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 비교연구
초록
본 논문은 한국과 일본에서 역사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발현하여 진화해 오는 과정을 비교 분석하였다. 이는 기업의 설립과 발전, 나아가 오늘날 CSR의 실행 주체이기도 한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가 시대별로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ⅰ) 전(前) 자본주의, ⅱ) 초기 자본주의, ⅲ) 현대 자본주의로 구분하였고, 각 시기별로 대표되는 자본가 집단과 그들의 CSR 정신과 윤리를 비교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의 상인계급 사이에 공유되던 CSR의 정신과 윤리를 발견하였다. 한국의 경우 일제 강점기로 CSR 정신과 그 도덕성이 훼손되었으며, 이후 현대 자본주의에 들어와 경제성장을 모토로 한국의 재벌(chaebol)들은 경제적 책임만이 강조되었을 뿐, CSR 정신과 윤리는 정치적 교환의 수단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경우 자이바츠(zaibatsu)해체 이후 등장한 게이레츠(keiretsu)를 필두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버블경제 붕괴와 세계화를 통해 일본의 CSR는 미국화가 나타났다.
Abstract
This paper analyzes the evolution of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in Korea and Japan. In particular, we compare characteristics of the formation of the capitalist group that leads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by establishing and developing the company, and its change and direction. To this end, we divide the history of capitalism into the following three periods, and analyze the CSR spirit and ethics of representative capitalist groups in each period: ⅰ) pre-capitalism, ⅱ) early capitalism, and ⅲ) modern capitalism. Through this comparison, we have found that the role of social responsibility required by the time period and the adaptation of capitalists to the demands of the new change, beyond the economic class struggle, and the common tradition among the capitalist classes of both Korea and Japan also the ethics of CSR. Its management philosophy and trader spirit has continued. In Korea, the spirit of CSR and its morality were undermined due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Japan, the emergence of new capitalists following Japan's demolition of zaibatsu and Americanization of CSR has appeared.
Keywords:
Capitalist, CSR SDpirit, Ethics, Korea, Japan키워드:
자본가, CSR 정신, 윤리, 한국, 일본1. 서 론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ethic)와 자본주의 정신(sprit)」(1904년)을 통해 자본가들의 경제행위와 프로테스탄트적(청교도적) 윤리와 상관관계를 밝혔다. 베버는 합리적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배양된 자본주의 정신에 의해서 발생, 성장하였다고 보았다. 이는 1970년대 이르러 통합적인 개념을 이르게 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이하 CSR)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CSR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경영활동 및 이해관계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통합시키는 개념(European Commission, 2002)으로 간주된다.
CSR은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와 문화, 그리고 역사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서구와 동양 사회에서 의미하는 CSR과 또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의미하는 사회적 책임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기구들은 CSR에 관한 국제적 규격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규격이 개별 국가 안에 국내법으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규제들은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 이는 기업의 입장에서 CSR을 기업경영에 포함한다는 것이 기존 ‘주주 중심주의’를 넘어, 주주이외의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해관계자의 확대는 넒은 의미에서 공익을 위해 회사의 이익을 ‘희생’(주주이익 감소)해야 하는 것으로 전문 경영인의 입장에서는 ‘선관주의 의무’에 대한 위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주주의 이익최대화를 목표로 하는 주주중심주의적 접근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소유와 경영이 일체를 이루는 폐쇄적인 소유구조 ‘재벌’(chaebol)체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른 국가의 기업들보다 대리인의 문제(agency problem)에서 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비(非)정상적일 만큼 적극적인 사회공헌 활동과 CSR 비용 증가를 나타낸다. 실례로 일본 기업의 사회공헌지출 비중을 비교한 결과, 2015년 기준 매출액 대비 사회공헌 지출비중으로 한국 0.19%(255개사), 일본 0.11%(333개사)로 나타났다. 즉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일본 기업의 사회공헌지출비중보다 높았다(전경련, 2016).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사회공헌 비용의 증대는 성장과 분배의 ‘대립적 관점’에서의 사회적 갈등비용일 뿐, 기업과 사회의 관계를 호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 못하다. 최근 에델만 코리아에서 실시한 기업신뢰도 조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기업 신뢰도 지수는 28개국 가운데 최하위로 나타났으며 사회공헌 지출비중이 우리보다 적은 일본의 기업 신뢰지수(41%)보다 12%p나 더 낮은 수치를 나타낸다. 또한 한국기업의 CEO에 대한 신뢰도 역시 24%로 매우 낮은 신뢰도를 보여주었다(에델만 코리아, 2017). 이처럼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CSR 활동에도 불구하고, 기업과 사회의 관계는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 인식의 중심에 있는 ‘자본가 혹은 기업가 정신’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기업가의 CSR 정신과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미 다수의 선행 연구에서 다루어졌으며 대부분 기업가의 ‘출신 계급이나 사회적 배경’이 CSR 정신과 윤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국내의 경우 CSR 정신과 윤리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재벌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졌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경험으로 인하여 이식된 자본주의 특징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자본가 계급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 태동과 관련해서 대립되는 두 이론(유물사관에 입각한 마르크스 이론과 베버가 주장한 이론으로 칼빈주의라는 종교적 윤리의 부산물)이 지배적이다 보니, 동아시아 지역의 CSR 정신과 윤리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대한 고찰이 미비한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사회학에서 노동계급에 초점을 맞춘 톰슨의 계급형성 이론의 개념을 빌어, 시대별로 대표되는 ‘자본가 계급’을 집단으로 구분하고,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CSR 정신과 윤리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자본가 계급의 출현배경을 둘러싸고 서구와 다른 역사적 특수성에 의해 자본가의 형성과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따라 그들의 이념이나 역할 혹은 CSR 정신과 윤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검토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보고, 그에 따라 대표하는 자본가 집단의 규명하여 그들 안에 CSR 이념이나 역할 혹은 윤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특히 전(前)자본주의의 상인계급에서부터 초기 자본주의,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시기로 각각 구분함으로써 전통 상인계급에서 근대 사상으로서의 면모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기업 정서로 인해 CSR의 부정적인 시각이 대두되는 가운데, 그 원인이 CSR의 내재적 발현의 부재와 기업가 정신 결여 때문임이 맞는 지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 대두된 재벌(財閥)이 갖는 한국적 특수성이 과거 일본기업이 지닌 재벌=자이바츠(zaibatsu)라고 불리는 일본 자본가 집단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께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이 비교분석 작업은 동아시아의 지역 내의 CSR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는데 있으며, 나아가 현재 문제시 되는 한국 재벌기업의 문제점을 일본의 자이바츠의 행보와 그 다음단계에서 나타난 자본가 집단의 발자취를 분석한 뒤, 앞으로서 한국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이론적 배경과 선행연구
1) 사회에 배태된(embedded) 자본가
사회학에서 계급과 관련된 연구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을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고 계급의식이라는 용어 자체도 ‘노동자 계급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본과 자본가가 현대 자본주의에 들어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가 계급(capitalist class)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수의 연구들은 자본가 계급이 다른 계급들보다 더 동질적이며 높은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응집력과 정치적 자의식도 가지고 있어, 계급 구성원들이 쉽게 단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Domhoff, 1974, 1975, 1978; Ornstein, 1986; Ratcliff, 1980; Seider, 1974; Szymanski, 1978; Whitt, 1980). 이는 자본가 계급이 계급의식에서 있어서 이익의 공동성의 인식과 기존 사회구조의 해석, 그리고 사회변화에 대한 대응전략에 기초하여 계급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동아시아 국가의 자본가들은 그들의 출현 배경에서부터 서구사회의 자본가 계급들과 차이를 나타내며 또 다른 모습의 계급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고 있다. 서구의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변혁과정을 이끈 주도 계급으로 인식한다. 이는 절대주의의 시대적 배경 하에 봉건사회의 구조적 타파를 목적으로 등장한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들로서 국가의 ‘압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구도 하에 전통적으로 시민사회 내의 사회 하부구조에서부터 성장한 계급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자본가들은 서구의 ‘개항’이라는 압력에 의해 유입된 자본주의로부터 국내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등장하였고 국가의 권력과 타협하며 ‘합법적 통치’를 유도함으로써 국가 자본주의적 권위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Thompson은 계급의 ‘총체적 성격’은 각 국가에 배태된 현대적인 의미의 포괄하고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은 마치 독립적인 실체로서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규정지어진 방식으로 구조화된 사회 속에 놓이게 된다. … 그 속에서 그들은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확인하게 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계급으로서 발견하게 되며, 결국 이러한 발견을 계급의식으로서 인식하기에 이른다”(Thompson, 1978). 이는 계급이란 직업집단의 범주가 아니라 ‘역사적 현상’으로서 역사적 사실에 기반 한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다(Kaya, 1984). 그리고 계급의식에 대해서도 사회구조, 즉 ‘생산관계’의 영향이 반영된 과거로부터 경험된 문화적 유산을 사용한 인간 행위자에 의해서 집합적으로 창조되는 것으로서 설명한다.
