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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 ]
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35, No. 3, pp.181-211
ISSN: 1976-2984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Jul 2024
Received 01 May 2024 Revised 01 Jul 2024 Accepted 15 Jul 2024
DOI: https://doi.org/10.16881/jss.2024.07.35.3.181

약자를 위한 정의론의 재구성: 부정의에 관한 규범적 · 정치적 분석과 실천적 대안의 모색

김욱진 ; 이종화 ; 안승재 ; 함선유 ; 문영임
서울시립대학교
강남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장애인재단
Reconstructing a Theory of Justice for the Vulnerable: Normative and Political Analysis of Injustice and the Search for Practical Alternatives
Wook-Jin Kim ; Jong Hwa Lee ; Seung Jae An ; Sunyu Ham ; Youngim Moon
University of Seoul
Kangnam University
Chungnam University
KIHASA
KFPD

Correspondence to: 문영임, 한국장애인재단 연구기획팀 책임연구원, 서울시 중구 통일로 86, 207, E-mail : venha@naver.com Contributed by footnote: 김욱진,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제1저자)이종화, 강남대학교 교양교수부 조교수(공동저자)안승재, 충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강사(공동저자)함선유,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공동저자)

초록

본 논문에서는 약자가 경험하는 사회적 배제의 부정의성, 부정의가 시정되지 않는 이유, 시정을 위하여 필요한 변화 노력 등 약자와 관련된 주요 쟁점들을 규범적, 정치적, 실천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투쟁 이론과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분배-인정 이원론에 근거하여 문화적 인정, 경제적 재분배, 참여의 동등성 및 대표성, 사회적 논의 기구의 활성화, 인정 문화 확산, 대안적 사회보장제도 모색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제기된 각 쟁점에 대한 답을 찾았다. 아울러 사회적 배제 해소와 포용적 정의관 재정립을 위하여 필요한 공감과 공존의 가치 확산을 강조하였다. 근래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들이 점증하는 상황에서 본 논문의 논의 결과는 약자를 아우르는 새로운 정의관의 규범적·정치적 틀 마련에 도움을 줄 것이다. 나아가 사각지대 해소, 사회통합 등 약자와 관련된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적, 실천적 기초 정책자료 구축에 기여할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the injustice of social exclusion experienced by the vulnerable, the reasons such injustices remain uncorrected, and the efforts needed for correction, from philosophical, political, and practical perspectives. Specifically, based on Axel Honneth’s theory of recognition struggle and Nancy Fraser’s dual theory of redistribution-recognition, it finds answers to the raised issues centering on cultural recognition, economic redistribution, the equality of participation and representation, the activation of social discourse mechanisms, the spread of a culture of recognition, and the search for alternative social security systems. Additionally, it emphasizes the spreading the values of empathy and coexistence to minimize social exclusion and reestablish an inclusive notion of justice. In the context of the increasing presence of vulnerable individuals in our society, the discussions in this paper are expected to lay the foundation for establishing a normative and political framework for a new concept of justice. Furthermore, Furthermore, it will contribute to establishing scientific and practical foundational data to resolve issues related to the vulnerable, such as eliminating blind spots and promoting social integration.

Keywords:

Welfare for the Vulnerable, Companion for the Vulnerable, Struggle for Recognition, Dual Theory of Redistribution and Recognition

키워드:

약자복지, 약자동행, 인정투쟁, 분배-인정 이원론

1. 들어가는 말

현 정부는 출범 당시 국정과제 중 하나로 ‘약자 복지’를 천명하였다(보건복지부, 2023). 민선 8기 서울시도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철학으로 제시하며 2023년 초 관련 조례를 제정, 공포하였다(서울시, 2023). 약자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차원의 관심이 커지면서 학계에서도 약자 관련 이론 정립과 학술적 탐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근 약자의 개념 정의를 비롯하여 특징과 범주 등 심층 연구와 전문가 의견이 잇따르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김승연, 2023; 최영준, 2023).

