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과 『난중일기』 교훈을 통한 국방무기개발 리더십 제고방안에 관한 연구
초록
본 연구는 북 핵 및 미사일 위협을 맞아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를 위하여 먼저 국방획득 및 연구개발이라는 국방무기개발과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하였다. 아울러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단 당시 거북선·화차·비격진천뢰 등 과학기술혁신으로 국난을 극복한 기록이 남아있는 『징비록』과 『난중일기』의 문헌을 검토하여 유성룡·이순신의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에 대한 함의를 도출하였다. 이를 기초로 유성룡·이순신의 국방무기개발 리더십과 한국 현대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의 실제(實際)를 분석하고 시사점 및 교훈을 찾았다. 연구결과 제도·시스템 등 관리(Management)에 앞서 ① 현장방문, 전략무기 및 연구개발예산에 대한 최고통수권자를 비롯한 정치·군사지도자들의 관심과 배려 ② 정권에 관계없이 탁월한 인재 발굴과 연구원 처우개선을 통한 연구개발 기관 CEO 및 연구원들의 적합한 인재등용 ③ 청와대 및 국방부에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설치로 관련기관의 유기적 협력을 통한 개발여건 조성이라는 국방무기개발 리더십(Leadership)을 발휘할 때만이 기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Abstract
The objective of this study focuses on the improving the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to have hit a snag meeting North Korea's nuclear and missile threats. For this aim, first I debated the theory for the military weapons development as the Defense Acquisition and R&D, and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Concurrently, I reviewed the literature as Jingbilok & Nanjungilgi to overcome a national crisis with technological innovation as the turtle ship, fire-attack car, and Bikecjincheonro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the second invasion (1597-1598). So I got an implication looking for the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of Ryoo, Sung-Ryong & Yi Sun-Sin. In addition, I analysed the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of Ryoo, Sung-Ryong, Yi Sun-Sin and present-day Korea. On this basis, I identified lessons for the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Study results found that we can achieve the desired results when the president, and political and military leaders exercise the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as interest & consideration, suitable talent recruitment of CEO & research scientists of ADD and creating a given condition of development prior to management as an institution & system.
Keywords:
Leadership of Weapons Development, Interest & Consideration, Talent Recruitment, Creating a Given Condition of Development키워드:
무기개발 리더십, 관심과 배려, 인재등용, 개발여건조성1. 문제제기
한반도는 북한의 6차례 걸친 핵 실험과 수차례의 미사일발사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의 김정은 제거 등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한동안 위기에 빠졌었다. 그러나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석이후 긴장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문재인·김정은의 2018.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트럼프·김정은의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9.19 평양 남북정상회담, 2019.2.27~28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내부적으로의 셈법은 매우 복잡하다. 트럼프는 완전한 비핵화(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armament)를 달성해야 하고, 김정은은 핵감축(Nuclear Reduction)이나 비핵화를 명분으로 실리를 챙겨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 가운데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은 합의문 도출에 실패하였고, 남북관계도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
조선후기 이후만 해도 1592년 임진왜란, 1957년 정유재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1950년 6.25전쟁이라는 커다란 외침이 있었다. 충분히 예견된 전쟁이었음에도 대비를 소홀히 하여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였다. 특히 1592년에 발발하여 1598년에 종결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6.25전쟁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종결되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이라는 불후의 저서를 남겼고, 이순신은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7년간의 전쟁일기를 남겨 후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지만 위기는 반복되었다. 지금 한반도는 남·북, 미·북 정상회담으로 내부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겉으로는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국방무기개발에 대한 조용한 혁신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대화도 강한 국방력이 있을 때 가능하며, 포용정책도 북한을 압도할 안보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강태화, 2017).”라는 말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적기(適期)로 판단된다.
위의 문제제기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국난극복 요인의 하나인 당시 조선 무기체계의 우월성에 주목하였다. 무기체계의 우월성이란 과학기술의 우월성이다. 거북선·화차(火車)·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 당시의 무기체계는 일본의 안택선(安宅船)·조총(鳥銃) 등에 비하여 훨씬 우수한 무기체계였다. 이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난극복과정에서 과학기술의 혁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의 국방과학기술 즉, 무기체계개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지상 전력인 K-2전차, K-9자주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환영을 받고 있고, 해상전력인 잠수함, 이지스함도 선진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이다. 공중 전력인 수리온 헬기, T-50/FA-50, KT-1 기본훈련기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아가 장거리 지대지 탄도탄/순항유도탄(아음속, 초음속), M-SAM 등 대공미사일은 첨단무기 중 첨단무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대응능력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말하면서도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려 하거나, 북한은 결국 핵을 포기 할 것이라고 가정해 독자적 대응을 미루어 왔다. 그 결과 북 핵·미사일 대응에 필수적인 ‘눈’ 역할을 하는 ‘군 정찰위성’은 개발 중에 있으나 한미동맹에 의존하고 있다. 방어체계도 실전배치에 들어간 저고도용 ‘M-SAM(천궁, 중거리지대공유도무기, 40km)’을 제외하면 ‘PAC-3(패트리어트, 40km)’, ‘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40~150km)’ 등 대부분을 역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나아가 타격체계는 탄도탄 내지 순항미사일을 개발, 보유하고 있으나 ‘타우러스(Taurus, 공대지 미사일, 500km)’ 등 해외도입추진에서 보듯 무기개발 리더십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현대 국방무기개발은 박정희정부에서 본격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와는 달리 군 통수권자 및 정치·군사지도자의 관심과 배려 등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은 점차 약화되었다. 그 대신 방위사업청 설립, 획득제도 개선, 감사원 감사 등 제도·시스템 위주의 관리가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에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과학기술혁신으로 국난을 극복한 기록이 남아있는 『징비록』과 『난중일기』에 나타난 유성룡과 이순신의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을 고찰하여 이에 대한 교훈 및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특히 본 논문은 기존 연구에서 포괄적인 유성룡과 이순신의 리더십을 많이 다루고 있으나 보다 구체적인 분야인 무기체계개발 리더십까지 접근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2. 이론적 배경
1) 국방무기개발
국방무기개발이란 전쟁수행과 전력증강을 위해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연구로 통상 국방연구개발(김철환, 이채언, 하철수, 2015, 467쪽)을 의미한다. 방위사업청에서는 국방연구개발이란 무기체계 획득방법 중 하나로서 우리가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국내단독, 또는 외국과의 협력하여 공동으로 연구하고 연구된 기술을 실용화하여 필요한 무기체계를 생산·획득하는 방법으로 정의하고 있다(방위사업청, 2006). 여기에서 국방획득은 군에서 필요로 하는 무기나 장비를 획득하는 것으로 군 구조 및 인력, 교육훈련과 함께 군사력건설의 하위 구성요소에 해당한다. 나아가 국방획득체계는 기획관리체계(PPBEES),1) 소요기획체계, 획득관리체계 등을 포함한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된다(하태정, 홍성범, 유지은, 2016, 21쪽). 현재 국방연구개발 사업은 내용 및 수행주체를 기준으로 국방기술개발, 업체주관연구개발, 국책연구개발, 국과연 주관 연구개발, 성능개량 5개 단위사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사업목적에 따라 무기체계 연구개발과 국방기술 연구개발 사업으로 구분하며, 연구개발예산을 기준으로 보면 무기체계 연구개발 비중이 약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2)
국방기술 연구개발사업은 기초연구, 핵심개발, 신개념기술시범, 민군겸용기술, 핵심부품 국산화개발 5개 세부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초연구는 개별기초, 특화연구실, 특화연구센터 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기술은 무기체계연동형, 선도형 기술개발, 선행핵심기술, 핵심소프트웨어, 국제공동기술개발로 구성되어 있으며 핵심기술 사업은 기초연구, 응용연구, 시험개발을 거쳐 최종적으로 무기체계에 적용되거나 미래 무기체계에 활용토록 되어있다.