톰슨의 개념을 계승한 Katznelson & Zolberg는 전통적 이론의 기계적 도식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들은 ‘즉자적 계급-대자적 계급’의 도식에 빠지지 않는 방향으로 계급 형성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Katznelson & Zolberg, 1986). 하지만 계급형성 과정에 대한 객관적 조건으로서 거시적·구조적 조건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Przeworski는 톰슨의 자원론과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의 경제 결정론적 계급형성 이론모두를 비판하며, 대안적 이론적 틀로서 “계급은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에 의해서만 정의되며, 이것이 유일한 계급의 정의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앞서 톰슨이 언급한 ‘결국’이란 표현에 대해 세볼스키는 계급이란 자원론적으로 단선적인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관계의 조건에서 특정한 형태를 띠는 총체적 계급투쟁의 지속적 효과로 보았다(Przeworski, 1985).
종합해보면, 계급형성 과정에서 계급이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의 총체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것이다(Przeworski, 1985). 하지만 이때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가 계급투쟁을 구조화한다는 말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즉 사람들이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반영하는 방식에 따라 그 ‘역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선택의 구조라는 것이다(서재진, 1991).
2) 기업가 정신과 상인정신
기업가 정신은 현대 자본주의에 있어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학제 간 연구로 더욱 더 활발해 지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분야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르게 나타난다. Knight는 기업가 정신에 대해 불확실성과 위험의 부담으로부터 생기는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본다면, Schumpeter의 경우 생산적 요소의 새로운 조합을 발견하고 촉진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배종태, 2009). Cole은 이익중심의 사업을 시작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취지의 의도적 행위(위홍복, 2003)로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선행연구들을 살펴보아도 1980년대의 전통적인 경영(이윤추구)에서 1990년대 환경적 경영, 그리고 현대의 지속가능경영처럼 기업가 정신이 기업경영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그 형태가 변화해왔다는 사실에서는 이견이 없으며 현대 자본주의에 들어와 시장의 결함과 함께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업가 정신은 현대 기업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것이 아니라, 전통사회 전(前)자본주의부터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츠시타 코오노스케(松下幸之助)가 ‘상인도’(商人道)를 통해 상인정신에서부터 기업가 정신이 기원했음을 설명한다. 상인도란 ‘올바른 경영의 도(道)이며, 품질이 좋은 것을 만들어 적정한 가격으로 파는 것이 장사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전통사회의 상인 계급부터 공정성과 공동체에 입각한 ‘시장 윤리성’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며, 기업의 규모나 경영환경과 상관없이 상(商)행위를 ‘공존공영(共存共榮)과 번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상인정신’은 시대성에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임외석, 2014). 이처럼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기업가 정신은 과거 유통 중심의 경제활동의 상인들은 정신이 산업혁명을 거쳐,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생성된 기업(가)에게 계승된 것이다.
그런데 기업가 정신의 어원을 살펴보면, 기업(起業)의 정신은 ‘창업 정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인 정신의 계승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상인 정신은 ‘상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기업가 정신은 ‘창업’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기회나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 정신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른 맥락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업가 정신은 경제활동의 확대로 기업의 창업 뿐 아니라 기업의 생존 그리고 성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가 정신은 ‘경영이념’, ‘기업이념’이라는 용어와 혼용되고 있다. 경영이념이란 ‘기업경영에 필요한 가치관이나 신념 또는 지도 원리로서 명문화된 것’으로 경영철학과 경영이념 및 경영사상, 상인정신 및 상도, 그 밖의 유사용어들 간의 개념에 있어서 그 차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개념과 관련하여 두 단어를 연장선상에 있다고 놓고 해석하고자 한다.
3) 선행연구
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차별화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전략을 수립한다. 이 전략적 선택은 그들의 개인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사회적 요구나 그 가치가 공유되도록 이루어진다(Hambrick & Mason, 1984).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현재 국내 CSR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평가는 국내 기업의 최고경영자, 즉 기업가들의 특성이 구성원들 간의 분열과 이질감을 유발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은 미국의 주주중심의 지배구조에서 제기되는 대리인(agency)문제에서 보다 자유로운 측면이 있다.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은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여 발생하는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경우 ‘소유=경영자’로서 주주와 동등한 신분으로 재무적 이해관계를 나타내며 주주를 위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CSR은 주주(shareholder)가치창출의 개념을 넘어서 기업과 맺고 있는 이해관계자(stakeholders)들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CSR은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결책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기업(가)의 관점에 대한 논의라는 점이다(김태수, 2012; Matten & Moon, 2008).
이에 많은 선행연구에서는 CSR의 주요 동인으로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와 경영성과 및 외부적 동기 등을 논의하고 있다(Basu & Palazzo, 2008). 이는 기업이 궁극적으로 매출성과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대응하여야 한다는 이해관계자 이론(Stakeholder theory)의 기인한 것이다. 특히, 경영학에서는 경영성과를 CSR의 동기로 보고 사회적 책임과 기업의 재무적 성과 간 통계적 관련성을 도출함으로써 경영자가 CSR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Margolis & Walsh, 2003). Barnett는 기업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투자할 때, 신뢰를 확보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여 재무적 성과를 향상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신뢰의 확보나 브랜드 이미지는 개선 등으로 인한 성과 향상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장기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Barnett, 2007). 이러한 점에서 CSR로 인한 성과차이뿐만 아니라, 그 효율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 Basu와 Palazzo(2008)는 CSR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이해 없이 CSR 수행에 따른 차이를 논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CSR에 많은 책임을 가지는 경영자로부터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Waldman et al., 2006). Phillps 등(2003)도 경영자의 도덕적 가치관이 사업과정에서 정직하고 윤리적이면 신뢰를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적 활동을 수행하는 유인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정도와 그 방향은 경영자의 판단력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Matten & Moon, 2008). 따라서 이 전략적 의사결정은 기업에 강력한 의사 결정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CSR을 결정하는 주체인 자본가를 중심으로 상인계급이 형성된 전(前)자본주의 시기부터 초기 자본주의,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보고, 그에 따라 CSR 정신과 윤리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CSR 개념이 서구에서 주어진(given) 것이 아니라, 동양사회에서도 CSR 정신과 윤리가 기원했음을 밝힘과 동시에 한국과 일본의 CSR 특성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함이다.
3. 한국의 CSR 정신과 윤리
1) 전(前) 자본주의: 고려 ~ 조선시대
한국에서 상인(商人)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사유재산 제도와 시장이 형성된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상인의 형태로는 시장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행상(行商)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조병찬, 1992). 이후 점차 상업의 규모가 커지고, 체계화된 삼국시대의 신라시대 490년(소지왕 12)에 경주에서 최초로 열린 시전(市廛)은 전(前)자본주의 시기의 자본주의로 발전된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 시대의 상인들은 중국과 일본과의 대외무역으로 성행하였으며, 그들은 왕에게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상인정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시기의 상인정신에 대한 연구는 극히 부족한데, 이는 관련 자료의 부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분석의 출발점을 고려시대부터 시작하고자 한다(이상민, 2016).
고려시대는 물가 조절과 상품의 종류를 통제하며 관청에 허가된 상품 이외에 자유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장’(場)이 마련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중엽(919년)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불교가 융성해지면서 사원경제가 발달한 이 시기로서, 관설시전(官設市廛)이 개성에 설치되었다. 또 시장 경제를 보호·감독하는 기관인 경시서가 마련되었다. 당시 관설시전은 경시서에서 가격에 대한 평가를 받고, 세인(稅印)을 찍은 다음에야 상품을 판매하는 등 경제 제도가 마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고려의 시전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송도(松都), 즉 개성에는 광화문에서 부민관에 이르는 거리에는 공랑(公廊)형식의 행랑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때 고려의 개성상인들은 행랑의 각 문에 현액(상호)을 걸었다(홍하상, 2004).
이 현액에는 <표 1>에서 정리했듯이,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遜) 유교적인 문구를 써 붙였다. 이는 당시 간판으로서의 역할과 상인정신이 깃든 8대 덕목을 나타낸 것이다(정승모, 2006). 특히 개성상인의 8가지의 덕목 가운데, 흥선(興善)과 존신(存信)의 경우,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업(가)에게 요구되는 신뢰(trust)나 자선(philanthropy)과 일맥상통한다.
