행은 소외된다. 즉 <다이빙 벨>을 일관되게 엮는 커다란 줄기는 ‘행위와 소통에 있어서의 소외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벨을 투입하는데 있어서 결정 불가능한 지연된 상황이 그들을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게 1차적 ‘행위의 소외’라면 2차적 소외는 벨 투입의 진실에 대한 ‘소통의 소외’이다. 유가족들과 이상호, 이종인 일행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도 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전달할 수도 없는 소외된 이들이다.
<나쁜 나라>는 다음과 같이 9개의 단락으로 분절할 수 있다.
단락1은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참사 현장을 방문해서 유가족들과 간담회를 갖고 세월호 국정화 특별 위원회 기관보고에 관한 도입부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유가족과 정부의 대면이 이뤄진다. 단락2는 특별법 제정 위한 순회버스 서명시작, 국회 농성시작, 특별법 지정 촉구 기자회견, 광화문 광장 농성돌입, 특별법 제정 촉구 국민 청원 대행진 등을 아우르는 것으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유가족의 투쟁이 시작된다. 단락3은 여·야 특별법 제정이 실패하고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도보행진이 시작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단락4에서는 유가족과의 논의 없이 여·야간 1차 합의가 이뤄지며 단락5에서는 이 합의를 파괴하는데 교황이 내한한다. 유가족 중 김영오씨는 교황에서 세월호 참사 특별법 제정에 대한 바람을 전한다. 이어 여섯 번째 단락에서는 유가족과의 논의 없이 소외된 여·야간 합의가 이뤄진다. 일곱 번째 단락은 단식 40일째에 접어든 김영오씨가 병원에 후송되며 새누리당-세월호 가족 대책위 면담이 최종 결렬된다. 그리고 국민서명 청와대 전달을 위한 유가족들의 삼보일배가 실시된다. 여덟 번째 단락에서는 국회 여·야 세월호 가족 대책위가 2차, 3차 회동을 가지며 국회 여·야 원내 대표가 세월호 특별법을 타결한다. 유가족의 동의 없이 일방적 보상기준 발표 된다. 아홉 번째 단락은 특별법에 대한 유가족들의 저항으로 시위와 삭발식, 도보행진 등이 진행됨을 보여준다.
이들 통합체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항대립의 축이 발견된다.
정부와의 대면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유가족의 투쟁이 시작되는 저항은 시위, 국회 앞과 거리의 노상 투쟁, 길거리 및 순회버스 서명, 삭발식, 단식, 도보행진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저항은 여·야간의 합의는 있지만 유가족들의 욕망은 소외되는 결과를 반복한다.
저 위의 단락 분석표-통합체 분석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소외와 저항의 연속이다. 특별법 제정에 있어서 유가족은 주체가 될 수 없는 행위의 소외와 소통의 소외를 경험한다. 정부의 답변 없음에 대한 답변 요구는 이로부터 확장된 인정을 요구하게 되는데 여당과 정부 측은 참사에 있어 국소화 된 원인에서 비롯된 사고(일명 교통사고)만 인정한다. 반면 유가족들은 참사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답변 불가능의 지연된 상황 앞에서 유가족들은 답변 없는 소외에서 벗어나려고 인정 투쟁의 방식을 서명, 피해자 사진 및 유품 전시, 도보행진, 단식 등으로 확장해나간다.
이런 통합체와 계열체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행위자들을 살펴보는 것은 텍스트 내에서 작동하는 구조 및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
2) 행위자 모델 분석
그레마스(Greimas)의 행위자 모델에서 전달의 축은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대상을 전하는 일방적 전제조건의 관계이며 욕망의 축은 주체와 대상 간의 능동과 수동의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능력의 축은 조력자와 적대자의 대립적 관계를 가리킨다(김기국, 2003, 162쪽).
<다이빙 벨>에서 발신자인 정부는 대상인 ‘구조’를 수신자인 승객에게 보내지 않고 유가족들은 ‘구조’를 욕망한다. 여기에서 욕망의 대상인 구조는 수신자인 승객들을 구조하지 못할뿐더러 주체인 유가족들을 소외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점은 <나쁜 나라>에 고스란히 계승된다.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발신자가 보낸 대상 안에서 이뤄지지 못하며 보조자는 욕망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있어서 발신자의 방해를 받는다. 전달의 축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며 욕망의 축은 수신자이자 적대자에 의해 끊임없이 저지되고 간섭받는다. 전달의 축의 일방성은 주체에게 욕망할 대상을 얻지 못하도록 한다. 또 욕망의 축은 주체인 유가족들을 철저히 수동적인 위치로 소외시킨다. 대상은 수신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또 주체에게 욕망되지 않는 구조 없는 구조인 셈이다.