이처럼 약자 관련 연구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이슈가 남아있다. 약자는 통상 삶의 제 영역에서 다양한 불이익을 받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비주류로 정의되는데(김태완 외, 2022), 이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배제가 왜 부정의한지, 부정의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왜 문제가 시정되지 않는지, 시정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조치가 필요한지 등 사회 정의에 관한 언급이 근래 약자 담론에서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현 담론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필요성만 당위적 차원에서 강조될 뿐, 그 근거나 이유는 좀처럼 거론되지 않는다(김은희, 2018). 수사를 넘어선, 약자를 위한 분명한 정의관의 부재는 약자와 동행해야 할 까닭을 대중을 상대로 설득하거나 약자 복지를 위한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데 있어 그 효과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현시대 약자는 경제적 궁핍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다차원적 위기를 겪는다. 이들은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와 욕구가 무시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절망을 느낀다(김기덕, 2015). 이와 같은 특수성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인 사회적 약자에 관한 정의관이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는 점, 더더군다나 이것이 우리 정치공동체의 공론장에서 널리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크고 중요한 목적 달성에 있어 문제라고 할 수 있다(김은희, 2018).

약자가 쏟아지는 현시대,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인 약자를 아우르는 포용적 정의관을 분명히 정립하고 공론화하지 않는다면 약자 복지나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정부의 정책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일각의 시선은 계속될 것이다. 약자가 경험하는 사회적 배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에서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각각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각 질문은 우리 사회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던지는 화두이자 사회적 논의의 시발점이 될 핵심 쟁점들이다.

첫째, 약자의 취약성이 야기하는 위기 상황과 그러한 상황의 누적 및 연쇄로 심화하는 사회적 배제가 왜 부정의인가? 둘째, 약자 당사자에게는 부정의로 인식되는 사회적 배제가 왜 많은 경우 주류사회에서는 부정의로 규정되지 않는가? 셋째, 만약 부정의로 규정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본 논문에서는 개인의 존엄성과 정체성 형성을 탐구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투쟁 이론과, 이에 대응하여 분배와 대표성 문제를 제기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분배-인정 이원론에 입각하여 위 세 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구체적으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문화적 인정’과 ‘경제적 재분배’를 중심으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참여의 동등성’과 ‘대표성’을 중심으로 답을 찾는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약자를 위한 정의론의 규범적 틀 마련을 위하여 중요하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의 기구 활성화’, ‘인정 문화 확산’, ‘미래 사회보장제도의 대안 모색’을 중심으로 답을 찾는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약자 보호와 사회적 포용 실현을 위한 실천 방안 및 전략 수립을 위하여 중요하다.


2. 약자에 관한 이론적 고찰

1) 약자의 사전적 정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약자(弱者, the weak, the fragile)는 “힘이나 세력이 약한 사람이나 생물 또는 그러한 집단”을 뜻한다. 이러한 약자의 반대말은 강자로, 이 둘은 상대적 비교 결과를 나타내는 유동적이고 비결정적인 개념 쌍으로 이해할 수 있다(차진아, 2012).

예를 들어 대표적 약자 집단인 여성의 경우 대부분의 상황에서 약자로 간주된다. 이는 전통적인 노동시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비교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여성도 얼마든지 강자로 간주될 수 있다. 가령 비교 대상이 여성은 본토 한국인, 남성은 이주노동자이고 비교 상황은 업무수행에 있어 완력이 중요 고려 사항이 아닌 서비스업이라면, 통념과 달리 여성은 강자, 남성은 약자가 될 수 있다. 이 간단한 예는 강함과 약함은 상대적이며, 다양한 인자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결정되는 유동적, 잠정적 사항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누군가가 약자인지 아닌지를 보다 명확히 가늠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판단과 평가의 기준이 요구된다(차진아, 2012).

다양한 기준이 활용될 수 있는데, 사회과학계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사회적’이라는 기준이다. 연구자는 이 수식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주목하는 대상, 즉 약자가 물리적, 생물학적 관점이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불이익을 받는 공동체 구성원임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박인권, 2018).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 일부 계층은 어떤 내적 취약성으로 인해 다른 이보다 불리한 상황에 놓이는데, 이와 같은 불리함은 인간 사회의 필수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혹은 불가피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의해 결정되어 부과된 사회구성물임을 사회적 약자라는 용어 사용을 통해 강조할 수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사회적 약자에 관한 용어 정의는 약자 개념에 내재한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사전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the vulnerable)는 “신체 또는 인지 기능이 다른 사람보다 약한 사람을 포함하여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일반 주류 구성원들에게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차별을 받거나 받는다고 느끼는 집단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규정된다. 이러한 용어 정의는 약자가 단순히 힘 또는 세력 차이를 나타내는 것과 대비되어, 사회적 약자는 특정 사회 계층이 겪는 불리함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생활 영역에서의 위기 및 차별을 포함한 배제 등 각종 부조리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또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결정되어 나타난 관계적 결과, 즉 사회구성물임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2) 약자의 발생 과정

한 개인이 약자가 되는 과정을 단계별로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김욱진 외, 2024).