국방연구개발 수행체계는 방위사업청이 국방 R&D를 총괄하면서 국방 R&D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무기체계 R&D사업의 경우 방위사업청 통합사업관리팀(IPT)이 사업관리를 전담하고, R&D주관기관에 따라 ADD주관사업과 업체주관사업으로 구분된다. ADD주관사업은 IPT통제하에 ADD가 직접 R&D를 수행하고, 업체주관사업은 업체가 R&D를 실행하되 ADD의 기술관리 지원 하에 사업을 담당한다. 반면 국방기술 R&D사업은 방위사업청(기술기획과)이 총괄하나 사업관리는 ADD가 전담지원하며, 일부사업은 국방기술품질원(DTaQ)이 지원한다(장원준, 김미정, 민현기, 이춘주, 2016, 36쪽). 따라서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국방연구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방획득 및 연구개발 절차는 일반적으로 군이 최초 소요를 제기하면 기획(군 요구 성능결정)과정을 거쳐 연구를 수행(선행연구, 탐색개발, 체계개발)하게 되며, 이후 시험평가, 양산, 배치의 과정을 거쳐 운영유지, 폐기까지 이르게 된다. 이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2006년 방위사업청 개청이전에는 소요-획득-운영을 국방부에서 전체 주관하였으나, 방위사업청 개청이후 신무기획득(구매/개발)은 방위사업청에서, 경상운영(무기체계 운영유지)은 국방부에서 주관하는 이원화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무기체계 연구개발사업은 소요기간이 평균 17년 이상 장기간을 필요로 한다(하태정 외, 2016, 24쪽). 또한 국방기술 연구개발사업도 선행 핵심기술사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방중기계획서에 포함된 내용으로 연구개발 착수 전 평균 5년 정도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하태정 외. 24쪽). 국방획득 및 연구개발 전체 과정은 무기체계에 따라 상이하나 평균 40~50년이 소요된다(하태정 외, 24쪽). 아울러 의사결정 및 심의과정도 관련 법 및 규정3)에 따라 소요결정부터 양산까지 약 60단계를 거쳐야 한다. 더욱이 2016년부터 방위사업청(방위사업감독관실)4)의 모니터링·검증·승인과정5)이 23단계 추가됨에 따라 전력화 기간은 더욱 증가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국방연구개발절차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난중일기에 나타난 거북선제작과정을 보면 소요-연구개발-시험평가-양산-배치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은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을 만나 거북선 제작을 결심하고 착수하였다. 착수 다음해인 1592년 3월 27일 시운전(진수식)을 하였으니 제작기간은 약 1년 정도 소요되었다. 물론 현재와 약 400년 전의 상황을 비교할 수 없으나 국방연구개발사업의 효율성면에서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국방획득 및 연구개발은 1968년 1.21청와대 기습사건, 닉슨 독트린에 따른 1971년 3월 미 7사단 철수 등 안보위기를 맞아 국방과학연구소(ADD,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를 설립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기본병기 조기생산을 위한 모방개발로 시작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유도무기 등 각종 초정밀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축적과 함께 독자적인 한국형 무기체계개발 역량을 갖추고 있다.
태동기에는 1973년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제정 등으로 방산물자지정, 방산원가보상, 보조금 지급, 세제지원 등 방위산업을 보호·육성하였다. 주로 소총류 등 재래식 무기 개발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라이선스 생산(License production)방식으로 기술을 이전받아 무기체계 기술개발 역량 축적에 주력하였다(장원준 외, 33쪽). 1990년대에는 ‘국내 연구개발 우선정책’을 시행하여 K-9자주포, 구축함(KDX-Ⅱ), KT-1 등 기술 집약형 무기체계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고 민군협업을 활성화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개방·경쟁정책으로 변화시켜 2006년 방위사업청 개청이후 2009년 전문화·계열화 제도를 폐지하였다. 2014년부터는 일부 무기체계에 대해 복수연구개발(Competitive prototyping)을 추진하였고, 2008년부터는 IT등 우수한 민간기술을 적극 활용하기 위하여 신개념기술시범(ACTD; Advanced Concept Technological Demonstration)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수출활성화도 모색하고 있다.
근래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정찰·감시, 방호·타격, 지휘·통제 등의 분야에서 군사혁신(RMA, 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을 이루어내고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의 도래에 따라 로봇·자율·인공지능·사물인터넷(IoT)·우주공학·나노기술·생명공학 등의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국방 분야에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네트워크와 정보·통신수단을 마비시키는 사이버전과 전자전 기술도 중요시 되고 있고 작전수단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제압하한 정밀화·고속화·초소형화 관련기술이 무기개발에 적용되고 있다(국방과학연구소, 2016, 175쪽).