고려시대의 개성상인들은 훗날 왕조가 ‘조선’으로 바뀐 뒤에도 경제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상인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뒤 고려의 일부 관료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좌절되자, 상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창의적인 경영방식으로서 송도사개부치법(松都四介簿治法) 등 혁신적이며 창의적인 기업가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해방이후 개성 출신의 기업가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로서 성장하면서 개성상인의 상인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가로 태평양화학 ‘서성환’ 회장, 에이스 침대 ‘안유수’ 회장, 삼립식품 ‘허창성’ 회장, 삼정펄프 ‘전재준’ 회장, 한국후지쓰 ‘윤재절’ 사장, 한국 야쿠르트 ‘이은선’ 사장, 영풍그룹 ‘장철진’ 사장, 한국화장품 ‘임광정’ 회장 등이 있다(홍하상, 2004).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개성상인들의 정신은 한국의 CSR 정신과 윤리의 기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고려시대의 개성상인들의 CSR 정신과 윤리는 전자본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자본주의의 기업가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유교에 기반한 개성상인의 8대 정신은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CSR이 이미 전통사회 안에서 일상적인 행동(Routine)양식으로 체질화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CSR이 서구로부터 수입(import)되어진 개념이라는 전제하에 배타적인 사고를 지닌 경제학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시전 상인들은 중앙정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특권 상인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일정한 시역(市役)을 부담하고 그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허가받았는데, 이들을 공인(貢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농촌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으로 농업사회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파생된 국가재정의 악화는 단기간에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한백겸(호조참의) 이외 관료들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며,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실행하였다. 이후 이 법은 1623년 인조에서 효종 그리고 1747년 숙종(36)에 이르러 ‘대동법’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대동법이 특권상인층인 공인(貢人)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들은 정부가 전결을 기준으로 징수한 쌀이나 포목, 화폐를 지급받아 관부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 조달하는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678년 상평통화와 같은 화폐가 전면적으로 유통됨에 따라 자본의 축적이 가속화하며,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한국 최초의 산업 자본가로서 성장하며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개성상인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조선시대의 공인들과 경쟁하며, 조선 경제의 또 다른 주류 상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타적인 신념을 가지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하는 것을 죄악시하며, 남다른 사회적 책임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 조선시대의 개성상인들의 CSR 정신과 윤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교로부터 기인한 근면과 검약, 공경, 용서 등과 관례와 혼례, 상례, 제례를 철저히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개성상인들은 조선시대의 타지방(경강상인)의 상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황선민, 1994). 그리고 그들은 직접투자로 이윤획득과 함께 생산과정을 장악하며 보다 안정적인 산업자본의 축적을 도모하는 수준에 이르렀다(양상현, 2002). 그렇게 성장한 개성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보부상단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이들의 단결력이 커짐에 따라 조선은 비상시의 통신과 물자운반 등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며, 보부상단 또한 정경 유착하여 상거래의 안정과 이윤획득을 보장받으려고 하였다(고승희, 2005).
2) 초기 자본주의: 일제 강점기
한국의 초기 자본주의는 조선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다수 자본들이 국내로 유입되면서,1) 시작된 자본주의는 일본에 의해 조선민사령제정 및 토지 조사 사업완료 등에 따라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이 명확해졌다. 또 자본동원 또한 용이해지면서 식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기업설립이 활발히 이루어졌다(1896년 6월 25일 설립된 조선은행을 비롯하여,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마차회사, 대조선저마제사회사 등 주요 주식회사가 설립된다).
특히 이 식민 자본가들은 지방의 지주들로서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 이후 토지를 임대차하거나 매매 또는 일본으로 쌀을 수출해 축적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농업 및 상업 자본가들은 지방 세력을 모아 식민지 지배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최초로 대규모적 형태의 현대기업을 발전시켰다(Woo, 1991).2) 이들은 식민지에 의해 공업이 재편성되면서, 농업이외의 근대 산업화로 부의 축적의 기회를 제공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산업가로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자본가들은 민규식, 김연수, 박흥식 등을 꼽을 수 있다(Eckert, 1990). 민규식 일가는 한성은행의 박상용, 조선상업은행의 박용철, 호남은행의 현준화와 함께 식민지 시대에 국내 금융 산업을 주도했다. 또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가 1919년에 설립한 경성방직회사(오늘날 ‘경방’)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의 근대기업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939년 삼양사 창업주인 김연수(경성방직 창립자 동생으로 경방 2대 사장)에 의해 설립된 ‘양영회’는 국내 기업 ‘재단법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양영회는 김연수가 경성방직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에 1939년 6월 사재 34만원을 출연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사업에 참여하였다. 이 장학 사업은 6.25 전쟁에 의해 1962년까지 중단되었다가, 그 해 2월부터 다시 재개하여 현재까지 ‘양영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오고 있다(삼양사, 2012). 이 밖에도 ㈜경방은 ‘삼양동제회’(三養同濟會)를 설립한 뒤, 1974년 ‘경방육영회’로 변경하여 장학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경방, 2012).
식민 자본가들의 이러한 행위를 둘러싸고 하버드 석좌교수 카터 헤커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제국의 후예」에서 다음과 같이 경성방직을 설명한다. “물자 부족과 전시 공급자 위주 시장을 기반으로 1933-1945년 사이에 고정자산을 50배 이상 늘린 경방은 품질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평화시대는 오히려 장애물이었고, 식민지가 준 경제적 기회를 이용해 1945년 이전에 최초로 재벌을 형성했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공출과 강제동원으로 고통을 받은 국민들과 달리 군국주의와 손잡은 친일 기업가들에겐 전쟁이 자본 축적의 기회로 작용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헤커트 교수의 식민 자본가에 대한 비(非)윤리적인 경제행위는 현대에 들어 더욱 문제시된다. 2014년 경성의 방적공장은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에 신고 되었다. 당시 방적공장의 피동원자가 258명으로 육박하며, 피해자들은 당시 미성년 노동자들로 12시간씩 2교대 근무를 하는 등 노동착취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2014년 위원회 조사결과에서 신고 된 현존기업은 조선운송(現 CJ대한통운), 경성전기(現 한국전력), 조선중공업(現, 한진중공업)등이 있다(경향신문, 2017.08.13). 하지만 경방을 제외한 나머지 3개社의 경우, 법인격에 연속성이 없다는 점에서 피해자에 대한 배상책임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경방의 경우는 현재가지 김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임의 소지를 분명히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방은 식민지기에 자본 축적과정에서 저지른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한 어떤 반성이나 보상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자본가 외에 ‘민족 자본가’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개항과 함께 일본과 러시아 등 조선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자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사업보국’에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즉, 민족 자본가들은 민족기업 설립과 사회 환원의 목적으로 빈민구제 외에 교육기관 설립 및 운영, 장학사업 전개, 언론 운영을 통한 계몽 운동 등의 이어나갔다. 그 가운데 1906년 윤치호 등이 조직한 대한 자강회는 ‘국권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 근대 산업을 육성하였다. 그들은 애국심에 근거한 신지식 위주의 교육 강화를 가치로 내세웠다. 또한 1907년 남궁억 등이 조직한 대한협회는 산업 개발과 행정 제도개선, 교육 보급 등을 포함하면서 1920년대까지 계속 되었다.
다시 말해서, 민족 자본가들은 초기 한국을 대표하는 자본가 계급이자, 근대 기업가로서 경제적 행위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추구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정신을 반영한다. 하지만 민족계 기업들은 ‘중일 전쟁’(1937-1945)이 발발된 이후로 일본에 의한 경제 통제가 강화되면서 급격히 몰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1940년 초에 등장한 ‘민족계 복합 기업집단’이 등장하는 데, 이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보장받았다. 다시 말해서, 민족 기업 및 기업가들은 사업을 개발하고, 세력을 조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였다(강만길, 1984, pp. 113-127). 그리하여 민족 자본가들은 일본의 자본을 투자받기 위해 서로 겸임중역(interlocking directorates)을 형성하고, 일본 재벌과 이해관계를 형성하고자 시도했다.
그 결과 1930년대 이후 일제 총독부와 일본재벌들과 협력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기업조직, 경영기술, 정부와의 협조 유형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커밍스는 “한국 재벌의 출현과 그 형태에 있어 일본 재벌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Cumings, 1984)라고 지적한다.
3) 현대 자본주의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패전 후, 한국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한국 경제는 극심한 생산 위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식민지 자본가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자본가들 역시 일본의 식민지 자본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에 기인한다. 또 한반도의 해방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이었던 만큼,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 등 승전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의 명분과 이어진 남북전쟁을 통해 ‘38선’의 분할점령에 합의하게 된다.
