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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 ]
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29, No. 3, pp.303-325
ISSN: 1976-2984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0 Jul 2018
Received 31 May 2018 Revised 21 Jul 2018 Accepted 21 Jul 2018
DOI: https://doi.org/10.16881/jss.2018.07.29.3.303

1990년대 정실 자본주의론 비판: 한보 당진제철소 사례를 중심으로

오형석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Critique of 1990s Crony Capitalism: Focus on the Hanbo Danjin Steel Mill Case
Hyung-suk Oh
Chung-Ang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오형석,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박사수료,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E-mail : hsoh1999@daum.net

초록

이 글은 현재 한국 철강산업의 새로운 집결지로 부상한 충청남도 북부 지역의 기틀을 마련한 한보의 당진제철소 추진의 배경과 과정을 검토한다. 지금까지 한보 당진제철소에 대한 통념은 자본의 과욕과 무지로 인한 과다차입과 과잉투자였으며, 이것은 97년 경제 위기가 한국 자본주의의 내적 비합리성의 결과라는 통념의 전형적인 예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이 글은 당진제철소 추진이 당시 시장 및 기술 조건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당진제철소 건설 계획은 단지 생산 규모의 양적 확대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조강류에만 한정되어 있던 주력 시장이 판재류로까지 확대됨을 의미했으며 또한 박슬라브주조나 코렉스 같은 혁신 설비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을 의미했다. 또한 한보의 실패는 내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외 조건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한보의 당진제철소 건설은 당시 자본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특정한 합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자본의 무능과 과욕으로 인한 과잉투자라는 97년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의 반례를 제공한다.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the process of Hanbo's Dangjin steel mill construction, which paved the way for the rise of the steel industry cluster in Dangjin, Chungnam. The case of Hanbo's Dangjin steel mill has been interpreted as excessive-borrowing and over-investment due to greed and ignorance, which provided a typical example of the inherent irrationality of Korean capitalism that preceded the 1997 crisis in Korea. This paper focuses on the point that Hanbo had coped with the change in technological conditions and market situations. Hanbo's plan meant not only simple expansion of the production scale, but also access to a flat product market. Moreover, it meant state-of-the-art facilities, such as thin slab casting or COREX. Hanbo's failure resulted not fromthe inherent problem but from achange in theexternal conditions. Overall, the construction of Hanbo's Dangjin steel mill showed the specific rationality of thelarge conglomerate in the 1990s, which provides a counterexample against the common idea of the 1997 economic crisis in Korea.

Keywords:

1997 Economic Crisis, Crony Capitalism, Over-investment, Hanbo Steel, Dangjin Steel, Hanbo Hearing

키워드:

97년 위기, 정실 자본주의, 과잉투자,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한보 청문회

1. 머리말

아마도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 경제의 부침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온 지역 중 하나는 충청남도 당진일 것이다. 1997년 한국경제는 그 해 1월 한보그룹의 부도에서 시작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으로 불렸던 외환위기까지 이어지며 전국민의 고통을 수반했지만, 그 후 한국 경제는 현재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달성을 눈앞에 둘 정도로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어왔다. 마찬가지로, 한보철강 부도 이후 당진제철소의 건설 중단은 지역 경제의 심각한 위축으로 이어졌지만, 현대제철의 당진제철소 인수 이후 현재 충남 당진은 국내 철강산업의 새로운 집적지로 자리매김했다. <표 1>에 나타나듯이, 과거 한국 철강산업의 중심지가 포스코의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잇는 ‘남동임해공업지역’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의 중심지는 충남 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아산만권’으로 재편되고 있다. 물론 97년 한보의 당진제철소와 현재 현대의 당진제철소는 규모나 시설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보의 당진제철소가 지금과 같은 철강산업 집적지로서의 당진 일대의 전사(前史)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보가 당진에 철강공장이 아닌 다른 공장을 세웠다면, 또는 한보가 당진이 아닌 다른 지역에 제철소를 세웠다면, 현재와 같은 당진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90년대 당진제철소는 현재 ‘아산만권’의 기틀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 글은 한보의 당진제철소 건설이 왜 추진되었고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질문은 한국 경제가 97년에 왜 실패했으며 그 실패가 이후 극복에 어떤 발판이 되었는가라는 더 큰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살펴볼 의의가 있다.

한국 철강산업 주요 행위자 공장 입지 현황

97년 근처에 실패한 많은 한국의 대기업은 과욕과 도덕적 해이라는 시각에 근거하여 해석되어 왔다. 이 통념은 무분별한 차입에 기반하여 과잉투자를 추진한 대기업(특히 재벌), 그 실패를 지원해주었던 정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연결고리인 정경유착으로 구성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신고전파적 견해의 일관된 주장이었지만(예를 들면, 강철규, 1997; 부즈, 앨런, 해밀턴, 1997; Hughes, 1999), 꼭 신고전파에 한정된 주장만은 아니었다(예를 들면, Chang, 1998; Chang, Park & Yoo, 1998; Haggard & Mo, 2000).1) 다시 말해 97년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정실 자본주의론’를 전제하며, 다만 그 원인에 대한 이견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90년대 과잉투자는 이러한 통념으로 해석될 수 없는 여지가 더 큰 현상이었다. 이 점에 주목했던 논의가 많지는 않았는데 장하준 외(Chang et al., 1998, p. 743)는 그 하나의 예를 아래와 같이 제공한다.

위기에 이르기까지 증대되었던 재벌들의 투자는 주로, 도덕적 해이 하에서 작동하는 투자자들이 선택할만한 ‘고 위험, 고 수익’ 산업이라기보다는, 안정적인 수익이 기대되는 산업들이었다. <표 3>[=본문의 <표 2>]은, 위기로 이어지는 몇 해 동안, 재벌들이 특히 대표했던 여섯개의 ‘안정적’ 선도 수출 산업들에서의 투자--이른바, 석유화학, 석유정제, 철강, 자동차, 전기전자, 그리고 조선--가 어떻게 제조업 전반에서의 투자보다 그리고 전체 투자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 6개 산업에서, 상위 30개 재벌들의 투자는 1994년과 1996년 사이의 평균적인 총투자의 82.3%를 차지한다(대괄호 인용자 추가).2)

한국의 설비투자 추이(성장률, %)

주요 건축 지표와 철근의 내수, 생산, 수출 실적(1981~1989)

이러한 언급은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 사례를 과욕과 무지 그리고 부정부패에 근거한 과다차입과 과잉투자로 일축하는 통념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보의 당진제철소 건설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과욕과 무지의 산물이 아니라 이윤 창출이 최우선적 목적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추구 활동의 하나였으며, 여기에서 정경유착은 그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위 인용문은 도덕적 해이론 비판의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깊게 다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이 시기 재벌들의 주요 동기가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낼 수는 있었지만, <표 2>와 같이 드러나는 이 ‘안정적’ 산업에의 투자가 어떤 동기로 그리고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까지 몰릴 수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이 부정부패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정상적인 기업 투자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는 전제 하에, 그것의 추진과 실패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에서는 이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것인데, 이후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절은 본 연구의 자료를 정리한다. 3절은 당진제철소 건설의 기획은 주력 산업이 건설업이던 한보가 제철이라는 제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발생한 현상임을 보여준다. 4절은 당진제철소가 단순한 양적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슬라브 및 코렉스와 같은 혁신설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설비 구성상의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5절은 한보의 실패가 96년 한국 제조업의 전반적인 위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마지막 6절은 이러한 검토의 의의를 살펴본다.