최근 국방획득 및 연구개발의 추세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다양한 군사적 위협에 신속히 대응하여 승리할 수 있는 능력 확보이다. 이를 위하여 미국은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을 설립하여 신기술 및 첨단기반기술 개발과 이의 군사적 적용을 위한 혁신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ADD산하에 국방고등기술원을 두어 벤치마킹하고 있다. 제도적으로는 신속획득제도, 진화적 개발이 추진되고 있으며 신속획득제도는 사전 기획되지 않은 신규핵심과제도 예산편성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패스트 트랙(Fast Track) 제도이다. 진화적 개발은 처음부터 완벽한 무기를 만들 수 없으므로 작전 운용 성능(ROC; 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의 목표치를 분할하여 동일한 개발 단계를 반복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개발 완료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방위사업관리규정에 명시는 되어있으나 형식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둘째는 정책, 기술기획, 민군협업 통합을 위한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 선진국들은 국방부(이스라엘 총참모장)가 소요에서 폐기처분에 이르기까지 획득 및 운영유지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전체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방위사업법과 국방전력발전업무훈령에 따라 소요-획득-운영이 이원화되어있어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셋째, 정부와 업체의 역할 분담이다. 선진국의 방산업체들은 정부의 차원의 조정·통제에 따라 제품을 특성화하여 국내에서는 공존을 모색하면서도 국제공동연구개발 활성화, 자체 R&D투자 강화를 통해 Global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경우 내수시장 한계에 따른 0원 투찰, 중복투자 및 빈번한 소송으로 인한 사업지연 등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어 보다 합리적인 경쟁체제 도입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2) 국방무기개발 리더십
많은 학자들은 리더십과 관리의 차이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구분은 리더십은 사람의 ‘마음’에 초점을 두고, 관리는 ‘조직’의 제도 및 시스템에 초점을 둔다는 것이다. 존 코터(John P. Kotter)는 리더십은 변화와 전진을 추구하는 것이고, 관리는 ‘질서와 일관성’을 제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리더십은 주어진 조건에서 그 이상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윤종성, 2013, 19쪽). 워런 베니스(Warren Bennis)와 버트 나누스(Butt Nanus)는 “관리자는 일을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고, 리더는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두 개념을 명확히 구분했다(윤종성, 2013, 20쪽). 조셉 로스트(Joseph Rost)는 리더십은 “‘다방향의 영향관계’이며, 관리는 ‘단일 방향의 권한관계’이다.”라며 리더십은 ‘공동목표’에, 관리는 ‘직무수행’에 관심을 둔다고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리더십과 관리는 위와 같은 차이점이 존재하나 게리 유클(Gary Yukl)의 주장처럼 리더십과 관리가 결합되었을 때 성과는 배가된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관리자가 될 수 있고, 훌륭한 관리자는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이는 국방무기개발도 제도·시스템 등 관리도 중요하나 연구원들의 사기를 충분히 고려하는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의미이다.
저명한 리더십 학자이자 경영학자인 워런 베니스(Warren Bennis)는 리더십(Leadership)과 관리(Management)의 차이점을 “리더십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고, 관리는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리더십과 관리의 본질을 간단히 정리했다(윤종성, 2013, 19쪽).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이란 무기개발을 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전쟁수행과 전력증강을 위해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무기를 개발함에 있어서도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군 통수권자의 무기개발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멀리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무를 군사로 영입한 오 왕 합려는 오늘날 국방과학연구소(ADD)에 해당하는 ‘천리려(千里廬)’에 궁녀 300명을 배치하여 작업을 돕게 했다. 이러한 전례 없는 관심과 배려에 오나라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앞 다퉈 모여들었고 무기생산체제는 매우 진보하여 당시 최고의 기술수준에 도달하였다(유동환, 2002, 239-240쪽). 이 일화는 국방무기개발은 군 통수권자 및 정치·군사지도자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요구됨을 뜻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와 비추어보면 현대의 관리는 매우 진보하고 변화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과 심리는 변하지 않았기에 리더십 이론과 기법은 변화가 있었을지라도 “하고 싶도록 해야 한다.”는 리더십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징비록』과 『난중일기』라는 고전(古典)에 나타난 유성룡과 이순신의 무기개발리더십을 현대에 적용하더라도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된다.
3) 『징비록』과 『난중일기』에 나타난 국방무기개발 리더십
① 유성룡의 『징비록』
『징비록』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시작에서 결과, 원인부터 책임까지 기록한 책이다. 유성룡은 영의정이라는 수상, 도체찰사라는 총사령관, 훈련도감 도제조 직책을 수행하면서 보고 느끼고 체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자신에게는 반성의 의미를, 후세에게는 경계의 의미를 담아 회고록을 썼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전쟁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필을 시작하여 1604년 완성하였다. ‘징비’는 『시경』 소비편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으며 국보 제 132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유성룡은 문관이었지만 국방무기개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징비록』에서도 거북선·화차·비격진천뢰 등에 대하여 제작자·적용전투·성능·일본군의 반응까지 세세한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다른 자료들과 차별화된다(장준호, 2016, 158쪽).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징비록』에서 국방무기개발 리더십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 전라 좌수사 발탁) 조정에서 그를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급제한 지 10여년이 되도록 뽑혀 쓰이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즈음 왜국의 움직임이 날로 급박해져 가자, 임금께서는 비변사6) 신료들에게 각자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순신을 천거하여 드디어 정읍현감에서 수사로 발탁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그의 갑작스런 승진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도 있었다(유성룡, 1604/2007, 40쪽).
(거북선 제작) 이순신은 미리부터 거북선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거북선은 판자로 배위를 둥그렇게 덮어 모양이 마치 거북과 같았고, 전투를 하는 병사와 노 젓는 인부까지 모두 그 안에 있게 되어 있었다. 배의 앞과 뒤, 양 옆에는 많은 화포를 싣게 되어 있으며, 가로세로로 통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베 짜는 북처럼 사람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적선을 만나면 연달아 화포를 쏘아 부수었다(유성룡, 1604/2007, 136쪽).
(비격진천뢰활용) 비격진천뢰는 이전에 없던 무기인데 군기시7)의 화포장 이장손이란 이가 창안해 낸 것이다. 진천뢰를 대완구에 넣고 발사하면 5,6백보를 너끈히 날아가는데, 땅에 떨어져 있다가 안에서 저절로 불이 일어 폭발하도록 되어 있는 무기다. 적은 아군의 무기 중 이것을 가장 두려워했다(유성룡, 1604/2007, 154쪽).
(행주대첩, 화차활용) 권율은 광주 목사로 있다가 이광의 후임으로 순찰사가 되어서 군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이광 등이 들판에서 싸우다 패전한 사실에서 교훈을 얻어 수원에 이르러 독산(禿山)산성을 거점으로 하여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적은 감히 침공하지 못했다. 그런 중에 명나라 구원병이 곧 서울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옮겨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이 서울에서 대거 출동하여 공격해 왔다. 군사들은 술렁거리며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강물이 뒤를 막고 있어 달아날 길이 없었다. 군사들은 하는 수 없이 도로 성안으로 들어와 힘껏 싸워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적은 3진으로 나누어 교대로 공격했지만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마침 날이 저물어 적은 도로 서울로 들어갔다. 권율은 군사들을 시켜 적의 시체를 거두어 사지를 찢어 여기저기 나뭇가지에다 걸게 하여 분풀이를 했다(유성룡, 1604/2007, 184쪽).