그 결과 1939년 남한의 9개도의 공업 생산액 5억 2천 7백 93만 5천원에서, 해방 이후 1946년에는 1억 5천 2백 19만 2천원으로 71.2%나 감소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지역별 산업배치가 지리적 이점을 반영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형태였음 알 수 있다. 그리고 1950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1950-1953년)은 남한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47년 1백이던 생산 물가지수가 1950년 6월에 3백 48, 1951년 2천 1백 92, 1952년 4천 7백 50, 1954년 10월에 9천 9백 40로 치솟으며 경제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국내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지자 당시 명망 있는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교육지원, 육영사업 등 장학 사업에 활발히 참여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실제 1957년(現 문교부)에 등록된 단체들은 무려 100여개가 넘었으며, 대표적으로 성재육영회, 가목장학회, 양영회, 남강육영회, 우남장학회 등을 들 수 있다(서재진, 19991). 하지만 지주계급들의 행위의 이면에는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을 피하고자 그들 스스로 재단을 설립하고, 기부를 통해 세금을 면제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이승만 정권의 재선과 정치적 의도 하에 몰락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관련자들에게만 많은 특혜 준 반면, 한민당과 관련이 깊은 지주계급은 제외시켰다(Kim, 1976, p. 154). 이에 자유당 소속의 정치인들은 재빨리 지주들로부터 정부 채권을 사들였고, 자유당 소속의 기업인들도 정부 채권의 사들이면서 전체 38%가 자유당 관련 기업인들에 넘어가면서 그들은 간접적으로 산업 자본가로 전환되었다(최응양, 1958). 이에 대해 사쿠라이는 “당초 지주를 산업 자본가로 전환시킨다던 정부의 공약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지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없지만 토지개혁 후 기업인이 된 지주는 거의 없다”라고 말한다(Sakurai, 1976, p. 135). 이는 전통 지주계급들은 정치적 의도아래, 산업 자본가로서 전환 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의도 하에 몰락한 지주계급의 자리에는 새로운 자본가가 등장한다. 이 신흥 자본가들은 크게 2가지의 경로방식으로 사회에 모습을 나타났다. 첫째, 일본인 기업과 관련이 있던 전(前) 고용인과 주주들이 신흥 자본가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관리자나 기술자, 직원 또는 소액 투자자들이었으나, 해방 이후 일본인 회사를 인수하며 신흥 자본가로 모습을 갖춘다. 대표적으로 김종회(한국화약), 박두병(두산), 이양구(동양방식) 등이 있다. 둘째,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전통 지주계급을 몰아내고, 일본인 회사의 인수와 수입대체 산업화 과정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을 이룬 자본가들이다. 이들은 사업을 팽창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특혜로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초기 자본주의에 등장한 ‘정상’(政商)의 형태와 굉장히 가깝다.
대표적인 기업가로 이병철(삼성), 구인회(LG), 정주영(현대), 조중훈(한진)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은 해방이후 1960~70년대 급격히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 기업(family firm)의 형태를 나타내며 ‘재벌’(chaebol)로 성장한다. 재벌을 둘러싸고 많은 학자들 사이에는 재벌의 등장과 함께 한국 전통사회로부터 발전해온 CSR 정신과 윤리가 단절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에는 자본 축적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불공정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처럼 재벌들과 정부 및 정치 관료가 처음부터 결탁했던 것은 아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 초창기에 경제성장의 기본전략은 ‘농업’ 주도의 산업 전략이었다. 이에 전경련(전국경제인협의회)은 경제성장의 기본 전략은 공업주도여야 한다고 저항하였다(전경련, 1983, p. 172). 결국 ‘자본과 기술부족’이라는 경제위기가 봉착하면서 공업주도 전략에 힘이 실리게 되었고, 전경련이 내세운 선진국의 사양 산업, 즉 ‘노동집약적 산업 유치론’(서재진, 1991; 전경련, 1983)은 실현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산업발전을 위한 총력지원 정책을 채택할 것을 약속하며 그 해를 <수출의 해>로 지정하고(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연구교서), 수출주도의 전략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직접투자보다 외자를 선호하는 등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국내 자본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
한편, 자본가 집단에 의해 제기된 공업주도형 전략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사회적 요구나 감정을 배제한 정책이었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전경련이 주장한 공업화 전략은 국민적 감정과 반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필요로 한 전략으로서, 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재벌이 직접 나섰다.3) 그리고 재벌들은 국민들에게 한일 간의 경제협력의 필요성에 의해 반일 감정을 완화해야 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등 재계관련 산업단체들과 협력하여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를 위한 사회운동으로까지 확산시켰다.
이러한 수출주도 전략은 식민지 시절을 경험한 국민들의 정서와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당시 공업을 중심의 한국 경제는 GNP의 성장률이 평균 10%가 넘으며 괄목한 경제성장을 가져오자, 재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64년 1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일명 ‘삼분폭리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일반 대중의 실생활과 밀접한 주요 생활필수품(ex. 설탕, 밀가루, 시멘트)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밀수와 가격조작, 그리고 세금 포털 등으로 폭리를 취하며 국민의 공분을 산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의 중심에 ‘제일제당’이 거론되면서 재벌의 사회문제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비난이 거세지자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반성의 차원에서 자신의 재산 10억원을 출연하여 ‘삼성문화재단’(사회공헌)을 설립하였다. 당시 10억원이라는 액수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액수였다는 점(이상민, 2016)과, 군사 정권의 사회장악은 사회의 재벌에 대한 비난 여론을 가라앉히는 데 충분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벌들은 더 견고히 정부와 결착하였는데, 심지어 경제행위로 일어난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줄 것을 종용하였다. 이를 테면 1960년 후반 재벌들은 외자뿐만 아니라, 사채시장으로부터 자금을 활용한 탓에 자금압박으로 부도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김용완 전경련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기업들이 겪고 있는 에로사항을 전달하고 사채를 은행에서 맡아주고 세금을 감면해주며 동시에 금리를 인하해달라고 건의를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거부하자, 전경련은 정치적 집단행위로 ‘정부 예산 반감론’의 폭탄선언을 감행하였다. 이에 정부는 재빨리 ‘8.3 사채동결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로서 기업들은 막대한 경제적 특혜를 받게 되었다(임묘민, 1983).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자본과 정부와의 관계변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사업(새마을 운동)에 재벌들을 참여(사채 해결에 대한 보은(報恩)차원의 기금수집)시키기 위한 유도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재벌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한계(사회적 명분 및 합의 부족)를 이용하여 경제적 혜택을 제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이 정치적 명분을 쌓기 위해 과거 정권의 ‘성장주의’에 대한 反정립으로 대규모의 <사회정화>에 착수하면서 대전환이 예고되었다. 이는 우리 정치사회에도 자본가 집단의 ‘책임성’ 제고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정의사회, 복지사회, 민주사회”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기업윤리와 공공이익을 침해한 기업인들을 엄중히 문책할 것이라 공표하였다. 이에 다국적 기업들은 투자 철수를 고려했고, 국내 기업도 충격을 받았다.
결국 전두환은 경제를 위태롭게 하지 않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업인과 정부 관료의 부정한 관계가 발견되더라도 처벌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다. 이 조치로 재벌들은 1987년 전경련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전두환의 ‘호언조지’를 지지하며, 국가주의적 성격을 옹호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서재진, 1999). 재벌들의 반민주적인 모습에 대해 커밍스는 ‘한국의 정치민주화에 자본가 계급은 국가, 군부와 함께 한 반면, 나머지는 민중과 야당으로 나뉘는 자세가 취해졌다’고 설명한다(Cumings, 1998). 실제 정치민주화 과정은 학생과 진보적 민중운동, 그리고 야당으로부터 촉발되어졌다.
그러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분위기가 급변하자, 6월 민주화 운동 당시만 해도 침묵 또는 정부 편에 섰던, 재벌들은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8년 구자경 전경련 회장은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지 않는 국회의원이 12명이나 있는 정당에는 정치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또 재벌들은 기업인 윤리강령 선언 등의 표면적인 변화를 시도하며, 그동안 지나친 기업집중, 불공정 거래 등 경제 질서를 교란하고 사회적 낭비에 대해 반성하고 앞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정의사회구현에 매진할 것을 밝혔다(이상민, 2016). 실제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각각 기업의 목표를 개인의 이윤확대에서 나아가 국민의 기업으로서 인류의 복지와 문화향상의 근원지로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재단 설립과 함께 사회공헌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자본가 집단 차원에서 사회적 대응을 하지 않는 대신, 개별 기업차원에서 CSR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재벌들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민주 자본주의 자본 정신과 노동 사이의 타협을 기반을 한 것이라고 보기보다, 정치 민주화라는 변화의 시대에 맞춰 양자(기업과 사회)의 이익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절된다고 주장한 애덤 쉐보르스키의 설명에 더 가깝다(Prezeworski, 1985).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자본가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1987년 낮은 지지율(36%)로 당선된 노태우 정부는 시민사회의 목소리와 야당의 사회적 요구에 경제안정과 토지세제 개혁, 금융실명제 등 경제정의를 위한 진보적 개혁을 지지했다.