2. 연구의 자료

이 글이 90년대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의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참고하는 자료는 97년 1월 한보 부도 이후 열린 15대 국회 183회 국정조사 한보사건국정조사특별위원회의 회의록(이하 ‘회의록’)과 각종 제출자료(통상산업부, 1997a, 1997b; 한국은행, 1997; 한보철강, 1997a, 1997b)이다.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과 관련된 사안은 특정 관련자의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당시 국정조사에서 관련자를 출석시켜 심문했던 이른바 ‘한보 청문회’는 핵심 관련자들의 다양한 진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당시 통상산업부나 한보철강 등에서 국회에 제출했던 자료들은 일상적인 정책이나 활동 내역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 활용 가치가 크다. 이 자료들은 당시 철강산업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당시 당진제철소의 사업성을 평가했던 한국기업평가(1993, 1995)의 보고서, 한국철강협회(2003)에서 발행한 산업발전사, 한국철강협회(1992-5)한국철강신문(1997, 2003)에서 발행하는 『철강연감』 등을 참고한다.


3. 건설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전환

세무공무원이던 정태수가 한보상사를 세우면서 시작된 한보그룹의 주 사업 분야는 건설업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보와 정태수에게 큰 부를 안겨준 사업은 무엇보다도 대치동 은마아파트 분양이었다. 1979년에 완공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이전까지 아파트 단일공사의 최대 규모였던 잠실 장미아파트(총 2,100가구)를 뛰어넘은 총 4,368가구의 규모였다. 은마아파트의 1차 분양은 1978년 8월 6일에 시작되었는데 바로 이틀 뒤인 8월 8일에 부동산투기억제대책이 발표되면서 분양의 어려움을 겪었지만(매일경제, 1979.05.10. 3면), 1980년 1월 12일에 환율 및 금리 인상을 단행한 소위 1.12 조치 이후 부동산 경기가 되살아나면서(동아일보, 1980.01.16. 2면),3) 한보는 은마아파트의 전량 분양에 성공했다. 이 경험은 이후 당진제철소 건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진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홍태선 한보철강 사장은 단계적 투자와 설비 확장을 건의했지만, 정태수 회장은 투자는 한꺼번에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홍태선, 회의록 12, 78쪽).4)

은마아파트 건설과 분양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1979년에 한보는 중견 건설업체인 초석건설을 인수했다. 1957년에 설립된 초석건설은 1975년 건설부 도급한도액 순위에서 19위 경남기업에 이어 20위를 차지할 정도의 중견 건설 업체였으며, 국내보다는 해외수주실적이 많았던 기업이었다(매일경제, 1975.03.03. 7면). 한보 총회장 정태수가 직접 밝혔듯이, 1979년 2월에 부도가 난 초석건설은 해외건설업 진출을 위해 해외건설업면허를 가진 업체를 알아보던 그에게 좋은 매물이었다(매일경제, 1979.07.04. 7면). 초석건설 인수를 통해 한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까지 건설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1984년 11월에 한보는 금호그룹의 철강사업부문인 부산공장을 인수했다. 정태수 한보회장의 부산공장 인수는 애초에 철강산업으로의 진출을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부산공장의 제강 및 압연 설비에 있지 않았으며 단지 이 부지에 아파트를 지을 계획에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중국의 수출이 트여져서” 부산공장 운영을 계속 이어갔으며 급기야 향후 설비 확충까지 결심하게 됐다(정태수, 회의록 5, 106쪽).

한보가 당초 아파트 건설의 목적으로 인수했던 부산공장 설비를 활용했던 배경은 전반적인 건설경기 위축과 수출 증가였다. 82년과 83년에 급격히 증가했던 건축허가면적과 건설수주액은 84-5년에 증가율이 급격히 둔화됐다. 따라서 철근 내수 또한 증가율이 둔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86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정태수의 언급대로 수출의 급격한 증가가 있었지만, 더 큰 변화는 국내 건설경기의 반전에 있었다. 아시안게임(86년)과 올림픽(88년) 개최 등의 영향으로 인해 86년부터 건설경기가 점차 회복된 것이다. 87년부터의 철근 수출 감소는 내수의 급격한 증가를 반영하는데, 87-9년 사이에 철근 내수는 12%, 18%, 22%씩 증가했다(<표 3> 참조).

<표 4>는 이러한 건설경기 변화에 따른 조강류5) 수급 추이를 보여준다. 87년에 다소 주춤했던 조강류 생산은 88년부터 급격히 증가했다. 88년 조강류의 설비는 7,755천톤으로 전년에 비해 14.7% 증가한 동시에 가동률 또한 86.72%에서 94.39%로 7.67%P 증가했는데 이는 전년인 87년에 비해 14.9% 증가한 소비수요 증가에 기인한다. 더욱이 89년부터 3년간은 생산량이 설비능력을 초과(즉, 가동률이 100%를 초과)할 정도로 조강류의 수요가 증가했다. 특히 90년부터는 수입이 수출을 초과했는데, 이는 국내공급부족을 의미했다. 따라서 정부는 90년에 5.3 건설경기 진정책과 7.9 건설투자적정화방안 등 잇따른 규제조치를 발표하는 한편 일시적으로 철근의 수출제한조치와 수입촉진을 위해 수입할당관세를 10%에서 5%로 낮추는 등의 조치(한국기업평가, 1993, 62-3쪽)를 취해야 했다. 부동산 과열을 우려한 각종 정부 대책으로 인해 92년에는 2/4분기 전국단위땅값이 75년 이래 최초로 하락(매일경제, 1992.07.17. 1면)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향후 철강투입이 많은 대형 사업들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영종도 신공항(1단계 1992~7년. 연간 117천톤), 경부고속철도(1991년~8년. 연간 235천톤), 철도-지하철 건설(1992~6년. 연간 253천톤), 도로건설(1992~01년. 연간 110천톤) 등의 대형 프로젝트가 계획되어 있었다(한국기업평가, 1993, 96-101쪽).

조강류 수급 추이(1986~1994)(단위: 천톤)

이러한 변화를 배경으로, 한보와 정태수는 당초 그 부지에만 가졌던 관심을 수정하여, 철강산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특히 한보철강에서 생산하는 철근과 형강은 (주)한보와 (주)한보종합건설의 건설사업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품목이었기 때문에, 한보철강은 그룹 내의 건설부문에 안정적인 조강류 공급의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한보는 1986년부터 설비 확장을 계획했다. 이는 기존 공장의 확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부산공장의 부지가 협소할 뿐 아니라 인근 지역이 택지 개발 지구로 예정된 관계로 설비 증설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보는 처음에는 부산 감천만 연안의 두송반도를 매립하여 100만평의 부지를 조성하는 ‘감천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했다가 1988년에 공장 부지를 충남 당진 아산만 일대로 정하는 ‘이글 프로젝트’로 변경 하면서 당진제철소 건설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 시작한다(홍태선, 회의록 12, 70쪽).


4. 판재류 시장으로의 진출

한보가 처음부터 대형 일관제철소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1989년에 수립된 최초 계획은 부산공장의 이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부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89년 계획은 기존 부산공장의 설비 이전분을 제외하면 봉강 50만톤, 중후판 50만톤, 형강 50만톤, 냉연코일 50만톤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부산공장에서 생산하던 봉강 및 형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당초계획이 비록 한보철강이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중후판이나 냉연과 같은 판재류 압연부문으로의 진출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이 제품들은 각각 타업체로부터 납품받은 슬라브와 열연코일의 압연공정만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따라서 당진제철소를 통해 증가한 제강능력은 모두 봉강과 형강 같은 조강류로 구현될 것이었다.