② 이순신의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592년(임진년) 1월 1일부터 1598년(무술년) 11월 17일까지 기록한 일기이다(노승석, 2014, 19-20쪽). 『난중일기』라는 명칭은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에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면서 유득공이 명명하였다. 일기를 작성한 연도를 따서 임진일기(1592), 계사일기(1593), 갑오일기(1594), 병신일기(1596), 정유일기(1597), 무술일기(1598)라고 명명했다. 을미일기(1595)는 이순신의 친필 초고본은 전해지지 않고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전서본만 전해진다. 『임진장초』, 『서간첩』과 더불어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거북선, 조총 등 무기개발관련기록을 남겼다. 특히, 거북선의 경우 세세한 작업내용과 감독·시험평가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국방무기개발 리더십과 관련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거북선 범포) 맑았으나 큰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칠 범포(帆布, 돛배) 2필을 받았다. 낮이 되어 활을 쏘았다(이순신, 2000, 18쪽).
- 임진년 2월 8일 -
(전선과 무기점검) 맑음. 아침에 모든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보니 모두 새로 만든 것이요, 무기도 상당히 완비되었다(이순신, 1592/2000, 20쪽).
- 임진년 2월 20일 -
(전선소 점검) 아침에 공무를 마친 뒤에 녹도로 갔다. 황숙도도 역시 동행했다. 먼저 흥양 전선소에 가서 배와 기구들을 친히 점검하고 계속하여 녹도로 가서 새로 쌓은 봉우리 위의 문루위로 올라가서 보니 경치의 아름다운 것이 이 고을 안에서는 가장 좋았다(이순신, 1592/2000, 21쪽).
- 임진년 2월 22일 -
(전선 점검) 가랑비가 온 산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별하기 어렵다. 비를 무릅쓰고 떠나서 마북산 밑 사량에 이르러서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하여 사도에 도착하니 흥양 원도 역시 이미 와 있다. 전선을 점고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 거기서 잤다(이순신, 1592/2000, 22쪽).
- 임진년 2월 24일 -
(증손전수방략)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 녂에 서울에 갔던 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유성룡)이 보내는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가지고 왔다. 책을 보니 해전, 육전, 화공전 등 여러 가지에 대한 것을 일일이 설명했는데 실로 만고의 기서(奇書)이다(이순신, 1592/2000, 23-24쪽).
- 임진년 3월 5일 -
(경강의 배 점검) 맑음. 식후에 배있는 곳으로 나가 경강을 점검하고 다시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는데 때마침 동풍이 세게 불고 격군도 없어서 도로 돌아왔다.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다음에 활 10순을 쏘았다(이순신, 1592/2000, 24쪽).
- 임진년 3월 12일 -
(거북선 대포시험) 맑고 바람도 없음.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면서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이순신, 1592/2000, 26쪽).
- 임진년 3월 27일 -
(베돛 제작)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갬. 공부가 끝난 뒤에 활을 쏘았다. 순찰사의 편지와 별록을 군관 남한이 가지고 왔다. 처음으로 베를 가지고 돛을 만들었다(이순신, 1592/2000, 27쪽).
- 임진년 4월 11일 -
(거북선 대포시험) 맑음. 식사 후 거북선의 지자·현자 포를 쏘아보았다. 순찰사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에 나가 활 10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가면서 노대석을 살펴보았다(이순신, 1592/2000, 27-28쪽).
- 임진년 4월 12일 -
(정철총통 비변사 송부) 맑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이순신, 1593/2000, 58쪽).
- 계사년 5월 12일 -
(전선 건조) 맑음,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자귀질을 시작했다. 목수가 214명이요. 본영에서 온 사람 72명, 방답에서 온 사람 35명, 사도에서 온 사람 25명, 녹도에서 온 사람 15명, 발포에서 온 사람 15명, 여도에서 온 사람 15명, 순천에서 온 사람 10명, 낙안에서 온 사람 5명, 흥양·보성에서 온 사람 각각 10명이었다(이순신, 1593/2000, 70쪽).
- 계사년 6월 22일 -
③ 기타 문헌
(칠천량 패배 후 함선 수습) 이순신이 보성에 이르자 따라붙은 장사가 백여 명이었다. 이때 수군은 막 패하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배설만이 남은 배 10여척을 이끌고 도망쳐 호남의 바라 한 모퉁이에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이 배설을 만나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배설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고 말하고는 이순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할 것을 권하였다. 이순신이 응하지 않자 배설이 자기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다(노승석, 2014, 146쪽).
- 윤휴, <충무공 유사> -
(정철총통 제조) 해군의 총통은 길고 총구명이 깊어서 포력이 맹렬한 반면 우리나라의 승자나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성능이 왜군의 조총만 못하므로 새로 만들고자하니 훈련원주무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어 낙안수군 이필종, 순천산비 안성 등을 데리고 정철을 제조한 방법이 매우 정교했습니다. 정철총통 5자루를 보내오니 각도와 관아에 제고하기를 명하십시오(노승석, 2014, 215쪽).
- 임진장초, <봉진화포장> -
④ 『징비록』, 『난중일기』가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에 주는 함의
위의 『징비록』과 『난중일기』기록은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함의를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유성룡은 정치·군사지도자로서 무기개발에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순신과 같은 인재를 적극 발굴, 추천하였으며 무기개발을 직접 담당하는 ‘도제조’ 직책을 맡아 거북선, 비격진천뢰, 화차 등 무기개발에 적극적이었다. 둘째, 이순신과 권율은 무기개발의 책임을 맡아 이를 개발-시험-적용하는 등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나아가 나대용·변이중·이장손 등이 실무를 맡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야전사령관이자 무기개발책임자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문무합의체였던 중앙기관인 비변사에 제조한 ‘정철총통’을 보내는 등 긴밀히 협조하였다. 이로서 당시 비변사가 무기개발의 중앙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성룡, 이순신과 같은 인재들이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고 이는 무기개발로 이어져 각종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대 비극의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의 승패요인은 전략전술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군사사적 측면에서 보면 초기 지상전투에서 연전연패했던 주요원인은 일본군의 ‘조총’에 대응할 무기 및 전술의 부재에서 기인하였다(양영조, 백기인, 심헌용, 이상호, 전호수, 2015, 332쪽). 해상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천자총통 등 대형 화포체계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은 화기 등 무기체계 및 전술의 비교우위에 따라 전쟁의 양상과 승패가 뒤바뀔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양영조 외, 2015, 332쪽). 이러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7년 전쟁의 극복요인은 우수한 무기개발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징비록』과 『난중일기』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유성룡·이순신의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보기로 한다.