첫째, 개인을 둘러싼 거시사회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온다. 이와 관련해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근대 초기의 경우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기계혁명, 즉 1차 산업혁명이다. 1차 산업혁명은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초래하였는데, 특히 임노동에 대한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많은 사람이 노령, 장애, 질병 등의 사유로 일을 못 하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는 경제적 위기 문제를 대두시켰다(임운택, 2020). 물론 일부 계층은 개인의 능력 혹은 가족 자원을 이용해 당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러한 사적 역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인구의 적지 않은 수는 환경변화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극복할 자원을 결여한 상태, 즉 취약성이 극도로 자극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근대 초기를 지나 후기에 접어든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거시환경 변화는 단연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지식정보통신 기술이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의 도래 및 그에 따른 산업구조 재편이다(김치헌, 2019).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경제, 기술 부문에서의 환경변화 외에도, 정치·정책 부문(국제정치정세 불안, 사회보장제도 불신 고조 등), 사회문화 부문(개인주의화, 가족해체, 공동체 약화, 돌봄 부재, 지방소멸 가속화 등), 생태·자연 부문(도심 낙후, 기후 위기 증대 등) 등 다양한 비경제, 비기술 영역에서 사회 변동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정홍헌 외, 2021), 그 결과 수많은 취약 계층이 양산되어 극한 상태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후기 근대사회 거시환경 변화에 따른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부작용에 주목한 울리히 백은 일찍이 그와 같은 해로운 사회적 과정과 결과를 사회적 위험(Risiko)이라 명명하였다(Beck, 1986/2008).

둘째, 거시환경에 변화가 발생하면, 다시 말해 사회적 위험이 가해지면 일부 계층은 사적 역량을 이용해 이를 돌파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균형상태로 회귀하지만, 다른 일부는 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 그대로 내몰린다. 이는 개인의 내적 취약성이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이다.

취약성(vulnerability)은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경험, 상황에 따른 위험 요인을 의미하며, 이에는 인구사회학적 특성(성별, 학력, 종교, 인종, 일인가구 등), 정신건강(불안, 우울 등), 신체 건강(만성질환 등), 언어장벽, 문화적 차이, 과거 경험(학대, 범죄 피해, 차별 등에 따른 트라우마), 개인 성향(완고하거나 극도의 내향 성향 등) 등이 포함된다(Delor & Hubert, 2000). 취약한 개인은 외부 상황 변화를 견디거나 이겨내는 역량이 부족하여 그렇지 않은 자와 비교했을 때 사회적 위험에 직면하여 불리한 위치에 놓이고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거시환경 변화와 개인의 내적 취약성이 정적(+)으로 상호작용하면, 이전에는 문제 되지 않던 개인적 취약 소인이 부정적으로 자극되어 당사자는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거나 결정하지 못할 만큼 나락에 빠진다. 악화의 정도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결과에 따라 또는 기존 제도의 제약 조건에 따라 구체적으로 결정되며, 그 결과로 당사자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사회적 관계 맺음 속에서 열세의 위치에 놓이고 위기 상황에 봉착한다.

근대 초기부터 복지국가 팽창기까지 이 위기는 주로 먹고사는 문제, 즉 생계 곤란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위기로 수렴하였다(최영준, 2023). 그렇지만 최근에는 정치, 사회, 문화, 심리, 정서 등 다양한 영역의 위기로 확장하는 추세이다. 무엇보다, 특정 영역에서의 위기는 다른 영역의 위기로 전이되고, 나아가 시간이 지나면서 복합적, 다단계적 위기로 비화한다(Cuesta, Lopez, & Nino-Zarazua, 2022). 그 결과 당사자는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 삶의 제 영역에서 광범위하고 다차원적인 문제와 욕구 미충족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경험한다(강신욱 외, 2005). 사회적 배제는 위기의 누적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 개인의 자체적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굴레가 되어 해당 개인이 약자의 위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며, 종국적으로는 비주류의 사회통합을 막는 제도적, 구조적 악순환의 원인이 된다(Silver, 2007).