90년을 지나면서 투자 계획상의 가장 큰 변화는, 중후판공장, 대형형강공장(H-BEAM), 냉연공장의 계획이 취소되었으며, 열연공장, 강관공장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규모의 확충도 이어졌는데, 92년 8월 계획에는 소형봉강의 생산능력이 60만톤에서 100만톤으로 늘어났으며, 94년 1월 계획에는 열연공장의 생산능력이 100만톤 늘어난 200만톤으로 변경되었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열연공장 설립 계획인데, 이는 한보철강의 당진제철소 건설이 92년에 들어서면서 판재류 시장 진출의 성격을 가짐을 의미한다. 한보철강 부산공장의 생산품은 철근과 형강의 조강류였는데, 92년의 계획은 열연코일을 직접 생산함으로써 판재류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계획 변화의 가장 두드러진 배경은, <표 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건설 경기의 위축이다. 주택 200만호 건설의 영향으로 고조되었던 건설 경기가 정부의 과열 방지 정책 등으로 인해 다시 안정 또는 하락세로 반전되었다. 반면에 일반 제조업은 점진적인 성장을 계속 보여주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 자동차와 전자 부문의 꾸준한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표 6>에서 나타나듯이, 주로 소비되는 철강재가 건설 산업에서는 봉강이나 형강과 같은 조강류인 반면에 자동차나 전기전자 산업에서는 열연-냉연코일과 같은 판재류임을 감안한다면, 90-92년 사이의 경기 동향은 향후 철강재 수요가 판재류에서 더 많을 것임을 시사했다.

철강수요산업 경기동향

93년 철강재품목별 수요산업 소비구조(단위: %)

92년 8월 계획부터 포함된 열연공장은 단지 당진제철소의 생산품이 하나 더 많아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전기로 제강 업체들은 조강류(條鋼類) 생산에 주력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열연코일로 대표되는 판재류(板材類) 생산은 사실상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박슬라브 주조(thin slab casting)’ 기술을 이용한 CSP(Compact Strip Plant) 설비 도입을 계획함으로써 한보철강은 전기로 제강 업체임에도 불구하고 열연코일을 생산 할 수 있게 되었다.

박슬라브주조법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에 조강류 품목의 철강재 생산만 가능했던 전기로 업체들의 생산품목을 판재류까지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박슬라브주조법은,

원하는 형상에 가까운(거의 정형에 가까운) 슬라브의 주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현대 전기로 생산을 증진시켰다. [중략] 슬라브가 두껍고 넓어야 하는 전통적인 연속주조법과 달리, 박슬라브주조는 [중략] 50mm의 슬라브를 생산하기 위한 전기로의 적은 산출을 처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두드러진 비용절감이 있을 뿐 아니라 전기로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철로 자동차와 가전기기 용도의 강판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D'costa, 1999, p. 150).

박슬라브주조법은 8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대표적인 업체는 뉴코아(Nucor)였다. 89년에 뉴코아가 미국 인디아나주의 크로스퍼빌에 세운 제철소는 박슬라브주조를 통해 전기로업체가 판재류시장에 진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호간, 1992, 59-60쪽). 한보는 국내 최초로 박슬라브주조를 도입함에 따라 한국의 뉴코아를 기대했다.

92년 이후의 당진제철소 건설 계획은 기존의 주 생산품인 철근과 더불어 열연코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슬라브 주조의 도입으로 인해 전기로에서 열연코일을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은 89-90년 계획에서 압연 공정만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중후판공장과 냉연공장 계획의 취소로 이어졌다. 또한 부산공장에서 주력하지 않았던 형강 또한 계획에서 제외되었다. 그 자리는 열연공장이 대신하였으며, 직접 열연코일을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은 그것의 하류(down-stream) 공정 중 하나인 강관공장의 건설 계획 입안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에 다른 전기로업체들은 판재류 시장 진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박슬라브주조 설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6) 이처럼 철강산업의 전통적인 분업 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혁신 기술에 대해 국내 업체들의 반응은 미온적었던 이유는 포항제철에 의한 국내 판재류 시장의 이중가격구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은 다른 중화학공업의 성장에 필수적인 소재를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철강재를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에 공급”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그 결과 “국내에서 수출용 원자재로 판매되는 철강재에 대해서 특별히 가격을 할인해 주는 ‘로컬가격제도’(local rate)가 적용되어 왔다”(송성수, 2002, 122쪽). ‘역 보조금(reverse subsidy)’(송성수, 2002, 194쪽)이라고까지 불렸던 이러한 현상은 한보철강의 A지구 열연공장이 준공되는 1995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95년 상반기에 발간된 포스코 경영연구소의 한 보고서(강호성, 1997, 360쪽)에 따르면, 당시 포항제철은 열연코일과 냉연코일을 국내시장에는 각각 330달러/톤와 450달러/톤에 판매한 반면 이 제품들을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수입가격은 각각 440달러/톤와 550달러/톤이었기 때문에, 만약 한보철강이 포항제철의 내수가격에 맞춰서 판매할 경우 톤당 100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이, 국내 판재류 시장의 이중가격구조의 변화가 없는 한, 박슬라브주조를 통해 생산된 열연코일의 국내 판매는 가격 제도상의 위험이 있었다. 한보철강의 경우에는 열연코일을 로컬가격제도가 적용된 포항제철의 국내 판매가보다 더 비싼 수입가격에 판매할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홍태선, 회의록 12, 86-87쪽), 정부가 하나의 품목에 대한 상이한 가격 형성을 용인할지는 여전히 의문인 상황이었다(강호성, 1997, 360쪽). 포항제철은 1999년 3월에 통상마찰의 빌미를 없앨 목적으로 로컬가격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당시에 톤당 26.6만원 수준이던 로컬가격이 내수가격 수준인 30.5만원으로 적용됨에 따라 가격 인상과 다름없는 결과로 이어졌다(매일경제, 1999.03.10. 11면). 이는 무엇보다도 한보가 바랐던 결과였을 것이지만, 97년 1월의 부도로 인해 그 실익을 누릴 수는 없었다.