① 최고통수권자 및 정치·군사지도자로서 관심과 배려
유성룡은 조선의 최고통수권자인 선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국방무기개발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유성룡은 역적으로 몰린 정여립과의 친분으로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선조는 유성룡의 소명을 믿고 신뢰를 표시하면서(김석근, 2004, 103쪽) 그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고 독려하였다.
이와 같이 유성룡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부침은 있었지만 영의정으로서 수상, 도체찰사로서 총사령관, 훈련도감 도제조 등의 직책을 선조의 신뢰 하에 다음과 같이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첫째, 그의 관심과 배려는 이순신·권율과 같은 장수이자 연구기관 CEO를 추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성룡은 당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임을 깊이 인식하고 선조에게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에 따라 비변사 당상(堂上)8)은 각기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다(제장명, 2008, 146-147쪽). 이에 유성룡은 인재등용원칙을 구체화하여 10조목을 선조에게 품의하였다. 제1원칙은 “재치와 식견과 사려가 깊고 병법을 훤히 알아서 장수의 책임을 감당할 만 한 자”이었다(제장명, 2008, 147쪽). 둘째, 유성룡은 천거에만 그치지 않고 산전·수전·화공전에 대한 전략전술을 다룬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순신장군에게 보내주는 등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셋째, 유성룡은 국방무기개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1593년에는 직접 도제조가 되어 조총과 화약제조를 담당하였고, 1595년에는 제철장(製鐵場)을 설치하여 대포와 조총을 제조하도록 하였다(이덕일, 2007, 411-412쪽). 나아가 조총의 가치에 대하여 자신의 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기효신서』(명나라 군사서적)에서 말하기를 조총은 명중하는 묘가 활이나 화살보다 다섯 배나 되고 창 보다 열배나 된다.” “조총은 한 달 동안 뚫어야 상품이 되며 이 조총 한 자루는 한 사람이 한 달의 힘을 쓴 뒤라야 사용할 만하니 만들기 어려워서 귀한 것이 이와 같다.” 또한 류성룡은 화차에 대해 전술적 효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화차의 개수 및 제작을 적극 주장하였다(백기인, 2016, 275쪽). 류성룡의 주장에 따라 1592년 화차개량이 시도되었다. 문관인 류성룡이 국방무기개발에 이토록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문무겸전의 탁월한 전략가였기에 가능하였으리라 판단된다.
② 연구기관 CEO 및 연구원의 적합한 인재등용
전라좌수사·3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전라관찰사·도원수 권율은 이러한 관심과 배려를 바탕으로 전선 및 거북선건조, 조총·화차개발 및 적용 등 각종 국방무기개발을 총괄하는 책임자 역할을 했다. 즉 오늘날 국방과학연구소의 CEO역할을 한 것이다. 이순신은 거북선의 경우 세세한 작업내용과 감독·시험평가의 과정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거북선은 나대용이 최고의 실무책임자이거나 실무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대용(1556~1612년, 전남나주 출생)은 거북선 연구로 1583년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거북선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즉, 거북선에 미친 사람이었다. 1591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종제 나치용과 함께 거북선에 대한 연구결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나의 동지를 얻으니 이 이상 기쁠 수가 없다.”면서 조선담당 장교로 임명하여 거북선 제작에 착수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체부분을 높게 개량한 뒤 지붕을 덮은 돌격선 이었다. 거북선의 기초가 된 판옥선은 1555년(명종10) 바닥이 평평한 선체위에 2층 구조로 만든 전함이다. 기동성과 안정성이 좋고 선회능력이 뛰어났으며 화포를 장착하였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시 조선수군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고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크기는 선체 길이 20~30m, 탑승인원은 130명 정도였다(김병륜, 2017, 65쪽). 일본 주력전투함인 세키부네(關船)의 선체길이는 대략 15m 정도였다. 앞이 뾰족하고 선저는 v자형으로 속도가 빨랐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조선함선보다 크기가 작고 화포가 없었기 때문에 참패의 원인이 되었다. 거북선은 개발에 착수한지 1년이 지난 1952년 3월 27일에 완성되어 방포실험을 마친 후 사천·당포·당항포·한산도·안골포해전 등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 함대의 전열을 흩트리는데 사용되었으며 조선전선의 상징이 되었다(제장명, 2008, 100쪽). 나대용은 한때 모함으로 파직 당하였을 때에도 오로지 거북선 연구에만 몰두하였고, 이순신이 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동지들과 옥문 밖에서 통곡하며 무고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제장명, 2008, 101쪽).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은 체암공(遞菴公, 나대용의 호)이 없었던들 그와 같은 무공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나대용은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큰 이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제장명, 2008, 101쪽).
정철총통(正鐵鳥銃)은 정사준이 실무책임자인 동시에 실무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사준(1553~몰년미상, 전남 순천)은 1584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훈련주부로서 이순신휘하에서 일본군의 조총을 참고로 정철총통을 개발하였다. 일본군 조총은 1453년 포르투칼인으로부터 처음 조총제작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신이 길어 발사과정에서 총신이 움직이지 않아 명중률이 높다. 사거리는 50m이내이다. 조선은 1589년 황윤길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마도주로부터 조총을 선물로 받아왔으나 조정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 조총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이순신이 훈련주부 정사준을 시켜 조총을 만들도록 하였다.
“신이 여러 번 큰 전투를 겪어 왜군의 소총을 얻은 것이 많사온데,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법을 실험한바 총신이 길기 때문에 총구멍이 깊고, 또 깊기 때문에 위력이 강하여 맞기만 하면 파손이 되는데(제장명, 2008, 106쪽)........” 그리고 정철조총을 만들어 당시 국방정책을 논의하는 최고의 기구인 비변사에 보내기도 하였다(이순신, 2000, 58쪽). 정철조총은 정철이라는 금속으로 만들었기에 그 이름을 불렀으며 정사준은 조총을 만든 공로로 포상을 받았고 7년 전쟁 종전 후 전라좌수영에 이순신 타루비(墮淚碑)9)를 세웠으며 결성(충남 홍성소재) 현감을 지냈다(제장명, 2008, 108쪽).