하지만 사회 민주화로 계속되는 학생과 노동자의 대규모 시위와 파업으로 경제성장은 1989년 6.5%로 저하되었고, 수출은 원화의 강세로 약화되었다. 또 부동산 가격은 연평균 30%이상 폭등하면서, 정치적·경제적 난국이 발생했다. 이에 1990년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공권력을 투입 하는 등 노동운동을 통제하고자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리고 친재벌적 성향과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을 표방하는 ‘이승윤’ 민정당 정책위 의장을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경제개혁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의해 한국의 CSR은 실행의 주체인 ‘자본가 또는 기업가’ 가 아닌, 정부 개입으로 CSR의 제도적 변화가 감지되었다. 1990년 5월 노태우 정부는 ‘토지공개념법’을 도입하며, 재벌들의 부동산을 매각하도록 하는 ‘5.8 부동산 투기’에 관한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또 산업정책에 개입해 재벌의 과잉투자를 우려, 현대그룹의 화학부문에 대한 투자와 삼성그룹의 자동차에 대한 신규 투자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 경제조치로 인해 노태우 정부와 재벌 사이의 균열이 발생했으며 갈등은 증폭되었다(서재진, 1991). 경제정책의 분쟁은 심각한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하였고, 5.8 부동산 투기로 내몰렸던 롯데와 현대는 부동산의 투기 목적이 아닌 업무용이었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소송에서 승소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재벌의 저항에 대한 보복적 차원에서 현대의 법률적 신용을 제한하였으며, 국세청은 현대의 불법 주식거래에 대해 1,361억 원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이 같은 사례가 난무하자, 재벌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 때리기’를 자행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토로했다. 급기야 재벌 스스로 정치적 힘을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992년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현대 정주영 회장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3월 총선에서 31석을 차지하였으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하지만 도전은 실패로 귀결되면서 재벌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한국 자본가 최초로 시장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 엘리트를 대체하려는 정치적 도전으로 작게나마 정치적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96년 8월 한국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정부 강요에 의해 조장되었던 기부 및 CSR 이행에 대해 “기업에 사회공헌을 강요하는 것은 준조세와 같다”라는 취지로 CSR이행에 대한 반대의견을 내세웠다.4) 하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일부 기업에서는 소유주까지 바뀌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위기의 원인이 재벌의 방만한 경영이 지적되면서, 사회 전반에는 재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사회 안팎으로 위기에 놓인 재벌들은 다시 정부 아래 종속되었다. 재벌의 경제 위기는 정부의 금리 특혜와 정책을 통해 재벌의 피해를 최소하려고 했으며,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 표면적으로 삼성, LG, SK 등 4대 재벌 총수일가의 지분은 줄어들었지만, 이후 총수의 기업지배권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즉, ‘총수 1인’이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이용하여 과다한 계열사 지배력을 행사하는 왜곡된 소유구조가 이루어진 것이다(공정거래위원회, 2001.07.26). 이는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재벌개혁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벌이 과거 군사정권에 의해 학습했던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답습하면서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시장의 감시자를 자처했던 정부의 무능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의 위기가 곧 재벌의 위기로 표출될 수 것이라고 인식한 기업들은 사회적 분노를 해소하기 위하여 CSR을 활용하여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재벌들은 위법이나 부정적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CSR을 기업 내에 내재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사업보국과 같은 관념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CSV’(공유가치창출)를 통한 가치증대와 같이 실질적인 이윤추구를 궁극적으로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인다(이상민, 2016).
한편, 이 같은 변화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내부 압력에 의해 변화하였으나, 이보다 국제사회의 CSR 국제표준화 추세와 세계화에 따른 경제개방으로 CSR이 기업 활동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필수적인 요인이라는 점에서 크게 작용하였다. 간단히 살펴보면, 외국인 직접투자액의 증가와 국내 재벌기업들의 해외진출이 가속화 되는 등 다양한 외부적인 요인들이 재벌들을 압박하였다. 이로서 재벌들은 미국식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도입하였고, 기업 내부에는 윤리경영 헌장을 만들었으며, 사회공헌 위원회와 윤리경영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제도적 마련에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슈화 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사례를 보여주었으며, 재벌 총수 및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과 공익재단을 활용한 ‘경영권 승계’는 재벌의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국내 자본가 사이에서는 여전히 낡은 관념과 관행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4. 일본의 CSR 정신과 윤리
1) 전(前) 자본주의: 막부 ~ 에도시대
일본의 상인의 등장은 12세기경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이보다 훨씬 앞선 5~7세기에 이미 많은 상인들이 외국과의 무역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상거래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장’(場)의 제도적인 기원에 있다. 따라서 12세기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시대에 들어와 일본 시장에는 상설좌상이 모여 상점가를 이루기 시작하였고, 이에 13세기까지 일본의 상인들은 무사 등 권력층에 대한 봉사자로서 신분을 유지했다. 하지만 16세기 전국시대 무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모든 상거래를 완전 자유화로 좌상제도가 붕괴되었고, 일본의 상인들은 해외무역으로 상업 활동의 범위를 넓히며 자연스럽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서양문물이 유입되며, 생활양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17세기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들어서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된 신분제도로 인해 상인들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특히 17세기 후반 일본의 쇄국정치로 인한 해외무역 축소와 유통발전에 의해 상인의 비즈니스 기회 감소는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최하위 수준으로 하락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사상가 이시다바이간(石田梅岩 1685-1744)은 무사의 사회지배 기본지침 ‘무사도’(武士道)에 대응하기 위해 ‘상인도’(商人道)를 제시하였다. 이 상인도는 상인이 천시되는 사회통념에 대해 상(商)행위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동시에, 교환의 경제적, 사회적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즉, 이 사상은 시장의 규율을 준수함과 동시에 정직하고 효율적인 생산 및 상업 활동은 이 세상에 크게 공헌하는 길로 이어진다는 윤리 사상이다(Aoki, 2006).
또한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일본의 3대 상인(오사카(大阪)상인, 이세(伊勢)상인, 오우미(近江) 상인) 가운데 오우미 상인의 경영이념(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05)은 각 상가(商家)별로 그들의 원칙을 계승하며 상인도와 함께 윤리로 자리를 잡았다. 오우미 상인의 경영원칙들을 살펴보면 첫째, 삼포요시(三方よし)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사람)에게도 좋은 장사를 하라’는 뜻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과 그 지역사람들의 신용을 얻을 수 있는 경제활동을 중시했다. 둘째, 리신오킨은 ‘이윤(利)은 열심히 일을 한(勤) 결과로써(於) 진정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勤’이란 투기나 부당경쟁, 매점매석 등에 의한 무분별한 상행위나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지 않고, 상거래의 본래 목적에만 충실하라 뜻을 가리킨다. 셋째, 시마츠시테키바루란 ‘절약하면서(始末して) 열심히 일을 하라(気張る)’는 뜻으로 낭비를 줄이고 세상을 위해 타인을 위해 살아있는 돈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넷째, 샤샤히츠후쿠는 ‘사치스러운 자(奢者)는 반드시(必) 오래가지 못한다(不久)’는 뜻으로 생활의 검소을 주장했으며, 다섯째, 코우후시키토쿠란 ‘부(富)를 좋게 하되(好) 그 덕(其德)을 베풀어라(施)’는 의미로 사업이 번성하여 부를 얻었으면, 그 재산에 어울리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으로, 사회공헌의 중요성을 주장한다(임외석, 2014).
이렇게 일본의 전자본주의 사회의 상인계급들은 가업(家業)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에서 공유되는 상인정신을 가훈(家訓)으로 삼았다. 즉, 상인도 사상에 기원한 CSR 정신과 윤리는 공동체주의를 기반으로 상도덕을 지키고,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될 수 있도록 하였다.
2) 초기 자본주의
본격적인 개항(1853년)이후, 정부는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세웠는데, 당시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국가 목표로 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식산흥업정책’ 펼쳤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봉건적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 가운데, 상업은 신분상 낮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각 상가를 중심으로 근대산업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이에 정부는 관료 출신의 기업가를 다수 탄생시키며 ‘실업가’(實業家)라는 용어와 ‘실업보국’(實業報國)5)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산업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사명감을 불어넣고자 했다.