이후 한보철강의 당진제철소 건설 계획은 94년 1월과 7월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한보철강 자체적으로 ‘2단계 사업변경’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이미 93년 11월부터 착공에 들어간 A지구 1단계 사업은 변동사항이 없었다. 그렇지만 B지구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는데, 기존에 계획되었던 강관공장과 가공공장이 취소되었으며 그 대신 제선, 열연, 냉연공장이 계획되었다. 94년 1월 계획까지만 해도 당진제철소는 대형 전기로 제철소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선 부문까지 추가된 94년 7월에 발표된 계획은 당진제철소를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 부문을 모두 갖춘 제철소)로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 변경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92년 8월과 94년 1월 계획에 있었던 B지구의 강관공장(50만톤)과 가공공장(50만톤) 계획이 삭제되었으며, 제선공장(230만톤), 열연공장(300만톤), 냉연공장(200만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중 제선공장에는 연산 75만톤급 코렉스 2기와 연산 80만톤급 DRI 1기가 들어설 계획이었다(이 공장들의 배치는 [부도 1] 참조). 생산 규모 또한 대폭 증가했는데, 제강 능력 기준으로 89년 당초 계획은 연 200만톤(신설 100만톤 + 이설 100만톤)이었으며 94년 1월 이전의 계획은 연 400만톤(신설 300만톤 + 이설 100만톤)이었던 반면에 94년 7월 이후의 계획은 연 700만톤(신설 600만톤 + 이설 100만톤)이 되었다. 특히 생산품의 구성은 열연코일과 냉연코일이 500만톤을 차지하고 조강류는 200만톤을 차지했기 때문에, 94년 7월 이후 당진제철소 건설 계획은 판재류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특징적인 부분은 사업 단계의 수정이 보인다는 점이다. 한보철강은 94년 1월 이전까지만 해도 B지구 신설 완공과 부산공장 설비이전 모두를 96년12월 이전까지 마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94년 7월 이후의 계획은 우선 2단계로 96년 12월까지 B지구의 제선, 열연, 냉연공장을 준공한 이후에, 3단계로 97년 1월부터 부산공장 설비를 이전하려는 방침을 보여준다([부표 1] 참고). 부산 공장의 확장 이전의 성격이 강했던 89-90년 계획에서는 부산공장의 이전이 규모나 구성 면에서 중요했지만, 94년 7월 계획 이후에서는 두 측면 모두에서 부차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96년12월 최종 계획에서는 부산이설 계획까지 부산공장매각으로 인해 취소됨에 따라 결국 최종 계획에 따른 당진제철소의 조강류생산은 주로 철근을 생산하는 소형봉강공장 100만톤만 남게 되었다).

이 시기의 더 중요한 지점은 당진제철소가 제선부문까지 갖춤에 따라 일관제철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냉연코일 200만톤을 생산하기 위한 열연코일은 전기로-박슬라브주조 공정의 산출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제선부문의 추가가 필요했는데, 이 제선 공정을 위해 DRI 및 코렉스 설비를 도입했던 것이다. 전기로제강에 쓰이는 고철 대체제인 직접환원철(DRI)을 천연가스나 석탄을 활용하여 생산하는 기술인 DRI는 전기로 방식의 증대로 인해 전기로 제강의 원료가 되는 “고철의 공급 부족이 심화됨에 따라 고철대체재를 생산하기 위한” 것(송성수, 2002, 244쪽)일 뿐 아니라 “DRI재를 첨가하게 되면 전기로 장입에 있어 고철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불순물의 농도를 줄일 수 있는 효과”(호간, 1992, 60쪽)도 기대할 수 있는 공법이다. 용융환원법(smelting reductions)의 일종인 코렉스 공법은 철광석과 석탄을 소결공정과 코크스공정을 생략한 채로 고로(용광로)에 장입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인데, 이것의 장점 중 하나는 “하류 공정의 선택”, 즉 “코렉스로 생산된 쇳물은 미니밀에서와 마찬가지로 전기로에 장입되거나 일관제철소의 전로에 장입될 수 있다.”(D'costa, 1999, p. 151)는 것이다. 한보철강의 혁신은 두 공법의 도입뿐 아니라 그 결합에도 있었다. 한보철강은 DRI설비와 코렉스설비를 동시에 갖춤(D'costa, 1999, pp. 150-151)으로써, “통상 GAS를 열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천연가스가 풍부한 지역에서만 경제성을 맞출 수 있는 한계가 있던” DRI설비의 열원으로 “COREX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생 GAS”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두 설비를 동시에 가동하는 외국 선례는 남아공의 SALDANAHA사)을 기대했다(한보철강, 1997a, 3쪽).

결국 한보철강은 직접환원법과 용융환원법 그리고 박슬라브주조법 설비를 도입함에 따라 90년대 세계 철강업계의 주요 혁신 기술들 거의 대부분(송성수, 2002, 245-246쪽; 한국철강협회, 2005, 342-343쪽)을 도입한 셈이었다.7) 박슬라브주조법 같은 경우에는 해외 성공 사례가 있었지만, 코렉스공법은 94년 한보의 도입 결정 당시 남아공의 이스코르(ISCOR)사만이 정상 조업을 진행중이었을 정도의 시험적인 설비였기 때문에, 특히 한보의 부도 이후에 그 실패의 이유를 코렉스의 무리한 도입으로 돌리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8)

당진제철소가 냉연코일 생산까지 계획했던 결정은 시기적으로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이 있었던 94년 상반기(1월에서 7월 사이)에, 향후(2001년 기준) 냉연코일의 공급부족을 통상산업부에서는 약 150만톤 정도로 예상했으며(통상산업부, 1997b, 503-527쪽), 산업은행(통상산업부, 1997a, 260-269쪽)과 현대그룹 신규사업부(현대제철, 2013, 275쪽)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공급부족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단지 아직 검증이 안된 실험적인 설비였다는 이유만으로 코렉스가 한보 실패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한보의 실패를 코렉스 설비의 문제로 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한보의 부도는 코렉스 시설을 아직 가동조차 하지 않은 시점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95년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 박슬라브설비 또한 국내최초였다. 따라서 홍태선 한보철강 사장은 한보 부도 이후 코렉스의 무리한 도입을 질타하는 당시 여론에도 불구하고 코렉스 도입 결정이 “판단에 차질이 없었다”(홍태선, 회의록 12, 72쪽)고 진술한다.9)

다만 코렉스 및 DRI와 같은 혁신설비의 도입이 기술적인 문제가 없었는가의 문제와 별도로 금융적인 취약성을 증가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부표 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코렉스 도입을 도입하기 전인 94년 1월까지의 당진제철소 총투자금액은 1조 6천억원 수준이었는데, 코렉스 도입을 결정한 직후인 94년 7월에는 총규모가 두배 이상인 3조6천억원 이상으로 늘어났고, 96년 12월에는 5조7천억원까지 증가했는데, 특히 여기에서 DRI 및 코렉스 설비가 포함된 ‘제선공장’은 총 투자비의 18%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투자 규모 확대는 무지와 과욕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는 금융세계화라는 조류 속에서 시행되는 점차적인 자본시장 개방이 향후 국내외 금리차의 축소, 즉 향후 국내금리의 하락이라는 전망(유철규, 1998, 212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계산이 작동했다. 정태수가 스스로 밝히듯이,

[금융비용부담이 커서 사업성이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그것은 먼저 제가 말씀드렸는데 왜냐하면 우리나라 금리가 비싸니까 결국은 이삼년후에는 외국은행이 … 금융시장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웃나라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금리가 떨어지면 낮은 금리를 대체해서 높은 금리를 갚으면 앞으로 경영하는데는 지장이 없고 흑자를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제가 판단을 하고 일을 해왔습니다(정태수, 회의록 5, 68쪽).

2000년대 이후 저금리가 잘 말해주듯이 이 전망 자체가 틀리지는 않았다. 장기적인 전망은 맞았을 수 있지만 9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단기적인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보의 역사는 97년 1월에 끝날 수 밖에 없었다.