다음은 <나쁜 나라>의 행위자 모델이다.
발신자인 정부가 보내는 대상인 특별법을 유가족들은 욕망하지 않는다. 즉 특별법은 유가족들이 처한 곤궁의 상황에서 그들을 구조하지 못한다. 그들의 욕망을 무시한 발신자의 일방적인 전달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주체와 그의 욕망은 소외된다. 그래서 발신자가 보내는 대상 이상의 것을 욕망하기 위해 <나쁜 나라>에서는 소외된 주체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투쟁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주체는 대상인 특별법에 있어 철저히 수동적 위치에서 소외된다. 전달의 축에서 대상은 일방성을 강하게 띤다. 특별법은 욕망하지 않은 강제적인 것으로 전달된다. 즉 전달의 축 앞에서 욕망의 축은 강요되는 셈이다. <다이빙 벨>과 <나쁜 나라> 이 두 영화에서 발신자가 전달하는 대상은 알맹이가 없는 대상이다. 또 주체들은 그 대상 이상의 자신들이 원하는 본질적인 대상을 욕망한다. 두 행위자모델에서 대상은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의 욕망은 발신자가 전달하는 대상에 머물 수가 없다. <다이빙 벨>에서 주체는 욕망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었고, <나쁜 나라>에서는 욕망할 대상을 강요받는다. 즉 그의 욕망은 전적으로 발신자의 대상이자 욕망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런 전달의 축의 일방성과 욕망의 축의 수동성을 탈피해야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이런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망을 강요받는 관계로부터 분리가 필연적이다.
3) 운동의 특성
<다이빙 벨>에서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인 구조가 번번이 이뤄지지 못한다. 구조는 발신자가 전달한 대상의 구조가 아닌 벨의 투입이라는 다른 대상을 통해서 욕망된다. 그런데 벨의 투입은 발신자에 의해 계속 지연된다. 주체는 욕망하는 벨을 욕망할 수 없게 발신자에 의해 방해받는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곳은 접근불가능한 공간이 되며 그 앞에서 구조의 시간은 지연된다. 유가족은 참사 현장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욕망을 실현해 줄 벨이 현장에 투입되는 것을 방해받는다. 벨은 사고 지점에 (수직운동을 통해) 잠수하는 것을 번번이 제지당하거나 외부 요인 때문에 실현하지 못한다. 벨은 소외된 유가족들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하나의 도구이자 기호이다. 벨의 수직운동 탐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그것은 매번 그 결과가 실패로 보도되는 대상이 된다. 한마디로 목적지에 벨은 이르지 못한다.
<나쁜 나라>에서 유가족들은 정부가 제안한 특별법에 반대해서 전국 순회버스 서명을 실시하고 광장에서 농성을 벌이며 국민 청원 대행진을 한다. 이런 유가족들의 조력자를 얻고자 하는 운동은 수평적이며 이는 목표지점인 국회 앞에서 멈춰지고 지연된다. 유가족들은 특별법을 제정, 수립하고자 하는 존재로서 소외된다. 마치 성안이나 법정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카프카(Kafka)의 소설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유가족들은 대상(사고현장, 국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대표성이 담보되지 않고 대표성은 여·야 정치인들, 관계자들이 대신 취함으로써 소외된다. 그들은 아무 대표성도 없으며 특별법 제정이나 벨 투입에 있어서 단지 유가족이나 가족으로서 무기력하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런데 <나쁜 나라>의 단락2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순회버스 서명 시퀀스를 보면 다큐멘터리 영상을 단절시키는 듯한 화면이 등장한다. 