전라도 순찰사 권율 휘하 소모사(召募使)10)변이중도 마찬가지였다. 즉, 오늘날 최고의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이었던 것이다. 변이중(1546~1611년, 전남 장성)은 157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말에 제작한 화차는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40량을 운용하여 일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를 이끌어냈다(조병로, 남상호, 박재광, 2012, 425쪽). 변이중의 화차는 문종 화차를 개량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조병로 외, 2012, 426쪽).
- 가. 구조는 기존의 원거리 발사용 화차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크게 방형의 방호벽과 이동형 수례, 내부에 장착된 화기로 구성되었다.
- 나. 화차운용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형구조의 방호벽을 형성하여 병사(2~3)명들이 내부에서 보호된 상태에서 근접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 다. 화차에 장착된 화기는 기존 화기 중에서 가장 성능이 우수한 승자총통 40문이 장착되었고, 전술적 운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면과 좌우 측면 세 방향으로 동시 내지는 순차적인 사격이 가능하다.
- 라. 화차 이동을 위한 수레는 전시상황을 고려하여 구하기 쉬운 일반수레를 이용하여 차체가 바퀴축 위에 바로 형성되었고, 방호벽의 폭이 수레의 차체 폭보다 넓다. 변이중 화차는 유성룡 화차11)보다 우거를 활용하고 훨씬 많은 화기와 총통을 배치하여 단기간에 300량 가량을 제작함으로써 전투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백기인, 2016, 276쪽).
조선이 연전연승을 구가하였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의 하나가 대형 화포였다(오경후, 2011, 108쪽). 즉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고려 말부터 개량해온 천·지·현·황·별황자 총통 등의 대형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다(백기인, 2016, 421쪽). 이들 화포는 대장군전·장군전·차대전·피령목전·피령차중전 등 대형화살을 사용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새알 같은 구슬인 조란탄(鳥卵彈)을 발사하여 산탄효과를 거두었다(백기인, 2016, 421쪽). 당시 일본수군은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배의 현을 붙이고 백병전을 위주로 전술을 편 반면, 조선수군은 대형선박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로를 바탕으로 함포전술을 구사하여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백기인, 2016, 422쪽). 특히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먼저 거북선으로 적진에 돌입하고 모든 전선이 각기 지·현·승 자 등 각종의 총통과 화전을 발사하여 일본수군을 궤멸시켰다.
불랑기포(佛狼機砲)는 1593년 1월 초 평양성 전투에서 처음 명군이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당제자모포(唐制子母砲)’라고 불렸으며 1595년 10월 비변사(備邊司)가 해상통로를 차단할 좋은 계책으로 대포와 불랑기 등의 화포를 거북선에 많이 장착할 것을 건의(백기인, 2016, 428쪽)하는 등 불랑기는 계속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1597년 5월에 유성룡이 강탄(江灘, 임진강 상류)수비에 쓸 화약과 화기가 부족하니 군기시(軍器寺)에 소장되어있는 불랑기 등을 방어사에게 내려 보낼 것을 건의하는 것으로 보아 정유재란에는 수성용으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백기인, 2016, 429쪽). 호준포(虎蹲砲)는 평양성 전투에서 명 군사들이 사용 후 조선은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1595년 6월 황해도 은율에서 호준포 2점이 제작되었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백기인, 2016, 430쪽).
③ 관련기관 유기적 협력을 통한 개발여건조성
당시 국방정책을 논의하는 문무회의체기구인 비변사(김병륜, 2017, 70쪽)와 사간원(司諫院) 등 관련기관은 이순신, 권율과 같은 인재발굴에 적극 나서는 등 무기개발에 있어 협력자 또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특히 비변사에서는 이여송의 명군이 평양에 오기 전 명예직의 풍원부원군으로 보급과 외교의 책임을 맡고 있던 류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토록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고, 사간원에서는 전라좌수사로 추천된 원균이 전임근무지 평가가 승진규정에 미달되고 무략이 없다는 이유로 합당한 인물로 교체할 것을 주창하여 이순신이 부임하게 되었다. 또한 비변사에서는 노획한 왜군의 조총을 조선군에 적극 도입하여 그 사용법을 교육, 훈련시켜야 한다는 주장(김석근, 2004, 97쪽)함과 아울러 각종 화포의 정비와 제조를 건의하였다(조병로 외, 2012, 429쪽)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제안에 머무르지 않고 무기제조 부서였던 군기시의 주부 이자해 등을 통하여 구체화되었으며 이후 육전과 해전에서 커다란 성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김석근, 2004, 97쪽).
3. 한국의 현대 국방무기개발 리더십 분석
앞서 살펴본 유성룡, 이순신의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은 우리의 국방무기개발이 관리(Management)에서 리더십(Leadership)으로 옮겨가야 함을 설명해주고 있다. 한 마디로 무기개발은 아랫사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최고통수권자나 정치·군사지도자들이 직접 챙겨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현대 무기개발리더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군 통수권자 및 정치·군사지도자의 관심과 배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관심과 배려는 연구원들의 사기를 높여 줄 뿐 아니라 개발의욕을 북돋아준다. 관심과 배려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으나 대통령의 현장방문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북 핵·미사일로 인한 안보위협을 고려하면 전략무기(미사일)개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연구개발예산에 대한 배려가 보다 절실히 요청된다.