이 사상은 만든 시부자와는 앞서 언급한 ‘상인도’와 달리, 실업활동의 윤리적 근거를 유교 『논어(論語)』에서 찾아 ‘부귀와 도의와의 관계에 관한 교의’에 주목하였다. 그는 도의로써 기업 활동을 수행하여 부가 축적되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실업가는 도의에 합치되는 사리 추구를 통해, 공익에 봉사함으로써 사회 공헌을 하는 관료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하였다(김필동, 1999). 이에 메이지유신 경제체제 는 경제주체를 국내 생산주체에 한정하는 등 일본 사회 내 민간 자본 육성을 도모한 결과, ‘정상’(政商)을 탄생시켰다.
정상들은 러일전쟁 및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어난 경제적 붐에 힘입어, 근대 산업 기업(modern industrial enterprise)의 특징을 갖는 현대 기업이 다수 출현하였다. 이 기업들은 일본의 재벌(財閥)이라고 불리는 ‘자이바츠’(zaibatsu)로 성장하였다.6) 이 체제는 폐쇄적인 소유구조와 독점의 형태인 ‘콘체른 화’를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자이바츠로는 ‘미츠이’(三井), ‘스미토모’(住友), ‘미쓰비시’(三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개항 이전 전통사회 안에서 상인 계급으로 가업(家業)을 이어온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개항 후,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자원이나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받은 후에 근대 산업자본가 계급으로서 통해 현대기업을 설립하고, 자이바츠로 성장시켰다. 따라서 이 정상들은 ‘국가주의’(nationalism)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가족중심의 CSR 정신과 윤리가 내재화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 자이바츠들은 ‘이에’(家)제도아래 기업을 경영을 하였는데, 이는 통상적인 가족문화의 개념과 상이하다. 이에(家)제도는 가족 승계를 기반으로 운영되지만, 장남만이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차남 이하 아들들도 가장으로서 계승이 가능하며 사위도 ‘서양자’로 가업을 계승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자이바츠 체제를 구축한 미츠이(三井)를 통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미츠이 가문은 1700년경부터 사업의 출자에 대해 미츠이 가문의 일족에 한정하였고 1722년에는 가헌인 ‘소우치쿠유서’(이후, 1900년 미츠이家)를 정하여 가족 구성원들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원칙으로서 계승시켰다.
이 원칙은 가헌(家憲)으로서 확인되며, 가헌의 합계는 13가지의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동족친밀, ② 동족제한, ③ 근검절약, ④ 동족협찬, ⑤ 적금분배, ⑥ 은퇴규정, ⑦ 회계통일, ⑧ 인재등용, ⑨ 전려가업, ⑩ 업무습득, ⑪ 과단감행, ⑫동족상계, ⑬ 의용봉공. 이 13가지의 가훈들은 성공적인 가족기업의 승계계획을 위한 준비사항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자이바츠는 가족들의 지분을 각각 정하고 재산은 각기 분할 청구할 수 없는 ‘총유(’總有)제로 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가업의 총괄 기관인 ‘가족회의체’(오 모코가타, 大元方)를 설치하여 그 수익을 지분비율에 따라 분배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빗대어 보면 자이바츠들은 가업과 국가주의(nationalism)를 기반(임외석, 2015)으로 CSR 정신과 윤리를 규범화하였다.
한편,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승승장구하던 일본 경제는 1920년에 들어오면서 반사 이익에 따른 호황의 불씨가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반동공황’(反動恐慌)이 일어나면서, 경제는 급격히 침체되었다. 이에 일본의 정치권에서는 ‘재난 극복용 특별어음’을 국채로 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합의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건의 발단은 대만은행을 통해 지원한 대규모 자금이 지진 피해의 기업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당과 긴밀한 독과점 대기업 ‘스즈키 상회’에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지자, 야당의 반발이 거세진 것이다.
여·야의 거친 대립 속에서 예금 인출의 조짐이 보이자 일부 대형은행들은 ‘자금부족으로 어음 결제가 지체돼 휴업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알려오자, 이를 이용하여 야당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당시 대장성 가타오카 나오하루(片岡 直温)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쿄와다나베은행(東京渡邊銀行)이 지금 어음결제 불능 상태”라고 중의원들에게 밝혔다. 하지만 이 거짓보고는 오히려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며, 대규모 예금인출을 일으켰고, 급기야 1927년에 쇼와(昭和) 금융공황으로 발생하였다. 이에 당시 전체 시중은행 중 10%가 문을 닫았으며, 국회 난투극 사태을 제공한 ‘스즈키 상회’ 마져 파산하는 등 많은 기업들이 피해를 보았다.
반면 재벌 산하의 대형 은행들은 관료의 지위를 받는 일본 특유의 선단식 경영(船團式經營)으로 피해가 미비했다. 더불어 3대 재벌의 최대의 위협의 상대였던 ‘스즈끼 상회’ 가 대만 은행이 파산으로 도산되자, 자금 조달을 위해서 투매하던 기업들의 일탈행동은 감소하게 되었다. 그 결과 카르텔에 따른 산업별 조직이 안정되면서 재벌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다. 이는 카르텔을 통한 자기자본 금융력을 가진 재벌과 차입의존형의 재벌과의 격차를 벌어지게 함으로써 재벌 패권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정치권에서 ‘금본위제’의 탈퇴와 번복이 반복되는 가운데, ‘금수출재금지’ 직전에 미츠이 은행을 주도로 ‘달러 매입’ 사건이 대두되면서 일본의 재벌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금융위기와 함께 찾아온 세계대공황으로 일본 경제가 매우 불안정한 가운데, 재벌기업과 비(非)재벌기업에 대한 경제 형평성에 대한 의심이 커진 것이다. 기존 정부들이 추구해온 근대화 정책은 경제적으로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공업 그리고 농업 사이에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켰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군부를 포함한 우익 일각에서는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대한 불만이 거세졌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자이바츠와 정부의 유착관계에 대한 비판도 커져갔다. 그 결과, 혈맹단(血盟團)에 의해 미츠이 사장 단 다쿠마의 암살 등은 쇼와공황기에 고조된 재벌비판에 자이바츠들은 이미지 쇄신을 감행하고자 CSR을 활용하였다. 1934년 4월 미츠이 ‘보은회’(報恩會)를 결성하였다. 이 재단은 미츠이 본사가 가지고 있던 은행예금과 미츠이 은행과 미츠이 신탁 주식을 현물 출자하여 기금을 형성한 것으로 설립한 것으로 일본 최초의 재단법인으로서 사회사업의 기부행위를 목적으로 설립되어졌다. 실제 경기 불황으로 야기된 ‘실업대책 사업’에 기부하는 등 사회적인 기부를 시작으로 재산의 과실로 기부사업을 계속하였으며, 이익은 다시 사회에 환원한다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사회공헌의 형태로 볼 수 있다(김영래, 2000). 또 5월 5일 파나소닉社의 창립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수도철학(水道哲學)’을 발표, 모든 제품을 수돗물처럼 싼 값에 풍족하게 공급하는 것이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임을 명시하였다(Panasonic, 2014). CSR 이외에 미츠이는 1932년 말부터 34년에 걸쳐 각종 조직개혁과 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1934년 2월 미츠이 동족이 취임하던, 미츠이 은행, 물산, 광산 등 사장으로부터 일제히 퇴임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재벌기업들의 주식을 공개로 전환하면서 재벌이 갖는 봉쇄적인 소유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자이바츠는 전문경영자 체제의 확립과 경영 합리주의 성취라는 제도적 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경유착과 봉건적 관행 및 관념 활용으로 2차 세계대전을 대비하면서 ‘군국주의’로 변환되면서 국가주의의 과잉이라는 근본적인 특징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김필동, 1999). 이는 전시체제로 자본가사이에 CSR 정신이나 윤리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3) 현대 자본주의: 1945년 이후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재벌 기업들은 미군정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되면서, 재벌해체가 단행되었다. 1945년 말 4대 재벌(미츠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해체가 결정되었고, 이후 1947년 9월에 83개社에 이르는 기업이 해체대상이 되었다. 재벌해체로 각 재벌들의 가족들은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전문 경영인은 기업경영에 실질적 책임을 지었다. 하지만 재벌의 경제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금융 산업’은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과거 동일 재벌집단의 소속 계열사들은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재 결집현상이 일어난다. 이들은 각 계열사의 사장단을 중심으로 사장회(社長會)를 발족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기업 산하에 은행을 갖고 있던 자이바츠를 중심으로 게이레츠(keiretsu)가 형성되었다.