길거리에서 한 유가족이 든 플래카드가 화면을 약 70초가량 가리는데(17분 37초~18분 7초까지) 유가족이 흐느끼는 소리, 시위에 사용된 노래 소리는 들린다. 이는 영상의 맥을 끊고 화면을 가리는 차폐막으로 기능하여 영상에 오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장면이다. 이 화면 가림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볼 수 없음’이다. 볼 수 없는 순간 자체를 재현하는 일순간 지워짐을 재현하는 장면이다. 이는 라캉식으로 얘기하자면 가리는 기능, 볼 수 없음 속의 현시 속에서 출현하는 응시라고 할 수 있다. 대상과 시선 사이의 관계를 가림막으로 지워버림으로써 대타자의 응시가 출현되는 것이다. 시선-교환의 상호적 기능을 정지시킴을 통해 대타자의 응시가 일순간 드러나는 것이다(백상현, 2016, 251-252쪽). 이 장면은 유족들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날인이자 지표로 화면을 뒤덮는다. 우발적 요소이자 영화의 표면에 균열을 내는 세부로 유족들의 상실된 대상을 보이지 않게 보여준다. ‘보이는 것 없는 보여짐’의 차단된 순간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관객은 플래카드의 글씨-메시지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카드의 이면(이는 카드를 든 유가족이 시점이다)이자 공백만을 보게 된다. 이런 공백의 화면은 영화의 흐름을 끊어내고, 보는 이의 정서를 흐느낌의 사운드 안에 고립시킨다. 그 틈 안에서 시간과 공간은 정지한 듯 혹은 머무른 듯이 여겨진다. 이 장면은 유가족들의 외상 자체를 일순간 드러내는 동시에 영화 표면에 흠을 내는 하나의 낯선 외상으로 출현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영화가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시적 멈춤은 유가족들을 둘러싼 정부, 정치계 및 사회의 명령 및 일상적 현실의 잡음의 흐름을 끊어낸다는 점에서 충분히 정치적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작동하지 않았던 국가 기구가 내린 멈춤의 명령인 ‘가만히 있어라’를 다시 답변으로 되돌려주는 듯한 정지와 공백이 쏘아보는 순간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멈춤 - ‘가만히 있어라’를 공백으로 드러내는 좌절상황에 대한 멈춤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유가족들의 욕망과 의도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실행되지 못한 채 좌절된다. 혹은 좌절을 좌절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유가족들 자신의 욕망을 담은 메시지 전달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메시지 전달의 방식
편지는 늘 수신자에게 도착한다는 라캉의 말은 그 수신자가 바로 대타자라는 데 요점이 있다. 상징계의 주체가 쓰는 편지의 진정한 수신자는 대타자이다. 실질적으로 수신자에게 온전히 도달하는 유일한 편지는 부치지 않는 편지이다. 또 앞서 살펴보았듯이 증상은 무의식적 욕망과 외상에 관한 암호화된 메시지로서 그 수신자는 가상적인 대타자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주체가 위치한 상징계, 즉 언어적 세계의 대타자를 향한 것이기에 메시지의 송신은 수신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본인이 돌려받기 위한 것이다(이병창, 2013, 327-328쪽). 그래서 편지는 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모든 메시지들은 항상 주체에 의해 역전된 형태로 수신된다. 즉 ‘말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개체적 무의식 개념으로부터 언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초개체적 개념으로의 점진적 이행’을 한다(Chiesa, 2007/2012, p. 94). 이런 점에서 볼 때 세월호 참사가 사회적 증상이라면 그 수신자는 대타자가 된다. 두 영화에서 주체인 유가족들의 메시지는 어떻게 대타자에게 전달되는 것일까?