먼저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이래 역대대통령 방문현황과 내용을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10명의 역대 대통령 중 7명이 방문했고, 3명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이 12회로 가장 많았고, 박근혜 대통령은 2회, 나머지 대통령은 1회씩 방문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 설립이후 수시로 방문하였고, 방문시 종종 구내식당에서 연구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1976년에는 ‘國防의 礎石’이라는 친필휘호를 내렸다(신인 호, 2015, 35-46쪽).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의 국군보안사령부가 국방과학연구소에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보고를 받고, 1979년 12월 8일 ADD를 방문했다. 최대통령은 혼란에 빠져 있던 연구원들을 진정시켰으나 이런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신군부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던 핵무기 관련 자료와 장비를 모두 가져가 폐기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 2006).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는 미국의 한국 미사일 개발저지 방침에 따라 연구원을 대량 해고하는 등 미사일 개발정책을 포기하였으나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로 반전을 맞았다. 백곰-2(NHK-2)가 현무사업으로 재추진되었고(안동만 외, 2016, 351-353쪽), 전 대통령은 1985년 9월 21일 ‘현무’ 유도탄 시험비행 참관을 위하여 안흥시험장을 방문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6월 30일 국방과학연구소 본소를 방문했다. 노대통령은 세계적 수준의 첨단 국내 IT기술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국방부문의 연구개발 성과가 민간에 파급될 수 있도록 국가기술혁신체제 차원에서 연계강화를 모색하라고 주문했다. 아울러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놓아 수출도 늘리고 국민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4월 19일 국방과학연구소(ADD) 본소를 방문했다. 이대통령은 “적정한 예산을 유지하고 어떤 경우에는 증액을 해서라도 첨단 무기체계의 연구 개발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연구원들에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고, 분단돼 있으면서 지구상에 가장 호전적인 세력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분이 하는 일은 자주국방이라는 중요한 목표이자 생존을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여러분이 평화를 위해 만드는 것”이라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성능의 무기체계가 필요하지만 그 목적은 파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중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북한에 ‘도발하면 몇 배의 대응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고 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과 북한을 압도하는 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5월 22일 국방과학연구소(ADD) 본소를 방문하였다. 박대통령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에 큰 관심을 보였고 방명록에는 ‘자주국방, 경제발전의 산실’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어 2015년 6월 3일 안흥시험장을 방문하여 2012년 변경된 미사일 지침에 따라 사거리를 늘린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하였다(안동만 외, 2016, 382쪽).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23일 안흥시험장을 방문하여 탄도미사일 현무2의 시험발사를 참관했다. 참관 후 “우리 군 미사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국민들이 매우 궁금해 하고 대통령인 나도 궁금했는데 직접 능력을 확인하니 든든함을 느낀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참으로 자랑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나는 대화주의자이지만 대화도 강한 국방력이 있을 때 가능하며 포용정책도 우리가 북한을 압도할 안보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면서 “이런 의미에서 나는 국방과학연구소가 연구·개발하는 무기 체계는 파괴·살상이 아니라 대화와 평화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적극 뒷받침 하겠다(중앙일보, 2017, 6, 24).”고 약속하고 방명록에 ‘우리의 국방, 우리과학의 힘으로’라는 글을 남겼다.
역대 대통령의 전략무기(미사일)개발에 대한 관심은 ‘사거리와 탄두중량’에 잘 나타나 있다. 미사일 사거리와 중량문제를 가지고 한국과 미국이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최초 미사일인 백곰의 공개발사(1978.9.26)였다. 이후 총 4차례에 걸쳐 협상을 시도하였고 3차례 걸쳐 타결되었다. 이는 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미사일 개발기관인 국방과학연구소의 공동노력의 결과로 ‘한미미사일협정(한미미사일지침)’에 명시되어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미국은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를 꺾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양국은 사거리 180Km, 탄두중량 500Kg 이내로 제한한다는 약속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쌍방의 협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문제로 인식되어 통상 ‘한미미사일협정’ 또는 ‘한미미사일지침’이라고 부른다(안동만 외, 2016, 360-366쪽). 김영삼 정부시절인 1996년 ‘한미미사일협정’에 따라 미국이 제한하고 있는 180km/500kg에 대하여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야하기 위해 풀어야한다는 우리의 입장을 주장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미사일협정’에 대하여 보고를 받고, 방미 중 우리도 500km급 미사일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한미 협상 끝에 2001년 300km/500kg 능력 확보에 대하여 미국이 양해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각국과 기술협력이 가능하도록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는 문제도 타결되어 2001년 3월에 회원국이 되었다(안동만 외, 364-365쪽).
이명박 대통령은 다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미사일능력향상 조치를 미국 측에 제기하였다. 협상 끝에 2012년 10월 탄두중량은 500kg 그대로 두되 사거리는 800km까지 늘리기로 합의했다. 순항미사일과 같은 무인기의 경우 항속거리 300km이내에서는 탑재중량의 제한을 두지 않고 300km 이상일 경우에만 탑재중량을 2.5톤 이내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비로서 우리 군이 한반도 전역에서 제한 없이 미사일 작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안동만 외, 2016, 365-366쪽).
국방연구개발은 예산확보와 직결되며 대통령의 관심은 결정적 도움이 된다. 최근 년 간 정부 R&D예산은 약 20조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방 R&D예산은 약 2조원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2016년의 경우 정부 R&D 대비 국방 R&D 비율은 13.4%이다. 이는 방위력개선예산의 하부 구성요소로서 전체 국방비의 6.6%를 차지하고 있다(하태정, 이주호, 2017, 169쪽). 물론 적은 예산은 아니나 북 핵·미사일 위협을 고려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미국의 경우 정부 R&D예산의 약 50%를 국방R&D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1,2차 걸프전 기간 중에 국방R&D 예산 비중은 60%내외로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하태정, 이주호, 2017, 169쪽). 우리도 북 핵·미사일 위협을 상쇄할 수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국방 R&D예산의 획기적 증액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자체 기술개발도 단기간에 이루고, 선진국 기술의 과감한 도입도 필요하다.
2) 국방과학연구소CEO 및 연구원의 적합한 인재등용
국방과학연구소의 CEO는 연구개발·조직 관리와 함께 연구소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원 역시 연구개발에 있어 최우선을 두어야 할 인적자원이다. 최적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마음을 가져야한다. 나아가 연구원 처우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 CEO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인재로 국내에서 어렵다면 해외에 나가서라도 찾아야한다. 그러나 정권교체기 때 일부에서는 이를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우하는 자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1970년 창설 이래 18명의 리더십을 경험하였다. 출신별로는 군 출신 12명, 과학자 출신 6명의 비율을 보이고 있으며 창설초기와 전반기에는 군 출신이 많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자 출신이 임명되었다. 재임기간은 최소 1년에서 최대 8년 5개월로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추진해야하는 과학기술의 특성을 간과한 인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을 표로 살펴보면 <표 6>과 같다.
역대 ADD소장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8년 5개월 동안 재임한 2·3·4대 심문택 소장이다. 심 소장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로 KIST소장 서리로 있다가 ADD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재임 중 ADD조직을 민간연구원 중심으로 바꾸었고, 유능한 과학자를 영입하여 연구역량을 강화하였다. 2·3차 번개사업을 추진하였고 율곡계사업과 백곰미사일개발을 이끌었으며 대전기계창, 진해기계창, 안흥시험장 건설 등 굵직한 사업을 마무리했다(안동만 외, 2016, 105쪽). ADD에는 창설 초기에 최우수 인재들이 모였다. 대표적인 인재는 1970년대 ADD 3총사로 불리던 이경서·홍재학·구상회 박사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 지시한 일명 ‘번개 프로제트’를 완수한 과학자들이다. 홍재학 박사는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공군장교 출신이고, 이경서 박사는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연구원출신이며, 구상회 박사는 핵물리학을 전공한 해군장교 출신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군과 민간인 출신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일반 연구원들과는 달리 육상·해상·공중 등 각종 악조건에서 근무해야한다. 때로는 혹한과 무더위 그리고 수중에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처우는 일반연구원들에 비하여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특히 임금수준을 보면 1970~80년대는 타 기관대비 30%정도 높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원들에게 국내 최고 수준의 처우를 보장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8년 5개월에 걸쳐 임무를 수행해 오던 과학자출신의 심문택 국방과학연구소장을 1980년 7월 21일 전격 해임하였다. 연구소 정원도 2,598명에서 1,759명으로 감축하였고, 미사일 개발관련 중견 간부를 비롯한 연구소원 839명을 대거 강제 퇴직시켰다. 숙청에 가까운 대량해고였다(안동만 외, 2016, 349-351쪽).