3) 약자의 특성

약자의 특성은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김욱진, 2023).

첫째, 가변성과 유동성이다. 사회는 일종의 유기체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회 변동이 지속하는 한 새로운 사회위험은 중단 없이 출현한다. 새로운 사회위험이 멈추지 않고 출현하면 사회적 과정에서 배제를 경험하는 비주류 역시 그 범주가 계속 바뀌며 끊임없이 양산된다(차진아, 2012). 가변성과 유동성이란 바로 이러한 사회 변동성과 위험 출현의 지속성을 반영한 약자의 개념적 특성 중 하나로, 사회 변동에 따라 약자에 대한 주류사회의 생각과 가치가 계속 바뀐다는 것, 그래서 약자의 범주도 고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하며, 따라서 약자의 범주를 결정하고 최종 목록을 확정 짓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말해준다.

둘째, 개별성과 산재성이다. 약자와 매우 비슷하지만 이론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개념으로 소수자(minority)라는 용어가 있다. 소수자를 불리한 위치에 밀어 넣고 위기를 겪게 하는 위험 소인으로서의 취약성은 인종, 국적, 출신 지역, 종교, 성적 정체성 등 뚜렷이 식별 가능한 신체적 또는 문화적 특성에 기인한다(박경태, 2008; Vieytez, 2016). 가령 대표적 소수자인 흑인은 피부색 때문에, 동성애자는 동성과 나누는 특별한 상호작용 방식 때문에 즉각적으로 식별된다. 이러한 성질은 주류집단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매우 특수한 속성이다. 때문에 소수자는 인구의 일부에서만 예외적으로 발견된다. 또한 소수자는 차별을 받는 이유가 어떤 사회든 어떤 시대든 좀처럼 바뀌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Rogers & Lange, 2013). 가령 유대인은 예로부터 전 세계 어디에서든 차별받아 왔고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소수자는 고유의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진 타인과 유대하고 공감을 느끼는 경향이 강하다(전영평, 2007). 공감은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별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한다는 경험의 공통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면서 강력한 집단의식으로 발전하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 조직의 결성(권익옹호단체 등) 또는 공간적 현시화(엔클레이브, 게토 등)를 촉발한다(김정규, 2017).

차별 경험에 대한 공감과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연대감을 형성하고 이해관계를 조직화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주류사회에 전달하고 관철하기도 하는 소수자와 달리, 약자는 차별받는 이유가 시대나 사회마다 다르다. 맥락에 따라 때로 강자의 위치를 점하기도 한다. 이 같은 특성은 앞서 언급한 여성의 사례뿐 아니라 노인에게서도 발견된다.1) 그뿐만이 아니다. 약자의 취약성은 인구의 극히 일부만이 가진 독특하고 명확히 식별 가능한 신체적, 문화적 특성에만 기인하지 않는다.2) 따라서 소수자와는 달리 약자는 자신이 타인과 공통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어렵고, 연대감을 형성하거나 집단의식을 공유하는 경우가 드물다(윤인진, 송영호, 2018). 부실한 집단의식과 연대감은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조직의 부재, 다수의 공통된 어려움을 하나로 묶어 외부로 표출하는 정치적 소통 및 선전 스피커의 부재를 암시한다. 나아가 어려움에 직면하여 고통을 외적으로 호소하고 집단행동을 통해 시정을 요구하기보다 내적으로 감내하고 비공식 부문의 사적 지지체계 등에 의지해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각자도생의 모습을 견지함을 시사한다(Beck, 1986/2008).

셋째, 무기력과 수동성이다. 약자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사회적 배제를 초래하는 위계적 상호작용 과정과 구조적 모순 속에 갇혀 있다. 즉 배제의 굴레 속에 갇혀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정치적·사회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다.3) 심지어 현실이 부조리하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고통을 유발하는 부조리한 사회적 과정이나 모순을 해결하고 대안을 찾는 데 필요한 공동체 의사 형성 및 결정 과정에 참여를 망설이게 하며, 자기 이익을 표현하거나 보호하는 외부 활동을 꺼리게 하는 수동적 심리 상태를 초래한다(Molden et al., 2009). 나아가 자신의 이익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허위의식과, 주류의 시각에 맞추어 스스로의 표현과 발언을 제한하는 자기검열까지 유도한다(Horton, 2011).