<다이빙 벨>의 주체인 유가족과 조력자들은 첫째 소통되지 않는 정부와 싸우고 둘째 오보를 연속해서 생산하는 언론과 싸운다. <다이빙 벨>은 오보의 메시지로 시작해서(첫째 단락) 벨의 현장접근불가에 대한 오보(세 번째 단락)와 벨 투입이 실패로 보도되는 진실을 도외시한 오보(다섯 번째 단락) 등의 오보와 진실간의 다툼이 지배적이다. 소통 불능 상태에서의 진실은 고립되고 마지막 일곱 번째 단락에서는 소외된 진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호소하기 위해 유가족들이 거리로 나선다. <나쁜 나라>에서 유가족이 투쟁하는 방식은 정부와 대통령에게 하소연, 전국에 걸친 특별법 청원에 관한 길거리 서명, 교황에게 편지 전달, 그리고 단식투쟁이다. 이로써 자신들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다이빙 벨>이 오보와의 진실투쟁에 영화의 무게 중심이 놓인다면 <나쁜 나라>에서는 유가족들의 메시지를 국가/정부에 전달하는 투쟁이 주축을 이룬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소통에 대한 절박한 호소라고 환원할 수 있다. 두 영화는 각기 숨겨진 진실을 전하고(<다이빙 벨>) 단순한 물적 보상을 원하지 않는 유가족들 마음의 진실(<나쁜 나라>)을 국가/정부와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 메시지는 유가족들 주체가 되돌려 받는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상적 대타자에게 메시지는 온전히 전달된다. 대타자는 앞서 지적했듯 주체의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가상적인 존재이자 상징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타자에게 히스테리 환자처럼 끝없이 질문한다. 편지는 도착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는 셈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상징적 수준에서 그들의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현실에서는 도달에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요점은 유가족들에게 있어 편지는 도착했지만 대타자가 이에 응답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 쪽에는 존재(being)가 있다면 대타자 쪽에는 언어, 제도, 문화, 의미(meaning)가 있다. 주체는 비의미의 영역으로 분명한 의미는 물론이고 스스로 만들어낼 의미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강도 앞에서 주체가 존재를 선택하면 언어를 잃는 것이 되고 돈을 선택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이런 선택의 상황을 라캉은 소외의 벨(vel)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주체의 ‘나는 대타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타자는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한다. 사회에는 주체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하거나 인정 추구에 응답해줄 권위 자체가 부재한다. 대타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 주체 스스로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Salecl, 2004/2015, pp. 177-181). <다이빙 벨>과 <나쁜 나라>의 주체들은 응답을 기다리지만 대타자는 침묵한다. 두 작품에서는 두 가지 소통의 실패가 내재한다. 하나는 국가가 주체에게 하는 소통의 실패라면 다른 하나는 주체가 국가와 소통하는데 있어서의 실패이다. 대타자가 말하는 (진실에 대한) 침묵에 대해 주체 스스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유가족들은 끝나지 않는 히스테리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히스테리 환자는 스스로 타자의 욕망이 됨으로써 타자의 욕망을 실현되지 않는 욕망으로 남겨둔다. 타자의 욕망은 실재가 아닌 의미효과 쪽에 자리 잡게 된다(맹정현, 2009, 81쪽). 히스테리 환자는 타자의 욕망이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 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그녀는 타자 속 결여를 감춰주고 타자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남근적 여자로 가장한다(Salecl, 1989/2003, p. 111). 이런 이유로 히스테리 환자는 끝없는 질문을 타자에게 던진다. <다이빙 벨>은 국가/정부로부터 명령을 받는 입장에 서있는 유가족들을 주시한다. 그야말로 유가족들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그녀들은 희생자인 자신의 아이들과 어쩔 수 없이 동일시된다. 한편 <나쁜 나라>는 유가족들이 국가/정부에 자신들의 메시지, 즉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해명 요구사항을 전달하려고 사력을 다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유가족들은 ‘가만히 있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다이빙 벨>에서 어쩔 수 없는 기다림 때문에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던 유가족들이 <나쁜 나라>에서는 능동적인 투쟁에 돌입하지만 여전히 소통의 벽이라는 한계 안에 갇히고 만다. 즉 <다이빙 벨>에서 유가족들을 대신해 세월호에 갇힌 승객을 구하는데 국가가 무능했다면 <나쁜 나라>에서는 자식을 구출하지 못한 국가, 정부에 대해 자식을 대신해서 부모들은 탄원하나 무능한 위치로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끝없이 “왜?”라는 질문을 타자에게 던진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타자로부터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5) 인정투쟁