게이레츠는 계열사 간 ‘상호주식소유’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주주 안정화를 꾀하였다. 이는 기존 융자방식을 탈피하여 메인뱅크(main bank) 중심으로 계열융자방식을 취하며 ‘원 셋트 시스템’(one set system)으로 확대 재편성하였다. 다시 말해, 메인뱅크라는 자본 기관을 통해 기업 흡수 및 새로운 분야의 진출 등 대주주로서 경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매일경제, 1990.05.08). 이 메인뱅크는 재벌 해체이후 장기적인 거래관계를 유지해 온 기업과의 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의 관계에 기인하며,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르게 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게이레츠는 1960년 이후 급속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며, 세계 경제 2위라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기업의 경제성장 이면에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기업집단은 오로지 경제적 이익 추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환경오염을 유발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1956년 공장 폐수에 포함된 수은 중독으로 나타난 미나마타병 발병 이후 일본 사회는 항의 시위와 공해반대 운동이 일어났다(Kawamura, 2005). 결국 환경 소송이 진행되었고, 기업집단의 잘못으로 판명나자, 일본 기업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전락하게 된다. 위기감을 느낀 기업들은 CSR정책의 일환으로 ‘공해부’를 설치하고 기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단련(일본경제단체연합회)에서도 1974년에 ‘기업의 사회성부회’를 신설하고, 1976년 2월에는 ‘기업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 확립을 위해’라는 종합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지역 사회와의 마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확립이 요구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전경련, 2004; Aoki, 2002; Kawamura, 2005).
이러한 일련의 친사회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본기업들은 CSR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대부분의 기업과 국민들은 기업의 실적이 좋다면 공식적인 책임을 다한 것으로 간주하였다(이상민, 2017). 특히 메인뱅크는 1990년대 중반까지 다음 세 가지 기능을 토대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① 대리인 비용(agency cost) 절감, ② 위험분담(risk sharing), ③ 모니터링(monitoring) 기능들은 다수의 선행연구에서 증명되었다. 먼저 자금조달과정에 발생하는 대리인 비용에 메인뱅크는 기업집단의 부채에 대한 비용을 낮춰주는 존재로서, 일본의 자본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강철구, 2010a). 또 나카타니(中谷)는 기업계열에 속해 있는 기업과 독립계 기업의 업적을 비교한 결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기업의 업적을 안정화시켰다는 점에서, 메인뱅크의 위험 분담 기능을 강조한다. 또 셰어드(Sheard)는 일본에서의 경영권 취득이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메인뱅크가 정보생산자로서 경영권 취득 시장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메인뱅크가 ‘정보생산자’로서 경영이 비효율적이라면 경영자를 교체하거나, 기업을 재편성하는 등 경영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강철구, 2010b).
뿐만 아니라 메인뱅크는 기업 도산위기 시, 중역의 임원을 파견하거나 긴급융자 등을 통해 재건계획을 입안하는 등 ‘주주’로서 경영에 적극적인 역할을 행사하였다(강철구, 2010a). 이는 메인뱅크가 기업도산에 의한 손실의 대부분을 위험분담하며 투자자나 자금의 공급자들에게 신뢰성을 높였다. 나아가 일본 기업에서 회사가 주주의 소유라는 ‘주주 중심주의’ 인식 하에 사외감사를 위촉하거나 일반적으로 감사 법인에 의한 결산서에 대한 제3자 감사를 의무적으로 수행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메인뱅크를 중심으로 결집된 기업들은 개인주주의 비율이 매우 낮은 대신, 법인 주주에 의한 상호주식보유가 일반적이다 보니, 상호출자 법인은 서로 기업경영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이에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도 메인뱅크가 담당하였다.
메인뱅크의 이러한 기능들은 기업의 CSR을 이행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들로서 이상적인 자본가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에 아오키는 당시 일본 경제가 본격적으로 개방되지 않은 가운데, 기업의 정보를 보다 빨리 수집할 수 있는 메인뱅크가 경영을 유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체라고 설명한다(Aoki, 1990). 이처럼 메인뱅크의 효과로 1980년대 일본은 호황을 맞이하며 일본의 기업들은 ‘과시적 소비’의 CSR 형태가 전개되었다. 당시 게이레츠들은 CSR 예산규모는 ‘5조2천5백만 엔’에 달했고, 클래식 콘서트나 미술 전시회 등 문화산업을 후원하는 ‘메세나 프로그램’ 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거액의 기부가 이어졌다(Murakami, 2009). 이는 게이레츠 사이에서 CSR이란 경쟁 기업집단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구별지어주는 증거물로 인식된 것이다. 이러한 CSR의 과시적 모습은 1980년대 말 부동산 가격이 일본 사상 최고로 급등할 때에 최고조에 이르렀다(이상민, 2017).
그러다 1980년대 후반, 금융자유화의 진전으로 일본경제의 거품은 붕괴되었다. 금융자유화에 따른 제도 변경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버블의 발생은 수많은 일본기업들의 도산을 불러 일으켰으며, 불황의 장기화가 이어졌다. 특히 이 과정에서 메인뱅크들은 게이레츠의 부실채권을 떠맡게 되면서 은행자체의 경영위기에 직면하였다. 또 건설업계의 담합 사건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메인뱅크에 의한 기업의 모니터링 기능이 크게 후퇴하였다는 지적이 나타났다. 이에 호리우치(堀內)외 학자들은 개별기업의 영업수익의 증가와 감소 사이에 메인뱅크로부터 차입의 증가나 감소를 초래했는지 살펴본 결과, 메인뱅크가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분담하거나 안정적인 자금을 공급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강철구, 2010b). 또 하야시와 깁슨 등은 메인뱅크가 대리인 비용을 축소 혹은 감소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Hayashi, 2000; Gibson, 1997).
버블 경제붕괴로 기업불신이 팽배해진 가운데, 게이레츠들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91년 경단련은 ‘CSR의 원형’이라고 보는 기업행동헌장을 발표했으나, 이는 선언에 불과하였다(Kawamura, 2005). 2000년대에 들어와 일본기업들은 유키지루시 식품과 니혼햄의 미국산 소고기 위장 판매, 동경전력의 원자력 발전소 문제 은폐, 미쓰이 물산의 DPF 데이터 날조, 그리고 최근에도 도시바의 1조 5,0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 등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일본기업 대부분이 경영이 안정되어 있는 게이레츠라는 점에서 그들의 경제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특히 기업계열사 간의 상호출자방식의 지배구조로 인해 내부감사는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감시 기능으로의 메인뱅크의 역할에 대해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메인뱅크를 둘러싼 게이레츠의 신뢰가 흔들리자 일본 기업들은 법령 준수(compliance) 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미쓰비시 상사와 미츠이 물산은 내부감사 강화를 위해 감사인력을 확충하였다. 또한 많은 기업들은 보유주식을 매각할 필요성과 은행의 부실채권을 처리하기 위해 보유주식을 매각하기에 이른다. 이는 금융 자유화와 시가회계의 도입(2002년 3월부터 상호주식의 시가평가)으로 일본의 기업지배 기능에서 메인뱅크 시스템에 대한 재정립에 필요한 제도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2000년대 들어와 일본은 미국식 CSR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과 동일하게 세계화의 압력에 기인한 것으로 세계시장을 상대로 활동하는 다국적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양국의 CSR은 국제적 표준에 부응하였다. 일본은 경제단체, 금융기관, 기관투자가, 시민단체 등 주주이외의 이해관계자들과의 관계를 개선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2003년 리코(Rico)를 시작으로 미국식 CSR 경영이 나타났으며, 정부 기관을 포함한 평가기관들은 사회책임투자와 스튜어드쉽 코드, 기업지배구조 코드를 도입해 주주보호를 강화하는 등 미국식 CSR 논의가 봇물을 이루게 된다.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본 한국과 일본의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는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에 들어와 한국과 일본의 자본가 집단 내에 세계화의 진전으로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미국식 CSR 논의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표 2>에서 정리했듯이, 한국과 일본은 각각 경험한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자본가 집단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여러 가지 내부적 요인들에 의해 다른 형태의 CSR 정신과 윤리로 진화되어 왔다.