넷째, 다차원성이다. 전통적으로 약자는 경제적 영역에서 배제를 경험하는 사람, 즉 빈민을 중심으로 다소 일차원적으로 이해되고 접근되어 왔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경제적 영역뿐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도 복합적으로 배제를 경험하는 존재로 다차원적으로 이해되고 접근되는 추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차원성이란 약자가 경험하는 문제와 욕구 미충족이 경제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 심리, 정서 등 비경제 영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이들을 극한의 배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Percy-Smith, 2000). 나아가 한 영역에서의 배제는 다른 영역으로 도미노처럼 확산할 수 있고(cascading effect) 각 영역에서의 배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태를 악화할 수 있음(interlocking effect)을 의미한다(Cuesta, Lopez, & Nino-Zarazua, 2022).

다섯째, 비정형성·불가예측성·비결정성이다. 전통적으로 약자를 위협하던 사회적 위험은 주로 실업, 질병, 장애, 노령, 사망 등 잘 알려지고 익숙한 사유로 발생하였다(김태성, 2017). 그렇지만 최근에는 정치·정책, 경제, 사회문화, 기술, 생태·자연 등 거시환경 변화가 유례없이 빠르고 다각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사회적 위험이 이전보다 훨씬 더 비표준화되고 비규격화된 형태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비정형성), 그 성격과 양상을 예측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고(불가예측성), 미래의 방향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여러 가능성과 조건에 의해 제한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과가 불확실하게 되어 약자가 미래에 대비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졌다(비결정성). 이는 후기 근대로 갈수록 사회적 위험의 성격과 양상이 묘연해져 약자에 대한 이해와 정보도 마찬가지로 묘연해졌으며, 바로 이 모호함과 불가지함이 오늘날 약자의 특성 그 자체라는 것을 시사한다(Giddens, 1990/1995).

여섯째, 인정 거부의 경험이다. 사회 변동은 과거부터 쭉 계속됐는데, 최근 수십 년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내용도 급진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미해결 상태의 익숙한 전통적 위험에 더해 미증유의 새로운 사회적 위험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사회 위험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약자, 특히 새롭게 등장하는 약자에 대한 주류사회의 이해도는 매우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들이 경험하는 문제 상황이 낯설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 내몰린 약자들의 미충족 욕구, 심지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주류사회로부터 잘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non-recognition)되거나 오인(mis-recognition), 멸시(disrespect)당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이다(Honneth, 1992/2011). 당사자조차 자신이 약자로서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류사회의 시각, 즉 강자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존재와 욕구를 무시하거나 자기 검열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Horton, 2011). 인정 거부 경험이란 공동체 구성원 일부가 사회적 배제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사회가 이를 부당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저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약자의 범주

전통적으로 사회정책과 사회보장정책에서 약자는 다름 아닌 빈민을 가리켰다(최영준, 2023). 여기서 빈민이란 주지하다시피 실업, 질병, 노령, 장애, 사망과 같이 잘 알려진 위험 사유로 생계를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어려움은 노인, 장애인, 주 부양자를 잃은 부녀자, 미성년 자녀 등에게서 주로 발견되었다(윤인진, 송영호, 2018). 오늘날 우리가 약자라고 말할 때 노인, 장애인, 여성, 아동을 우선 떠올리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배경에 깔려있다. 흥미로운 점은, 복지국가 성립 초기에 정립된 경제적 빈곤 중심의 약자 범주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이룬다는 사실이다(구인회, 2002).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약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따른다. 경제적 곤궁만으로는 부족하며, 여기에 덧붙여 근로 능력의 부재나 현저한 저하를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Katz, 2013). 이는 노인, 장애인, 여성, 아동뿐 아니라 불가피한 질병이나 재해 등으로 인해 근로 능력을 잃었다고 판단된 성인 남성 역시 약자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근로 능력이 없음을 입증한 사람은 성별, 나이, 장애 여부 등과 관계없이 약자로서 정당한 지위를 승인받고 국가로부터 보호와 지원을 받을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요컨대 복지국가는 전통적으로 실업, 질병, 노령, 장애, 사망과 같은 위험 사유를 중심으로 사회정책과 사회보장정책을 설계해 왔다(김태성, 2017).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고 근로 능력을 완전히 또는 일부 상실한 빈민을 핵심 약자층으로 지목하였다. 더불어 정책 설계 시에는 노인, 장애인, 여성, 아동과 같은 경제적으로 불안정성이 높은 복지 수급 집단을 구체적인 개입 대상층으로 규정하고, 주로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 약자 지원 관련 제도를 운용해 왔다(허만형, 2011).