라캉에 따르면 인정욕구는 타자의 욕망을 통해 매개된 욕망이며 제3자 자리에 있는 시선의 이상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이다. 이런 시선과의 동일시-인정욕구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탈피하게 된다. 주체는 인정욕구라는 형태나 주체화라는 형태로 타자의 장에 접속되어 있는 것이다(맹정현, 2009, 260-261쪽). <다이빙 벨>의 7번째 단락은 인정투쟁을 시작하는 내용이며 그동안 있었던 국가로부터 수신된 오보와 팽목항 현장에서 사회로 내보내진 오보에 대한 진실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열린 구조를 보여준다. <나쁜 나라>는 2번째 단락부터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심적 진실에 대한 인정투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국가/정부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야당마저 그들의 심적 진실과 의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야간 합의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유가족들을 소외시키며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여·야의 특별법 타결은 유가족들의 입장을 무시하기에 그들은 인정투쟁을 국면 상으로 세 차례나 시도한다. 이런 유가족과 희생자들에 대한 존엄성 및 인격성에 대한 훼손이 중요한 저항 이유가 된다. 호네트(1992)가 지적했듯이 사회적 투쟁은 언제나 무시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인정투쟁이다. 그런데 호네트의 인정 패러다임이 간과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정질서 외부의 경제적 요인들을 설명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라캉의 대타자 개념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의 이론적 고찰에서 언급했듯이 대타자는 우리의 환상이며 대타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남에게 맡기는, 실질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대타자의 역사는 곧 우리의 역사로 대타자는 변화해왔다. 근대성과 더불어 다양한 대(大)주체들이 출현했으며 자기근거로 신, 나라, 혈통을 참조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오늘날의 대타자는 시장이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정질서 외부의 경제적 요인들을 포괄하는 인정의 문제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게 된다. 라캉의 대타자는 주체의 심적 공간에서 타자의 존재와 더불어 주체의 결단이라는 문제가 부각 된다. 게다가 대타자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개되며 오늘날에는 시장이 되기에 주체는 시장으로부터의 인정을 원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인정질서 외부의 경제적 요인을 포괄하는 대타자의 인정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나라>에서 유가족들의 인정투쟁 대상은 국가였지만 오늘날 사회의 약해진 대타자가 시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홍준기(2015)는 개인과 국가를 연결시키기 위해 ‘충분히 좋은 엄마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클라인에 의하면 아이가 좌절을 견디고 성숙한 자아를 갖추기 위해서는 좋은 엄마의 배려와 돌봄이 필요하다(Klein, 1975/2011, pp. 188-189). 이런 개념을 확장시켜 개인의 자유는 전제조건인 가족적, 사회적 환경, 즉 좋은 엄마의 배려와 돌봄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개인의 성숙은 개인적 문제 뿐 아니라 엄마와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 등 환경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사회제도 및 공공정책을 필요로 한다. 이런 좋은 엄마와도 같은 국가는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온갖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국가를 일컫는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바로 그러한 충분히 좋은 엄마로서의 역할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주체들의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은 시장이 되었고, 따라서 대타자는 시장이다. 그것은 부서지기 쉽고 가상적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그동안 기대해 온 보호해주는 국가는 없고, 그 자리를 시장원리가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선민, 이상길(2015)은 세월호 의견기사에 나타난 국가 담화 분석연구에서 <조선일보>는 발전주의,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복잡하게 착종시킨 국가담화를, <한겨레>는 근대적 정상국가, 복지국가를 지향하지만 국가 권력을 의인화, 인격화하는 국가 담화의 특징을 가진다고 결론 내렸다(2015, 5-66쪽). 두 신문의 국가 담화가 대중적인 국가에 대한 상상의 진폭을 펼쳐보였다는 두 연구자의 지적은 그것이 상상적인 국가관을 지시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엄마와도 같은 국가관에서 본다면 <한겨레>의 국가 담화가 이에 부합한다. 국가는 근본적인 인간불안(생명과 재산의 위협 등)에 대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우선시하고 공공영역의 축소를 지향한다. 오늘날의 대타자는 충분히 강한 대타자가 아닐 뿐더러 주체가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를 하는 한에서만 존재하기 쉬운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분히 좋은 엄마로서의 국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주장은 약해진 대타자가 결여하는 바를 넘어설 안전한 사회구축에 주체들의 적극적 실천이 요구됨으로 의미한다. 물론 이는 상상적인 국가관을 넘어서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국가관을 목표로 한다.