정리해보면,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전통적인 사회 안에 상인계급으로부터 CSR 정신과 윤리가 배태되어져 있었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 개성상인 정신에서 대두된 흥선(興善)과 존신(存信)은 현대 CSR에서 요구되는 신뢰(trust)와 자선(philanthropy)처럼 규범화했다. 일본의 경우, 상인도(商人道) 윤리 사상과 상가 및 오우미 상인의 경영이념은 상인계급들의 가훈(家訓)에 내재화되어 있었다. 이는 상행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장질서와 윤리가 내포된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CSR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자본주의시기에 한국은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맞이하면서, 식민 자본가와 민족 자본가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민족 자본가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이나 사업보국이라는 형태로 CSR 정신과 윤리가 인식되었으나, 민족 자본가들조차 식민지라는 시대적 배경아래 자본의 생존과 존립이 우선시 되었다는 점에서 CSR 정신이나 윤리는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이후 해방과 함께 맞이한 현대 자본주의시기에는 전통 지주계급들에 의해 육영 및 장학사업과 기부활동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사회공헌활동은 정부로부터 세금혜택과 토지개혁에 따른 유리한 조건을 제공받고자 이행했다는 점에 순수성이 의심된다. 그리고 전통 지주계급의 이중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정치와 관료들과 결탁한 재벌이 육성되었다. 이들은 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진 국가를 정상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많은 자본과 물자를 불하받으며, 재벌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재벌들은 ‘진충보국’이라는 사명아래 CSR정신과 윤리는 경제적 책임만이 강조되었다. 이 경제논리에 빠진 재벌들은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시민사회와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재벌들은 사재 출연하여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사회사업과 기부를 하였다. 한편, 한국 CSR은 정부에 의해 기업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세계화를 맞이하면서 한국 재벌기업도 CSR을 글로벌 기준에 맞는 규범을 제도화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경영활동을 하며 생긴 사고들에 대한 면죄부를 얻기 위한 정치적 교환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과 함께 정부 주도하에 근대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이때 정치권과 밀접한 연관되어 있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비즈니스 기회가 제공되었는데, 이들은 ‘정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관변기업이나 정부 자원을 불하받는 등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으며 자이바츠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자이바츠는 사업보국의 정신과 함께 이에(家)제도 하에 가족중심의 CSR 정신과 윤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경제성장과정에서 발생한 경제 위기와 이로 인해 대두된 경제의 불공정성은 반(反)재벌 정서로서 나타났다. 특히 달러매입 사건으로 표적이 된 미츠이 재벌은 ‘보은회’라는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거액 기부를 하며 사회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금본위제의 탈퇴와 재가입 번복에 따른 정당정치에 대해 회의를 느낀 군인들에 의해 재벌 테러와 군사정권의 귀환이 이어지면서, 재벌은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아래 기업경영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는 2차 세계대전에 필요한 군수물자 생산 및 투자만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CSR 정신이나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일본의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미군정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된 일본재벌들은 해체가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족중심의 폐쇄적인 소유와 경영분리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주주중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메인뱅크를 중심으로 상호출자소유 방식으로 재결집한 게이레츠들은 전후 경제체제를 복원하기 위해 몰두한 결과, 세계경제 2위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경제성장논리에 치우친 게이레츠들은 일본 사회의 환경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기업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자, 게이레츠들은 CSR을 활용하여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불미스러운 사고들은 금융자유화와 세계화로 메인뱅크의 기능마저 의심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 기업집단들은 세계화에 발맞춰 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CSR 형식적인 체제와 제도 구축에 머물 뿐 실질적으로 부정과 비리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삼성경제연구소, 2002). 이에 최근 일본 게이레츠들은 CSR을 CSV(공유가치창출)로 전환하며 기업 이윤추구와 동시에 사회적 문제까지 해결하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의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살펴본 결과,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영향으로 동일한 자본가 집단(재벌)이 확인된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재벌에서 나타난 CSR 정신과 윤리는 분명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지역이나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혹은 시대마다 다른 사회경제적 정세에 의해서 자본가 집단에게 요구되는 가치관이나 윤리관이 다르게 인식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 결론 및 시사점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빠르게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며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여주었다. 성장의 중심에 있던 재벌(chaebol)들은 서구 자본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뤄낸 산업화를 단, 50여 년 만에 이루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재벌들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재벌의 방만한 경영과 정경유착, 그리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재벌 총수와 그 총수 일가들이 일으키는 사건사고들은 ‘갑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사회 전반에는 반(反)재벌 및 반(反)기업가적 정서가 팽배해졌고, 그들이 펼치는 사회공헌 활동마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시각의 원인으로는 오늘날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내재적 발현의 부재와 기업가 정신 및 윤리의 결여를 들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우리보다 먼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일본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동아시아의 CSR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더불어 일본을 통해 앞으로 국내 자본가 집단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CSR 정신과 윤리의 기원을 찾기 위해 경영사학적 접근방법과 문헌사적 연구방법을 통해, 전(前)자본주의 시대부터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실재하는 자본가을 구별하고, 자본가 집단에서 인식되어오던 CSR 정신과 윤리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전자본주의의 상인계급으로부터 고유한 CSR 정신과 윤리의 기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CSR 정신과 윤리가 서구사회로부터 전파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안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CSR의 개념이 각 사회마다 제도적 틀 속에서 배태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경우, 상인 계급 가운데, 서구의 압력에 의해 문호가 급속히 개방됨에 따라 자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정부에 밀착한 ‘정상’이라는 형태의 자본가 집단이 나타났다. 이후 그들은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자원을 통해 ‘자이바츠’로 성장하였다. 때문에 자이바츠의 CSR 정신이나 윤리의식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나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자이바츠가 해체되면서 기존의 폐쇄적인 소유관계로부터 벗어나,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이루었다. 이후 해체된 자이바츠에 속해 있던 계열사들은 메인뱅크(main bank)를 중심으로 ‘게이레츠’(기업집단)를 형성하였고, 주주중심주의가 발현되었다. 이 게이레츠는 1990년까지 경제성장에 집중하였으며 일본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게이레츠들은 많은 환경문제를 일으켰고, 이에 따른 불만이 시민사회에서 제기되자, CSR을 활용하여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이후 실시된 일본의 금융자유화로 인하여 버블 경제가 붕괴되면서 메인뱅크 마저 위기를 맞이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기업들은 세계화에 발맞춰 글로벌 기준에 맞는 미국식 CSR 프로그램 및 윤리강령 등을 도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의 경우, 초기 자본주의시기에 식민지 지배로 인해 자본가 집단은 ‘식민 자본가’와 ‘민족 자본가’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민족 자본가들은 민족기업 설립과 민족운동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하였으나, 그들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이후 조선의 해방과 함께 본격화된 현대 자본주의시기에는 일본의 자이바츠와 유사한 형태를 띤 ‘재벌’이 등장하였다. 재벌은 성장초기에 정치권과 결탁하여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재벌들은 사재를 출연하여 공익재단을 설립하였고, CSR을 이행하면서 사회적 비난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는 일본의 자이바츠의 CSR 형태와 닮아있다. 하지만 한국의 CSR은 정부가 기업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배태되어졌다. 이후 외환위기를 경험한 한국 재벌들은 CSR이 더 이상 관념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기업의 CSR을 제도화하고자 앞장섰으며, 미국식 CSR을 표방하였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의 역사적 진화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들 국가의 자본가 집단의 CSR 정신과 윤리는 닮은 듯 보였지만,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경험한 요인들로 인해 다른 형태의 CSR 정신과 윤리를 낳았다. 특히 일본의 자본가 집단들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변화를 꾀하였다. 이는 한국 자본가 집단과 CSR 형태에서 있어 큰 차이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자본가 집단들은 과거 발전국가에 의해 제한되었던 시장 자율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스스로 경영활동에 필요한 CSR 정신과 윤리의 본질을 찾고자 끊임없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비록 외부 압력에 의해 진행된 재벌해체가 큰 변곡점이 되었으나, 단순히 그것 하나만으로는 이들의 변화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는 일본 자본가의 역사성에 기인한 것으로 일본의 CSR 주체들은 과거 자신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장애물에 대해 과감히 개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들은 과거 발전국가 시기의 타성에 젖어, 그들의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한 혹은 자녀들에게 권력을 양위해주기 위한 ‘보여주기식 CSR’을 실행하고 있으며, 높아진 대중들의 시선을 맞출 만한 진정한 CSR활동을 펼치는 데는 여전히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재벌들은 스스로 CSR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은채, 기존 CSR을 답습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다음 단계인 ‘CSV’(공유가치창출)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재벌들이 그들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고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일본 자이바츠가 게이레츠로 변화했듯이, 재벌도 재벌개혁을 통해 경제 시스템을 개선시키며, CSR 제도와 관행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몇 가지의 한계점을 안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시기별로 대표되는 자본가 집단 이외에 다른 자본가들이 존재하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 CSR의 정신과 윤리가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둘째, 전자본주의 시기 중국, 송나라, 일본 등과 의 무역이 CSR 정신과 윤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시기에 외부요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CSR 정신과 윤리의 발전과정을 연구함에 있어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의 주요 목적은 서구의 프로테스탄트 윤리(ethic)와 자본주의 정신(sprit)이 칼뱅(Calvin, Jean)의 교훈에서 기원을 했듯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사회에서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CSR 뿐만 아니라, 전자본주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동아시아 CSR의 자본주의 정신의역사적 원천을 통합적으로 밝히고자 ‘내적 특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점에서 추후 이 연구를 바탕으로 이론적 모형을 도출하여, 전 자본주의 시대에서부터 현대 CSR을 체계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 외부 요인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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