그렇지만 복지국가가 아무런 변화 노력 없이 전통적인 약자 범주 규정에 안주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 변동의 양상과 당대 사회 공론장의 논의 결과를 반영하여 특수 취약성을 가진 인구집단을 그때그때 약자로 인정하며 그 범주를 유연하게 조정해 왔다(김태완 외, 2022). 이 과정은 다소 개연적이고 비체계적인 사후 대응으로 비칠 수 있는데, 예컨대 1990년대 탈북자, 2000년대 결혼이민자와 이주노동자, 2010년대 비정규직 근로자와 청년층 등이 새로운 약자로 지목되며 정책 개입 대상으로 약자 범주에 신규 추가된 대표적 인구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윤인진, 2016; 이병량, 황설화, 2019; 이승윤 외, 2017). 이들은 모두 근로 능력 상실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지는 않지만, 거시환경 변화에 따라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직면하고 다양한 경제, 비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여 사회 배제를 경험하고 고통을 받는 우리 사회 신 비주류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앞서 약자의 첫 번째 특성으로 가변성과 유동성을 언급하였는데, 지금 시점에도 새로운 인구집단들이 약자 목록에 추가되고 있고 그 범주 목록은 계속 갱신 중이다(김욱진 외, 2024). 현시점을 기준으로 대중매체와 언론을 통해 가장 많이 언급되고 또 사회적으로 가장 이목을 끄는 약자 집단을 몇 가지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난민·이민자, 자발적 배제자, 외톨이, 불완전고용근로자, 의료파산자, 1인가구, 자립준비인, 가족돌봄청년, 학대 및 괴롭힘 피해자, 취약지역주민, 디지털정보 소외계층, 기술적 실직자, 주거취약계층, 재난재해 고위험계층 등.

5) 약자의 취약성과 정상 질서

일견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주장하면 이것이 곧바로 사회 일반에 받아들여져 약자의 지위를 이내 승인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하였고 적절한 기회와 보상으로부터 제외되었음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입증하며 고통을 호소한다 한들, 일방의 단순한 주장이 약자의 지위 승인으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Schneider & Ingram, 2005).

한쪽의 주장이나 입장 표명만으로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을 수 없다는 논리는 이해하기가 그리 복잡한 사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20대 남성을 약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러한 주장이 과연 얼마나 널리 수용될 수 있을까. 이 논리는 20대 남성은 가부장제의 이점을 실제로는 누리지 못해왔음에도 단순히 남성이라는 이유로 전통사회의 의무를 그대로 짊어지며, 그로 인해 동년배 여성과 비교했을 때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박무늬, 민혜영, 장태훈, 2019). 그러나 20대 남성의 역차별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약자로 인식되거나 대우받는 일은 당분간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현재 우리 사회 공론장의 지배적 가치규범체계가 근로 능력이 있는 세대이자 근로를 통한 자립이 가능한 성별인 20대 남성을 약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20대 남성이라는 조건 외에 훨씬 명확하고 잘 알려진 위험 사유, 예컨대 장애가 있다거나 아동복지시설 등 특수한 양육 환경에서 커왔음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 더불어 이러한 상황의 합당성이 사회문화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기 위해선 당사자가 처한 특별한 사회적 불리함의 원인, 즉 내적 취약성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불가피하게 부정적으로 자극되었음이 확인되고, 이로 인한 문제와 욕구 미충족 상태가 사회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이 같은 판단은 해당 사회의 지배적 문화 가치규범체계를 의미하는 정상 질서(normalized order)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정상 질서는 특수한 취약성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을 약자로 분류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제공한다(Forst, 2017). 이 기준에 따라 사람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누가 약자인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약자로 판단된 사람에 한하여 정당한 권리의 보장, 공정한 기회의 제공, 적절한 보상 체계의 수립 등 사회 정의 구현 활동에 동의하고 참여한다(김희강, 2016).