<나쁜 나라>의 유가족이 교황에게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는 편지를 건네고, 350만 국민 청원 대행진을 하며 시위 팻말을 들고 길거리 투쟁을 하고 국회 앞에서 노란 종이비행기와 종이배를 접어 전시하는 등의 행위는 국가의 인정을 요구하는 인정투쟁의 다양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실천인 동시에 한편으로 국가라는 추상적 대상-타자의 응시를 겨냥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상상된 응시는 환상의 특징(Zizek, 2001/2008, p. 379)인데 국가에 대한 유가족들의 환상을 반영한다. 유가족에게 여·야 정치인들과 대통령은 눈먼 척하는, 모르는 척하는 대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초자아의 외설성은 한편으로 대타자의 진실로 기능한다(신병식, 2014, 88쪽). 그들은 일종의 대타자의 다른 이면인 외설적 초자아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법 타결의 이름을 띠고 정치적 협상이 부분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나지면 그 이면은 유가족에 대한 일방적 무시에 다름 아니다. 이런 소외에 빠진 유가족들은 더 이상 국가와 여·야 정치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고 자신들의 신념과 생각을 의탁할 수 없기에 그들은 결과를 기약할 수 없는 외로운 투쟁에 나선다(<나쁜 나라>의 아홉 번째 단락).
6) 소외에서 분리로
이상의 분석에서 유가족들이 소외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다이빙 벨>에서는 처음 오보로부터 유가족들이 소외되고, 세월호 내부의 탑승자들도 국가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이후 그들은 오보를 통해 진실에 대한 소외와 정부로부터의 소외에 처하게 된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그런 총체적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가족들은 진실 규명을 위한 행동을 개시한다. <나쁜 나라>에서는 특별법 제정에 따른 국가로부터의 소외,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소외를 받게 되자 특별법 타결 이후에 탈 소외를 외치며 법이후의 새로운 법을 요구하며 저항한다. 특별법 타결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타결된 법이라는 주체의 결여, 국가의 결여를 가리는 보호막-환상에 빠져있는 셈이다. 즉 특별법이 국가의 결여를 대신하는 방어막으로 작동한다. 유가족들은 히스테리적으로 특별법에 대해 질문한다. 히스테리 담화는 주인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담화로 이와 대립되는 담화로는 주인담화와 과학 담화가 있다. 주인담화는 초월적 권력으로서 주인기표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과학담화는 이것의 변형으로 초월적 권력의 기표를 부인하나 과학적 지식을 추구한다. 오늘날의 과학 담화는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초월적 명령에 의해 작동된다. 이는 앞의 이론적 고찰에서 살펴보았듯이 탈근대적인 현재의 신자유주의 담화로 이 앞에서 주체는 초월적 명령에 굴복하고 그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구속된다. 독재정권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IMF 이후부터 경제를 정치보다 우선적 가치로 놓은 오늘의 한국사회에 부합되는 담화이다. 주인은 없는 듯 보이지만 대신 과학적 지식은 주체를 옭아맨다. 과학담화는 고정관념이라 부를 수 있는 언어로 증상이라는 체계를 위협하는 모호함을 포획한다. 세월호 참사를 선장의 리더십 문제나 단순한 해상 교통사고로 취급하고 차후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선진국 지향의 국가 구조 개선을 내세우는 보수언론의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두 담화에 대해 히스테리 담화는 주인의 욕망을 계속 의심함으로써 주인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유가족들의 특별법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금전적 보상이라는 과학담화에 따른 신자유주의의 통치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통치원칙은 주인이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기표의 그물망 일부처럼 은밀히 시스템에 편입된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의 지배형식이다(김석, 2015, 190쪽). 과학담화가 보이지 않게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이런 소외에 대해 유가족들은 질문을 끝없이 던진다. 히스테리적 구조를 띤 이런 태도는 권력을 쥔 타자에게 자신을 공백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지식으로 채워줄 것을 요청하는 것(백상현, 2016, 146쪽)이라 할 수 있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는 증좌다.
<다이빙 벨>과 <나쁜 나라>는 소통적 측면에서 사회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소멸을 통해 대타자의 결여에 응답한다. 이것이 소외이다.