본 절에서 살펴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 계획은 시장 변화에 기민한 대응이었는데, 초기 계획은 조강류의 수요증가, 92년 8월의 계획변경은 건설부문 위축으로 인한 조강류 수요감소 및 판재류 수요증가, 94년 7월의 계획변경은 냉연코일 공급부족을 그 배경으로 했다. 이는 당진제철소 건설을 단지 무지와 과욕의 산물로 여기는 통념과는 다르다. 둘째, 이러한 규모 확대는 혁신설비의 적극적인 도입을 수반했는데, 92년 8월에는 박슬라브주조 설비도입이 결정되었고, 94년 7월에는 DRI 및 코렉스 설비 도입이 결정되었다. 박슬라브주조와 DRI는 국내 최초, 코렉스는 포항제철에 이은 국내 두번째였다. 셋째, 주요한 계획변경에는 단기적인 시장변화뿐 아니라 장기적인 전망도 수반했는데, 열연코일 시장으로의 진출은 포항제철의 국내판매가격 이상으로 판매할 것이라는 전망에 기댔으며 제선설비 도입으로 인한 투자비용 확대는 향후 금융개방으로 인한 국내외 금리격차의 축소라는 전망에 기댔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역사는 이러한 장기 전망 자체가 틀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보는 나름대로의 합리성에 기반하여 당진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97년 1월에 드러났듯이, 엄청난 실패였다. 다음 절은 이러한 기획이 실패한 이유를 살펴본다.


5. 한보의 위기와 부도

한보의 실패는 더 넓은 차원에서 한국 제조업의 전반적인 위기를 반영했다. 그 주요한 요인들은 역플라자 합의, 동아시아에서의 경쟁 격화, 국내 은행들의 부실 증가였다. 여기에 한보가 놓인 철강산업에서의 악조건이 더해졌는데, 국제 및 국내 열연코일 가격의 하락에 내수 부진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이은 당진제철소의 투자 규모 확대는 한보 계획에 대한 은행들의 신뢰 저하를 초래했다. 취약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던 한보는 은행 지원 중단으로부터 채 한달도 버티지 못한채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한보의 유일한 선택지는 부도냐 은행관리냐였는데, 정태수 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끝까지 저항한 결과는 결국 부도였다.

장하준 외(Chang et al., 1998, p. 743)에 의하면, 90년부터 97년까지 부도 또는 그에 준하는 위기에 빠진 30대 대기업은 총 9개이다. 그런데 그 목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93-6년 사이에는 한양, 유원, 우성 총 세 개의 대기업이 실패했는데 모두 건설업에 기반한 업체였으며, 97년의 6개(기아, 한보, 삼미, 해태, 진로, 한라)는 대부분 제조업에 기반한 업체들이다. 다시 말해, 96년까지 건설업에 국한된 기업 위기가 96년 말부터 제조업에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요인의 결과였다.

첫째, 지금까지 많이 언급되었듯이, 이른바 ‘역플라자 합의’라 불리는 일본 엔화의 가치 하락이 있었고 이는 경상수지의 근간을 이루는 상품수지(무역수지)의 악화로 직결됐다. 93년의 경상수지 흑자가 수출의 대대적인 증가에서라기보다는 수입의 대대적인 감소(투자감소로 인한 수입감소)에서 비롯되었던 것과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 96년에 나타났는데, 이때의 상품수지 적자는 수입의 큰 증가에서라기보다는 수출의 큰 감소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영향을 미친 환율은 원화라기보다는 엔화였다. 원/달러 환율은 엔/달러 환율에 비해 변동이 덜했다. 1994-5년에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이라는 정권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 원/달러 환율을 지속적으로 낮추기 위해 개입했다는 해석은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긴 하지만, 당시 원/달러 환율의 하락은 엔/달러 환율의 하락보다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의 가격경쟁력에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95년 4월 역플라자합의 이후 원/달러 환율의 상승률을 훨씬 초과하는 엔/달러 환율의 상승(=엔화의 평가절하)은 한국 수출에 크게 불리한 요소가 되었다(95년 5월과 96년 8월 사이의 15개월 동안 원/달러 환율은 7.27% 상승에 그친 반면 엔/달러 환율은 26.74% 상승했다).

둘째, 국제 경쟁의 격화로 인해 한국의 주력 산업에서 수출 가격이 폭락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다소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온 소위 ‘날으는 기러기’ 모델이 지역 내에서의 분업을 통해 경쟁 격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90년대부터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중국에서의 생산 및 수출 증대는 기존의 저임금 산업에 주력하던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이들 나라는 한국과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였다(Erturk, 2002, pp. 257-268).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사한 전략의 겹쳐짐으로 인해 발생한 공간적으로 팽창된 과잉생산의 재생산이었다(Seo, 2013, p. 165). 그 결과 중 하나는 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16MB DRAM 반도체 가격의 폭락이었는데, 1993년에 개당 150달러 근처까지 올라가기도 했던(Erturk, 2002, p. 268) 16MB DRAM 가격은 1997년에는 10달러 밑으로까지 하락했다(<표 7> 참조).

DRAM 가격 추이(1993-7년)(단위: 달러/개)

셋째, 96년에 들어서 일부 시중은행들의 경영 실적이 악화됐다. 93-6년 동안 건설업 중심의 대기업 부도가 일반 제조업에까지 미친 영향은 산업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금융적 측면에서는 달랐다. 96년 시중은행들의 당기순이익은 전년도에 비해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부실여신에 대한 대손상각이 9,500억원 규모에서 1조3천억원 규모로 대폭 증가했다(매일경제, 1997.01.17. 7면). 특히 6대 시중은행 중에서 서울은행은 1,641억원 그리고 제일은행은 395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서울은행은 우성, 건영의 부도 여파로, 제일은행은 유원, 우성의 부도 여파로 90년대 첫 적자를 기록했다. 문제는 이러한 은행 손실이 은행들의 단기 차입이 증가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내 은행들의 단기 차입 증가는 당시 세계적인 조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1993년부터 국제 금융 기관들에게 BIS비율 준수라는 제약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장기 대출에 더 높은 준비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국제 금융 기관들은 상대적으로 단기 대출을 늘리게 되었고, 이는 결국 한국 금융체계의 만기 불일치의 문제로 이어졌다(Seo, 2013, p. 163). 이러한 요인들은 한보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 조차 96년 하반기부터는 시설자금 지원에 난색을 표했던 배경을 이룬다.10)

<그림 3>

주요 철강재 EU수출가격 추이(1990.03~1996.12)자료: 한국철강신문(1997, 566-7쪽)

이러한 배경에서 한보의 위기의 조금 더 직접적인 요인은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국제 열연코일 가격 하락이 있었다. EU 수출가격 기준으로, 93년 12월(260~280달러/톤)부터 시작된 가격 상승은 95년 3월(420~450달러/톤)까지 유지되었다. 그런데 한보철강 A지구가 완공되어서 열연코일 생산이 본격화된 95년 하반기에 국제 가격이 급격히 하락했다. 95년 3월부터 12월까지 불과 9개월 사이에 EU 수출 평균가격은 435달러/톤에서 260달러/톤으로 급락했는데 95년 12월의 260달러/톤은, 92년 12월의 255달러/톤을 제외한다면, 1990년 3월 이후 최저가였다.