현재 우리 사회 공론장에서 이와 같은 약자 관련 정상 질서로 굳건히 자리 잡은 것 중 하나는 노동과 근로 능력에 관한 관념이다(Katz, 2013). 통념에 따르면 개인은 신성한 노동을 통해 근면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독립되고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다만 장애, 고령, 질병, 부상 등 불가항력적 이유로 근로 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는 개인의 책임과 무관하게 발생한 일이므로 이 경우에 한하여 주류사회는 당사자를 약자로 규정하여 법, 제도적 지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것을 허용하며 이를 국가의 책무로 규정한다.

약자와 관련된 현행 정상 질서의 또 다른 예로, 내국인 노동자가 겪는 고통은 부정의로 인식하면서 반대로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가 겪는 똑같은 고통은 부정의로 인식하지 않는 인종 및 민족 범주에 대한 이중적 태도라든가(정현주, 2020), 빈곤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아닌 개인의 나태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도식적 인지 구조(scheme) 등을 거론할 수 있다(류정순, 2003). 정상 질서란 이처럼 약자의 지위 승인 요건에 관한 특수한 판단 기준을 제공하고 그 기준에 부합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정의 구현 활동을 국가의 당위적 책무로 보는 지배적인 관념, 뒤집어 말하면 기준에서 벗어난 자들은 약자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돕거나 지원하는 활동은 부적절한 것으로 보는 문화적 가치규범체계를 의미한다(Fraser & Gordon, 1994).4)


3. 약자를 위한 정의론의 고찰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하면, 약자는 단순히 물리적 힘이 적거나 부족한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약자란 “사회변동에 따른 위계화된 상호작용 속에서 고유의 특수한 취약성을 자극받아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고, 그러한 불리함으로 인해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복합적인 위기를 경험하며, 위기의 상호작용과 누적에 따라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 특별한 문제와 욕구 미충족으로 고통받는 비주류, 그중에서도 당대 주류사회의 지배적 가치규범체계에 따라 공동체의 보호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개인 및 집단”을 지칭한다(김욱진 외, 2024, 14쪽).

약자에 대한 위 개념 규정은,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들이 주류집단으로부터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고자 한다면 강자와 약자를 분류하는 사회의 정상 질서가 애당초 이들의 취약성을 확인하고 이들이 경험하는 배제를 부정의로 규정하는 방향으로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나아가 만약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면 불의로 규정하게끔 정상 질서를 수정, 재편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공동체의 공론장에서 광범위하고 활발한 사회적 논의를 통해 주류의 생각과 가치를 바꿀 때 비로소 가능한 고난이도의 정치 프로젝트다.

여기서 좀 더 심층적인 논의를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약자의 취약성에서 비롯되는 위기 상황과 그러한 상황의 누적 및 연쇄로 인해 심화하는 사회적 배제가 왜 부정의인가(규범적 질문). 둘째, 약자 당사자에게는 부정의로 인식되는 사회적 배제가 왜 많은 경우 주류사회에서는 부정의로 규정되지 않는가(정치적 질문). 셋째, 만약 부정의로 규정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실천적 질문).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제3장에서,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제4장에서 찾는다.

1) 문화적 인정의 문제

약자의 존재와 욕구를 공동체 주변부로 밀어내고 덮어버리는 사회적 배제는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며 약자의 삶 곳곳에서 다차원적으로 경험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복잡다단한 경험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특징으로 이들이 다양한 사회적 상황과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를 점함에 따라 인격성 및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무시를 상시적으로 접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격성과 존엄성의 무시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무시의 경험으로만 끝나지 않고 무시를 당한 사람의 건전한 자아정체성 확립과 긍정적 자기실현, 나아가 행복한 삶 추구를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파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좌절은 배제된 자들에게 심각한 정서적, 감정적 고통과 분노, 박탈감을 초래하며, 참을 수 없는 부정의로 인식된다(이행남, 2018).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약자들이 존재해 왔다. 현재 이 순간에도 취약한 존재들은 계속해서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각자의 삶은 다 다르고 고유하며 특별하다. 그렇지만 이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고통의 구체적 내용이나 양상과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갖는 기본적인 욕구를 느낀다.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 이론을 창안한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상황 속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근본 욕구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Honneth, 1992/2011).