반면 이 소외에서의 벗어나는 수단은 분리인데 주체와 대타자가 일시적으로 헤어지는 것이자 주체가 대타자로부터 방향을 되돌려 자신을 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론적 고찰에서 살펴보았듯 주체는 증상의 실재와의 동일시를 통해 대타자에 대한 믿음과 반대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뿐 아니라 주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이것이 분리의 급진적 형식인 주체의 궁핍이다. 분리는 상징적 정체성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 나로부터 대상 a의 분리를 일컫는다. 주체는 단지 대타자의 효과일 뿐이다. 주체와 대타자가 지위를 모두 상실하면 주체는 자신의 도래 원인과 동일시하고 주체의 궁핍에 이르게 된다. 비로소 주체는 자유로워지며 그 자신의 존재에 길을 열어주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들 뿐 아니라 국민들이 앞으로 적절한 타협이나 다른 주인담화, 과학담화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런 주체의 궁핍에 이르러야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즉 분석가의 담화가 요구된다. 분석가는 히스테리환자의 욕망이 지식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공백을 억압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백자체가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구성하게 된 다양한 지식들이 근거하고 있는 최초의 기표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지식들이 아닌 삶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배치해내야 한다. 이것이 앞서 이론적 고찰에서 살펴본 분석가의 담화이다. 이런 분석가의 담화는 정신분석의 목표인 주체의 궁핍화를 지향한다.
정리하자면 유가족들은 히스테리 환자의 담화위치에서 분석가의 담화로 자신들의 위치를 변화시켜야 하며 주체의 궁핍화를 통해 소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실존적 자유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유가족들이 의존했던 대타자의 욕망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면서 대타자 뿐 아니라 자신도 결여되어있음을 분명히 하는 비움의 과정이다. 이런 비움은 상징계의 결여, 국가의 결여와 존재 스스로의 원초적이고 실재적인 결여를 이중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된다. 대타자의 결여에 대한 응답으로서 주체 또한 존재하기 않기에 실재 존재, 주체 그 자신의 존재의 길이 열린다(Verhaeghe, 1998/2013, p. 229). 이런 이중의 결여를 깨닫는 과정을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의 관점에서 재구성해보고 이를 실재의 윤리와 연결시켜보기로 하겠다.
7) 실재와의 동일시, 호모 사케르 되기
<다이빙 벨>에 내재하는 이항대립의 축은 ‘벨을 투입 한다 ↔ 투입하지 못 한다’와 ‘진실 ↔ 거짓’ 이었는데 벨 투입의 결정권에서 또 진실에 대한 보도에 있어서 유가족들은 소외되었다. <나쁜 나라>에서는 ‘제시 ↔ 저항’과 ‘합의 ↔ 소외’라는 이항대립의 축이 존재했다. 이는 일방적인 정부 및 정치권의 법안 제시로부터의 소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외는 특히 두 작품에서 공간을 유가족들이 어떻게 차지하는가의 문제와 밀접하다. <다이빙 벨>에서는 유가족들이 팽목항의 부두, 유가족들의 임시거처인 강당에 묶여있는 것, 즉 결정과 진실에 있어서의 소외에서 탈 소외인 열린 거리로 나서는 것으로 전개된다. 즉 ‘닫혀있는 것’에 해당하는 것은 팽목항, 진도체육관, 벨이라면 ‘열려있는 것’은 일곱 번째 단락에서의 거리이다. <나쁜 나라>에서는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 길거리라는 열린 공간에 투쟁의 거처를 잡으며 이들에 대해 닫혀있는 청와대나 국회를 향해 호소한다. 그런데 닫혀있지 않은 곳, 열려 있지 않은 곳이라는 모순항의 공간 또한 존재한다. ‘닫혀있지 않은 공간’은 유가족과 정치권 인사들의 협의장소인 국회 앞마당이나 당사 실내, 기타 합의 장소(<나쁜 나라>)나 정부파견 인사들과 유가족들이 만나 맹렬한 질문을 던지고 분노하고 싸우는 진도체육관(이는 닫혀있는 공간이자 닫혀있지 않은 공간에 모두 해당한다. <다이빙 벨>)이라 볼 수 있다. ‘열려 있지 않은 공간’은 닫혀있는 공간과 함축관계를 이루는 데 닫혀있는 국회 앞의 천막을 친 장소, 혹은 국회를 나서는 대통령한테 유가족들은 구해달라고 외치지만 소통이 되지 않는 국회 앞마당, 서명을 수집하거나 각종 메시지가 맴도는 무용한 위치(<나쁜 나라>) 등이다. 이런 모순항에 속하는 닫혀있지도 않고 열려있지도 않은 것 사이의 축에 해당하는 것은 유가족들이라는 존재 자체가 함의하는 공간이다. 이는 체계의 한계를 나타내는 호모 사케르의 위치이다.