둘째, 국내 열연코일 가격 하락이 있었다. 포항제철도 박슬라브 설비를 통한 열연코일 생산에 나섰는데, 로컬가격제도로 인해 이미 세계적으로도 최저가 수준이었던 열연코일 내수가격이 그보다 더 하락한 것이다. 홍태선 한보철강 사장은 ‘한보를 죽이는 것’11)이라고 했지만, 정작 포항제철의 의도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포항제철의 내수 공급가 인하는 명분이 확실했다. 포항제철의 박슬라브 열연코일 내수 가격 인하는 포항제철이 초창기부터 수행해온 ‘수출 산업으로의 값싼 철강재 공급’(송성수, 2002, 122-3쪽)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96년에 들어서 철강재의 가격하락뿐만 아니라 내수 감소가 있었으며, 이는 재고 증가로 이어졌다. <표 8>에서 나타나듯이, 93-5년 동안 매해 15%를 초과했던 철강재 소비 증가율이 96년에는 5.8%로 둔화됐다. 역플라자 협의라는 “엔화 평가절하에 따른 철강수요산업의 국제경쟁력 약화로 인해 철강재에 대한 수요가 크게 둔화되었던 것이다”(한국철강협회, 2005, 267쪽). 이로 인해서 당진제철소 A지구가 준공된 이후 생산된 제품들 중 판매되지 못하고 재고로 쌓이는 비율이 높아졌다.12)

철강재 수급 추이(1992-7)(단위: 천톤, %)

이러한 상황에서,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산업은행이나 외환은행은 96년 11월 중순부터 점차 한보의 위기를 인지하기 시작했다(신광식, 회의록 8, 37쪽; 박일영, 회의록 13, 16쪽; 장명선, 회의록 25, 32쪽; 김시형, 회의록 14, 15쪽). 이미 막대한 금융비용 부담을 떠안고 있던 한보에게 은행의 지원 중단은 중대한 타격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상정될 수 없는 과다차입과 기업위기가 바로 직결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한보에 대한 지원 중단의 결정적 요인은 은행의 신뢰 하락이었다. [부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94년 1월까지만 해도 1조6천억원 수준이었던 총투자비가 94년 7월에는 3조7천억원으로 96년 12월에는 5조7천억원까지 늘어난 투자 규모가 문제가 되었다. 이는 한보 입장에서는 시장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3, 4절)일 수 있었지만, 은행 입장에서는 한보가 필요한 자금이 어디까지 늘어난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밑빠진 독’처럼 느껴지게 했다. 당시 산업은행 총재가 진술했듯이,

[97년] 1월4일에 정[태수]회장이 당행으로 저를 방문해서 1월에 1,000억원, 2월에 1,000억원, 3월에 1,000억원, 3,000억원을 요청을 하면서 소위 소요자금이 5조7,000억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김시형, 회의록 14, 3쪽).

채권은행들은 한보의 자금 사정 악화의 큰 문제가 정태수 회장에게 있다고 보고 97년 1월 8일에 가서는 결국 한보의 경영권을 뺏어야 한다는 쪽으로 채권은행단의 의견이 모아졌다(장명선, 회의록 25, 50-51쪽). 다만, 은행들 입장에서는 최소한 1월 초까지는 지원을 계속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96년 말에 완공된 공장의 등기가 1월 초에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완공된 공장들에 대한 (후취)담보를 취득한 1월 초에는 더 이상 자금지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1월 10일 이후에 신규 자금 지원이 사실상 중단되자 결국 한보는 1월 20일에 1차 부도, 21일에 2차 부도를 맞고, 23일에 결국 최종 부도처리 됐다. 이 과정에서 최종 부도가 결정된 23일에라도 한보 총회장 정태수가 경영권 포기에 동의했으면 한보는 부도에 이은 법정관리가 아닌 은행관리로 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정태수에게는 이 둘의 차이가 없었다. 한보철강의 주식은 정태수와 그 일가가 49.9%를 확보할 정도로 정태수는 경영권에 대해 완고한 집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른바 ‘배짱’으로 밀고 나갔다.

내가 여기에서 한 마디 얘기하지요. [1월 21일에] 부도낸다 하길래, 내가 제일은행장한테 그랬습니다. 또 임창렬 재경원차관이 그 이튿날[=1월 22일] 아침에 부도통고를 하길래 그 사람한테 그 얘기를 했습니다. 부도를 내면 우리 한보는 지금 시설중에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제철소를 만들고 있소. 그러니 부도를 내면, 사람으로 치면 생니를 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생니를 빼면 부작용이 나면 몸전체가 부작용이 나가지고 죽는 수도 있다. 당신이 부도를 내려고 하거든 신중히 고려해 가지고 부도를 내라. 당신이 하수인인 것 같은데 당신이 윗 사람한테 잘 얘기해 가지고, 재경원장관을 얘기하는 겁니다. 얘기해 가지고 신중히 고려하라고 이렇게 얘기한 일이 있습니다(정태수, 회의록 5, 30쪽).

다시 말해 정태수 회장은 한보의 부도가 산업 측면에서나 금융 측면에서 국가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크기 때문에 금융 시장의 원리로는 한보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더라도 이것을 국민 경제 관리의 차원에서는 방지하는 기제가 작동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한보의 부도가 그 이후 많은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졌다는 것과 더불어 그 중에서 진로의 부도를 앞두고는 부도유예협약13)이 시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태수의 예측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기가 너무 앞선 것이 문제였는데, 부도유예협약과 같은 조치들은 한보, 삼미와 같은 대기업들의 부도 이후에야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6. 요약과 함의

이 글은 한보청문회 관련 자료에 근거하여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의 실상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글의 3절에서 나타난 90년대 한보의 전략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시장 상황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84년에 부산공장을 인수할 때만 하더라도 한보는 철강업에 진출할 의도가 없었으며, 89년에 당진제철소 건설에 착수할 때만 하더라도 한보는 96년과 같은 당진제철소의 설비 구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4절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89년 당초 계획에서 94년까지 이어지는 투자 계획의 변경은 단지 생산 규모의 증대만이 아니라 조강류에서 판재류로의 주력 시장의 변화를 의미했으며 이는 박슬라브 또는 코렉스와 같은 당시 최신 설비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결과라는 것이다. 5절은 한보의 실패가 기업 또는 개인의 무책임이나 무능이라기보다 당시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처할 수밖에 없었던 불리한 대외적 조건의 변화에 기인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종합적으로, 한보의 당진제철소 건설은 97년 위기에 대한 ‘자본의 무능과 과욕으로 인한 과잉투자’라는 일반적인 통념의 반론을 제공한다. 오히려 당진제철소는 당시 자본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특정한 합리성에 기반한 투자 행위였다.

우리는 현재에도 97년 이래로 이어지고 있는 신고전파와 국가주의라는 구도 속에서 97년과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두 견해는 모두 97년 위기가 한국 자본주의의 내재적 비합리성의 결과라고 전제한다. 신고전파적 견해에서는 국가 지원을 등에 업은 자본의 비합리적 투자 행태를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며(예를 들면, 부즈, 앨런, 해밀턴, 1997),14) 국가주의적 견해에서는 국가의 투자조정 해체로 인한 자본의 무절제한 투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예를 들면, Chang, 1998; Chang et al., 1998; Weiss, 2003). 그렇지만 이 글에서 검토한 한보 사례는 이 두 견해 모두에 대한 반례를 제시한다. 한보의 당진제철소 건설은 자본이 일정한 지위에 안주하고 단지 양적 확대에만 몰두했던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시장 및 기술 조건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과 혁신의 결과였다.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 사례가 97년 경제 위기에 대한 통념의 전형을 이루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국 한보 사례는 90년대 소위 ‘안정적인’ 산업들에서의 투자 열풍이 단지 양적 확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질적 개선을 시도한 측면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15) 그럴 때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한국 자본주의의 본래적인 대외적 취약성이다. 95년 이후 역플라자합의, 동아시아 분업구도의 약화, 국내 은행들의 국제시장에서의 단기차입 증대와 같은 대외적 조건의 변화는 더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을 구성한다.