그런 가운데 2000년 대 들어 임금수준이 점점 낮아져 2006년에는 정부출연 연구기관 24개중 21위에 머물렀다(길병옥, 최기출, 신종태, 이영, 2007, 9쪽). 최근 들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 전수조사결과 2017년 성과급이 반영된 결산기준 정규직 평균이 9,470만원으로 정부출연 연구기관 40개중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전기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에 이어 7위로 상위권에 진입했다. 그러나 허름한 군 막사보다 더 열악한 외딴섬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노무자와 같은 궂은일을 해야 하는 시험장 환경 등 근무 악조건을 고려할 때 보다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과학연구소는 창설 이래 2015년 기준 171종의 무기개발과 함께 국방 R&D분야의 지식창출은 물론 각종 미사일 등 첨단무기 개발, 187조원의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등 괄목만한 성과를 이루어왔다.
3) 관련기관의 유기적 협력을 통한 개발여건조성
첨단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국가 가용자원 뿐 아니라 과학기술 등 총 역량을 집중하여야 가능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에게 국방무기개발의 컨트롤타워를 맡겼다. 청와대에 무기개발을 총괄하는 부서를 두어 관련기관의 협력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국가안보실, 국가안보보좌관실 등 많은 안보관련 부서를 두었음에도 청와대에 국방무기개발을 총괄하는 부서를 둔 정부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표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방부에도 과학보좌관을 둔 적이 있었으나 극히 한정된 기간뿐이었다. 이는 많은 역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나 국방장관들이 국방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겉으로 들어나는 국방정책과 전략에만 관심을 갖고, 보이지 않게 실질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국방무기개발과 국방과학기술에는 소홀히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에 전문가들은 현재 방위사업청 주도의 획득위주 연구개발체제가 작전계획·군 운용·국내외 기술수준 등을 통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국방부 중심의 일원화된 국방연구개발체제로 전환(하태정, 이주호, 2017, 187쪽)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국방무기개발의 컨트롤 타워를 국방부로 일원화하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기획득체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연구개발에 있어 정책, 기술기획 및 민군협업을 위한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가연구개발 자원과 역량을 총결집하여 무기체계 개발사업의 신속성 및 효율성제고와 함께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12)확보 등의 성과를 창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요-획득-운영업무의 총괄, 조정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제2국방차관제 도입을 고려해볼만하다. 아울러 국방과학연구소를 컨트롤 타워 산하에 두어 안보기술 싱크 탱크(Think-Tank), 북 핵 및 미사일 대응 전략무기와 신개념무기체계 개발, 민군 기술협력 허브역할 수행 등 국가차원의 안보자산으로 활용도와 가치를 제고하는 것이 요구된다.
4. 결 론
본 연구는 북 핵 및 미사일 위협을 맞아 대응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을 제고하기 위하여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거북선·비격진천뢰·화차 등 과학기술혁신으로 국난을 극복한 기록이 남아있는 『징비록』, 『난중일기』에서 나타난 유성룡과 이순신의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을 찾아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하고자하였다.
연구결과 무기개발은 제도·시스템 등 관리에 앞서 ① 현장방문, 전략무기 및 연구개발예산에 대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비롯 정치·군사지도자의 관심과 배려 ② 정권에 관계없이 탁월한 인재 발굴과 연구원 처우개선을 통한 국방무기연구개발 기관 CEO 및 연구원들의 적합한 인재등용 ③ 청와대 및 국방부에 국방무기개발 컨트롤 타워설치로 관련기관의 유기적 협력을 통한 개발여건조성 등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을 제고할 때만이 기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더십과 관리가 결합될 때 성과는 배가된다.”는 고전이론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국방무기개발에 있어 리더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방무기개발은 다른 연구와는 달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해야할 뿐 아니라 지상·공중·해상 등 각종 자연의 악조건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의지와 창조의 산물이기에 애국심과 함께 무기를 개발하고 싶도록 하는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연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정책적 함의를 제공한다. 첫째,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및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국방무기개발에 있어 ‘무기를 개발하도록’하는 관리도 중요하나 ‘무기를 개발하고 싶도록’하는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및 정치·군사지도자들은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와 함께 국민생명보호라는 안보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국방무기개발을 아랫사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현장방문 등 관심과 배려로 리더십을 발휘해야한다. 셋째, 3축 체계(Kill Chain, KAMD: Korea Air and Missile Defense,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 KMPR: 대량응징보복, Korea Massive Punishment and Retaliation)를 비롯 전략무기에 대해서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관여해야한다. 넷째, 북 핵·미사일 위협을 상쇄할 수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국방 R&D예산의 획기적인 증액이 필요하다. 다섯째, 국방과학연구소 CEO와 연구원은 ‘대우하는 자리’가 아니라 ‘일하는 자리’임을 유념하여 정권에 관계없이 적합한 인재등용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한다. 여섯째, 악조건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의 처우개선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일곱째, 관련기관이 현행 업무수행으로 국가안보라는 목표를 잃지 않도록 유기적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무기개발 컨트롤 타워를 청와대 및 국방부에 설치하여야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나는 대화주의자이지만 대화도 강한 국방력이 있을 때 가능하며 포용정책도 우리가 북한을 압도할 안보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정부가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국방무기개발에 대한 조용한 혁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적기(適期)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대화도 강한 국방력이 있을 때 가능하며, 포용정책도 북한을 압도할 안보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라는 말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이다.
손자(孫子)는 『손자병법』에서 “적이 오지 않기를 믿지 말고, 대비하고 기다리는 나를 믿으라(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고 했다. 이는 한반도의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태세를 갖추는 것만이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국방무기개발 리더십이라는 제한된 변수만으로 연구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확보하기에 무리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리더십 뿐 아니라 관리 등 변수의 다양성과 연구범위의 확대로 본 연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성신여자대학교 학술지원으로 진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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