이론적 고찰에서 살펴본 상상계, 상징계, 실재의 기호 사각형 축을 여기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열려있는-닫혀있는’의 대립관계의 축이 상상계에 해당한다면 ‘열려있는-닫혀있지 않은’의 축과 ‘닫혀있는-열려있지 않은’의 함축관계의 축들은 상징계라 할 수 있다. ‘닫혀있지 않은-열려있지 않은’ 교차모순의 축은 실재를 가리킨다. 이들 공간은 의미론적으로는 불투명하지만 화용론적으로 강제성이 있는 지점으로 어떤 잠재적 역량을 감추고 있다. 모든 지시를 결여한 채 발화력 만이 발휘되는 공간으로 모든 상징화에 대한 기획 및 시도에 대한 저항력 자체이다. 상징화의 기획에서 배제된 단순한 생명으로서 유가족들은 유가족-정치권 인사들과의 협의 장소, 진도체육관, 여·야 대표들과의 합의 공간과 국회 앞 잔디밭, 서명 및 편지가 맴도는 무용한 위치·공간 사이를 차지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닫혀 있지도 않고 열려있지도 않은 이중의 부정으로 규정되는 예외상태의 수용소이자 유가족들 자체이다. 즉 그들이 실재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위치는 주권자에 맞서는 호모 사케르의 위치이다. 주권자는 내부에도 외부에도 속하지 않는 신화적 존재인데 비해 호모 사케르는 실재의 구역에 존재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즉 주권자는 대표성과 상징성 자체가 중요할 뿐이고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반면 호모 사케르는 현시하지만 재현되지 않는 존재이다. 실제로 살아있고 존재하나 그 어떠한 대표성도 담보되지 않은 오직 생명뿐인 벌거벗은 존재이다. 여기에서 대통령과 여·야 정당의 국회의원들이 신화적 존재라면 세월호 유가족들은 호모 사케르라는 것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상징계에 포함되지 않은 자리이며 배당될 수도 재현될 수도 없는 위치이자 흔적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런 호모 사케르는 예외상태가 규범적으로 실현된 구조인 수용소의 지위와도 같다. 이는 예외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열리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는 예외상태가 법적 질서로 들어와 편입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예외상태인 수용소는 인간, 시민, 출생과 국적 간 연속성을 파괴함으로써 근대주권의 근본적인 허구성을 문제화 한다. 유가족들은 예외상태의 존재로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들은 국회에서 여·야가 타결한 특별법을 거부할 것을 고집한다. 그들은 국회 주의의 경계를 맴돌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타자와 주체의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증상과 실재의 동일시, 즉 그 자신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5. 나가며
이상 통합체와 계열체 분석, 행위자 모델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소외의 존재임을 알 수 있었고 운동의 특성에서는 그들이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이자 무기력하지만 살아있는 호모 사케르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메시지 전달방식에서 유가족들은 히스테리적 위치를 차지함을 ‘소외에서 분리로’에서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주체의 궁핍화에 이를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런 실재와의 동일시의 태도를 통해서 상징계를 변화시킬 잠재력을 지닌 호모 사케르의 형상을 유가족들이 지닐 수 있음을 결론으로 얻을 수 있었다. 유가족들의 소외에서 주체의 궁핍까지 분석의 흐름을 그림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세월호 참사는 급격한 압축적 산업화의 결과물이고 일순간 사회적 기능을 정지시킨 신자유주의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한 산업화의 억압에 이은 신자유주의의 도입은 안전을 방기하는 위험사회를 초래했는데 세월호 참사는 그것을 표상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 앞에서 유가족들은 소외된 존재이며 그들과 더불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예외적 존재가 되어야 할 가능성 앞에 놓여 있다. 예외의 존재로서의 세월호 유가족들의 존재 의미는 정치적인 급진성으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우리 역시 정부, 국가와의 소통의 벽 앞에서 정권 교체나 법안의 협상, 타결에 그칠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라는 상징계와의 관계를 변동시킬 수 있는 공백과의 동일시를 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 있어라’를 다시 고장 난 상징계에 되돌려주는 수동적이지만 한없이 적극적인 역설의 행위인 ‘가만히 있는 것’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가 세월호 유가족들일 때 상징계-사회는 변화의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실제 그 변화는 대통령 탄핵으로 나타났는데, 또 다른 공백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Acknowledgments
이 연구는 2016년 CNU학술연구비의 지원에 의해 수행되었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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