이 글은 지금까지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한보 당진제철소 건설의 세세한 특징을 드러내고, 흔히 비합리적 투자로 치부되던 사례의 배경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는 그 대상을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관심이 한보 이외의 다른 기업들로 확장될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삼성의 자동차진출 또는 현대의 제철소 진출시도가 중요하며, 이는 더 나아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위기는 표면상 과잉투자가 많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기아나 해태 등으로 이어졌는지라는 문제까지 이어질 필요가 있다.

Acknowledgments

이 글은 현재 진행 중인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일부를 재구성한 것임.

Notes

1) 이런 측면에서 9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경이적인 성장에 대한 접근이 강한국가(SS, Strong State), 시장의 마력(MM, Magic of Market), 유교문화(CC, Confucian Culture), 외부환경(EE, External Environment) 등으로 분기(박은홍, 1999, 118쪽의 주1)됨에도 불구하고, 97년의 심각한 위기에 대한 통념은 비합리적 무지(II, irrational ignorance)로 수렴된다고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2) 그렇지만 이들에게도 한보 사례는 부패로 인한 일관성 없고 이상한(strange) 정책의 산물이었다(Chang et al., 1998, p. 740). 또한, 장하준(Chang, 1998, p. 1557)의 다른 논문에서 한보 사례는 분명한 부정부패의 산물이다.
3) 요즘에는 금리 인상이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환율이 더 중요한 변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1.12조치에 대한 당시의 전반적인 평가는 물가를 희생하면서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의도라는 것이었다(매일경제, 1980.01.12. 2면). 이에 따라 부동산 경기도 다시 침체에서 벗어났다.
4) 이 인용주는 12차 회의록의 78쪽을 의미하며, 앞의 이름은 당시 청문회 출석 증인을 뜻한다(이하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표기).
5) 간단하게 도식화하자면, 철강제품은 크게 가늘고 긴 조강류(條鋼類, long product)와 넓고 평평한 판재류(板材類, flat products)로 구분된다. 조강류에는 형강, 철근, 선재 등이 있는데 대부분 건축이나 토목에 사용된다. 반면에 판재류에는 후판, 열연코일, 냉연코일이 있으며 대부분 조선, 자동차, 전자기기 등에 사용된다. 조강류 수급의 절반 이상이 철근이기 때문에, 조강류 수급 동향을 철강 수급 동향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철강생산방식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로는 송성수(2002, 부록1)박소현(2015, 33쪽)을 참고할 수 있다.
6) 그나마 1994년 7월에 개최된 철강공업발전민간협의회(통상산업부, 1997a, 260-9)에서 동국제강이 전기로 핫코일 150만톤을 증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힘으로써 박슬라브주조 설비의 도입을 암시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7) 주요하게 언급되는 90년대 철강 산업의 혁신 기술 중 한보철강과 무관한 것은 박판주조법(strip casting) 하나이다.
8) 한보 부도 이후의 이러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보청문회 자리에서 통상산업부 관계자로 출석한 박재윤 전 통산부 장관과 안영기 당시 철강금속과장은 박슬라브주조나 코렉스와 같은 혁신 설비의 적극적인 도입이 정부가 도입을 권장했던 사항임을 명시적으로 밝혔는데, 이는 한보철강의 혁신 설비의 적극 도입이 당시 산업정책의 맥락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한보철강 설비구성의 국가 정책적 배경은 오형석(2018)을 참고할 수 있다.
9) 청문회에 출석했던 한보측 증인들 중에 정태수 회장과 달리 제철 전문가였던 홍태선 사장은 정태수의 무리한 사업추진을 비판하는 진술을 많이 해서 당시 특위 의원들로부터 ‘말이 통한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10) 따라서 96년 11월부터 한보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조차 점차 자금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정태수회장이 우리 방에 왔길래, 그래서 자금지원을 해달라 그러길래 우리 은행에서 해줄 만큼 해주었지 않았느냐, 다른 은행 가서 하십시오, 그것은 했습니다. 했더니 정회장 말씀이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이 단계 와서 안해주면, 중단해 버리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러면 제일은행에 담보를 안넣어도 좋으냐, 그러면 다른 은행 가서 담보넣고 해도 좋으냐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어서 좀 실랑이가 있었습니다.”(신광식, 회의록 8, 37-38쪽)
11) “실제적으로 포항제철에서 ISP가 작년부터 가동이 되면서 자기네들은 뭐 고로제품하고 차별화정책을 한다 이래 갖고 8%를 내렸습니다. 8%는 지금 포항제철 핫코일가격이 25만6,280원인가 그렇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8%면 약 23만 얼마 입니다. 23만 얼마이면 이것은 세계에서 그런 가격도 없고 이것은 한보를 고사시키는 이런 작전이 아니면 이것은 포항제철에서 ISP 미니밀(Mini Mill)을 도입할 수 없다. 그때 상공부한테도 굉장히 항의를 했습니다. 포항제철이 이것을 하면 한보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런 것 때문에 지금 A지구가 누가 인수를 해서 하더라도 A지구의 핫코일가격은 원가가 최소한도 28만원 이상이 듭니다.”(홍태선, 회의록 12, 86-87쪽)
12) 한보그룹 재정본부사장을 맡고 있던 김종국은 한보 실패의 중요한 이유로 다음의 내용들을 지적했다: “(어떤 이유로 한보그룹이 망했다고 생각하는지 아주 간단하게 좀 답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다른 위원님도 아까 말씀하셨는데, 1차적으로는 한보 자체의 자금부족이고 두번째로는 경기불황, 철강 경기불황으로 인해가지고 재고자산 처분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자재의 제품하치가 약 65만t 정도 재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약 2,000억 가까이 됩니다. 그래서 자금회전이 안되었고요. 세번째로는 결국 공사규모가 자꾸 확장되었습니다.”(김종국, 회의록 6, 64쪽)
13) 한보그룹과 삼미그룹이 연이어 부도를 맞고 진로그룹이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정부는 기업 연쇄 부도로 인한 충격을 완화한다는 명분으로 1997년 4월 15일에 ‘금융기관부도방지협약’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이한구, 2010, 498-9쪽).
14) 몇 달 전 금융감독원장에 임명된 적이 있는 김기식의 칼럼(경향신문, 2018.04.02. 30면)도 그 예 중 하나로 언급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바람직하지 않던 과거(=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던 그런 시대)와 바람직한 미래(=시장과 법률에 의한 구조조정)를 분명하게 대조하면서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15) 단지 혁신기술의 적극적인 도입 그 자체만을 가지고 ‘합리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본고에서 나타난 한보 당진제철소의 설비 구성이 한보에 대한 현재의 통념을 구성하는 ‘단순한 양적 확대에만 매몰된 경영 행태’와 동일한 종류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서 매일경제(1997.03.01. 5면)에 실린 미국 시세로 스틸 사장 정석화의 칼럼 <미철강업계가 보는 한보사태>는 한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한보철강 문제는 이제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미국 철강업계에서는 우려와 시기의 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략]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철이나 뉴스에 나오는 한보철강의 시설을 보고 부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대 규모의 최신 박슬래브공정이라든지 기술적으로 아직 실용화되지도 않은 코렉스 공정에 무모하리만큼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는 풍토를 비방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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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부표 1] 한보철강의 당진제철소 사업계획 변경내역 (89년~96년)

[부표 2]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투자규모 변경내역 (89~96년)

[부도 1] 당진제철소 공장배치도

<그림 3>

<그림 3>
주요 철강재 EU수출가격 추이(1990.03~1996.12)자료: 한국철강신문(1997, 566-7쪽)

<표 1>

한국 철강산업 주요 행위자 공장 입지 현황

인천 부산권 포항권 광양권 아산만권 군산
자료: 각 기업 사사 및 홈페이지; 박소현(2015, 52쪽의 <표 III-1>)에서 재인용
원주: 인수합병의 경우 *로 표기. 부산권은 경상남도, 포항권은 경상북도, 광양권은 전라남도, 아산만권은 충청도 및 경기남부 포괄
인용자주: 음영은 예전 한보철강 공장을 의미(인용자 추가)
포스코 1970 1985
현대제철 1953* 2000* 2013* 2004*
동국제강 1972 1963 1991 2010
동부제철 1984 1997
한국철강 1957 2007
대한제강 1980 2011
YK스틸 2002*
환영철강 1993
포스코특수강 1997*
세아제강 1995* 1978 2013* 1998*
포스코강판 1989
현대하이스코 1975* 1999 2004*
유니온스틸 1967
휴스틸 1995 2005
코스틸 1984

<표 2>

한국의 설비투자 추이(성장률, %)

1972-9 1982-2 1983-91 1992-3 1994 1995 1996
자료: KDB(한국산업은행); Chang et al.(1998, Table 3)에서 재인용. 음영은 인용자 추가
원주: 6개 산업은 석유정제, 석유화학, 철강, 전자전기, 자동차 그리고 조선. *는 1987-91
전산업 43.3 1.3 20.0 -1.0 36.7 37.9 17.3
제조업 43.6 -11.3 29.6 -8.9 56.2 43.5 17.1
‘6개’ 산업 n.a. n.a. 20.3* -6.8 68.2 48.7 25.1
비제조업 49.9 21.8 10.1 15.5 9.5 26.9 17.7

<표 3>

주요 건축 지표와 철근의 내수, 생산, 수출 실적(1981~1989)

81 82 83 84 85 86 87 88 89
자료: *한국기업평가(1993, 104쪽), **한국철강협회(2003, 386쪽)
건축허가
면적*
m2 20,846 29,798 39,693 39,563 38,217 43,543 47,982 60,796 88,615
증가율(%) -18.97 42.94 33.21 -0.33 -3.40 13.94 10.19 26.71 45.76
건설수주 액* 10억원 3,198 3,934 4,735 5,187 5,388 5,981 7,250 7,292 13,465
증가율(%) 55.09 23.01 20.36 9.55 3.88 11.01 21.22 0.58 84.65
철근 내수** 천톤 1,277 1,793 1,891 2,056 2,171 2,238 2,516 2,992 3,666
증가율(%) -10.01 40.41 5.47 8.73 5.59 3.09 12.42 18.92 22.53
철근 생산** 천톤 1,808 2,351 2,756 3,056 3,218 3,591 3,401 3,605 4,080
증가율(%) -8.96 30.03 17.23 10.89 5.30 11.59 -5.29 6.00 13.18
철근 수출** 천톤 531 558 865 1,000 1,047 1,353 886 616 422
증가율(%) -6.35 5.08 55.02 15.61 4.70 29.23 -34.52 -30.47 -31.49
철근 수출/내수(%) 41.58 31.12 45.74 48.64 48.23 60.46 35.21 20.59 11.51

<표 4>

조강류 수급 추이(1986~1994)(단위: 천톤)

연도 설비
(A)
가동률
(B/A, %)
생산
(B)
소비
(C)
B-C 수출
(D)
수입
(E)
무역수지
(D-E)
총수요
(C+D)
자료: 한국철강협회(1995, 350-1, 386-7, 410-1, 440-1쪽)
1986 6,578 101.69 6,689 5,131 1,558 1,966 408 1,558 7,097
1987 6,760 86.72 5,862 5,777 85 1,615 530 1,085 7,392
1988 7,755 94.39 7,320 6,637 683 1,332 648 684 7,969
1989 7,862 105.61 8,303 7,343 960 1,317 448 869 8,660
1990 8,385 112.56 9,438 10,034 -596 809 1,405 -596 10,843
1991 9,446 104.74 9,894 11,875 -1,981 682 2,463 -1,781 12,557
1992 11,571 95.81 11,086 10,781 305 1,792 1,487 305 12,573
1993 14,216 93.50 13,292 12,617 675 1,741 1,066 675 14,358
1994 15,476 93.73 14,505 14,615 -110 1,532 1,642 -110 16,147

<표 5>

철강수요산업 경기동향

단위 89 90 91 92 93 94 89-94
연평균
증가율
자료: 한국철강협회(1992, 59쪽; 1993, 64쪽; 1994, 56쪽; 1995, 68쪽) 단 건설수주액은 한국기업평가(1995, 99쪽)
건설수주 십억원 13,453 20,964 25,569 27,861 33,246 37,197 22.56%
% 55.83 21.97 8.96 19.33 11.88
건축허가
면적
m2 88,615 116,419 105,184 94,647 117,790 116,221 5.57%
% 31.38 -9.65 -10.02 24.45 -1.33
자동차
생산
천대 1,129 1,322 1,498 1,730 2,050 2,312 15.41%
% 17.09 13.31 15.49 18.50 12.78
조선건조 천G/T 2,926 3,573 4,430 4,567 3,383 5,170 12.06%
% 22.11 23.99 3.09 -25.93 52.82
전자생산 십억원 19,004 21,036 24,265 26,080 29,264 37,859 14.78%
% 10.69 15.35 7.48 12.21 29.37
일반기계 십억원 9,090 11,253 13,404 16,238 16,219 20,697 17.89%
% 23.80 19.11 21.14 -0.12 27.61

<표 6>

93년 철강재품목별 수요산업 소비구조(단위: %)

형강 봉강 철근 열연강판 냉연강판
자료: 『철강보』 94년10월호; 한국기업평가(1995, 97쪽)에서 재인용
건축 48.4 5.2 77.8 13.2 0.4
토목 30.7 2.2 22.2 9.4
일반기계 1.7 25.1 10.4 6.1
전기전자 0.3 2.3 16.5 20.8
조선 10 2.2
자동차 0 29.1 33 58.1
조립금속 1.4 29.3 17.5 12.1
기타 4.7 2.5

<표 7>

DRAM 가격 추이(1993-7년)(단위: 달러/개)

1M 4M 16M 64M
자료: 93-4년 Dataquest(96.11)와 95-7년 Dataquest(98.5), 산업자원부(1999, 11쪽)에서 재인용
원주: 음영은 한국기업 주력상품
93 3.38 11.58 74.26
94 4.10 12.73 52.84
95 4.15 12.90 52.14
96 1.36 5.25 16.91 90.5
97 0.68 1.90 7.20 30.1

<표 8>

철강재 수급 추이(1992-7)(단위: 천톤, %)

생산 (증감율) 내수 (증감율)
자료: 『철강통계연보』; 한국철강협회(2005, 267쪽 <표 6>)에서 재인용
92 28,894 3.8 21,820 -10.8
93 33,768 16.9 25,246 15.7
94 36,173 7.1 30,510 20.9
95 39,258 8.5 35,529 16.5
96 42,379 7.9 37,583 5.8
97 44,733 5.6  38,14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