첫째, 주변의 유의미한 타자들, 예컨대 동네 이웃, 회사 동료, 학교 동급생 등과 촘촘하고 단단한 사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로부터 정서적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며 사회적 지지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랑(Liebe)의 욕구. 둘째, 소속된 정치공동체, 예컨대 국가, 도시, 지역사회의 의사 형성 및 결정 과정에 참여할 정치적 권리를 비롯하여 평등한 법률적 주체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다양한 사회, 경제적 권리를 정당하고 당당하게 행사하고 싶은 존중(Achtung)의 욕구. 셋째,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타인으로부터 자기 능력과 자질을 칭송받으며 합당한 보상을 받고 싶은 존경(Wertschatzung)의 욕구.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아끼고 돌보고 싶어 하는 욕구, 국가 등 정치공동체로부터 부여받은 법적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고 싶은 욕구, 업적과 능력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받고 이를 통해 사회적 쓸모를 확인받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이러한 욕구 충족을 통해 인간은 존재 이유와 삶의 가치, 목적, 방향성을 확인한다. 문제는, 사랑, 존중, 존경으로 요약되는 세 가지 형태의 강력하고 본질적인, 대인관계를 통해 채워질 수 있는 인정 삼 욕구가 약자의 삶을 둘러싼 주류사회의 정상 질서에서 온전히 충족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과 관계에서 무시되거나 오인, 멸시된다는 점이다(김원식, 2009).

구체적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약자는 많은 경우 주위 사람과 애정과 돌봄을 주고받으며 친밀성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안정적으로 대인관계를 맺을 기회를 대부분 차단당하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정서적, 감정적 고통을 겪는다(이문수, 2012). 또한 갖가지 이유로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기회를 박탈당하고 공적 영역에서 누려 마땅한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맞닥뜨려 무력감과 체념, 패배주의 정서를 내면화한다. 위축된 감정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심지어 국가마저 정책적 개입 대상에서 자신을 누락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질 때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의 정서로 발전한다(김기덕, 2015). 이뿐만이 아니다. 약자는 자신이 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바가 적다는 것을 종종 감지하며 그로부터 허망함과 상실감을 느낀다.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 유지에 반복적으로 실패한 경험은 타인과의 소통 거부를 낳고 극단적인 경우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유폐하는 은둔 고립을 초래한다(정세정, 김기태, 2022).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 틀에 따르면 약자란 다름 아닌 인간의 인정 삼 욕구 중 일부 또는 전부를 충족하지 못함으로써 좌절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 주류 문화 저류에 깔린 무시의 질서는 사랑, 존중, 존경에 대한 비주류 약자의 인정 삼 욕구를 올바른 형태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단순히 끝나지 않는다. 주류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무시하는 자기 검열의 기제로 변용되기도 한다(Horton, 2011). 가령 외견상 경제적 생계유지에 큰 지장이 없는 일부 중산층 가정의 경우 외부 지원을 요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예: 급작스러운 돌봄 수요 발생 등)에 처하였고 여기에 덧붙여 서비스 수급에 대한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민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지원받기를 꺼리고 사적 자구책 마련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장성빈, 2023), 이러한 회피 성향은 평소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면 미충족 욕구를 드러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외부 도움을 얻는 것을 ‘정상적이지 않다’고 보는 주류사회의 색안경을 자진 장착하고 삼인칭 시점에서 스스로를 취약하지 않은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불리한 결과를 자초하는 일종의 자해 행위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정서적 존재로서 타인과 애정과 보살핌을 주고받을 때, 권리의 담지자로서 평등한 대접을 받고 법률이 보장하는 정당한 권리를 존중받을 때, 그리고 사회 속에서 상호 연결된 협력자로서 능력과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타인으로부터 존경받을 때 비로소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독립적 인격체로서 긍정적 자기실현을 이룬다. 그러나 사랑, 존중, 존경의 형태를 띠는 인정이 사회적 관계 맺음 속에서 특수한 취약 조건으로 인해 거부되어 자기실현이 좌절되면, 좌절한 개인은 정서적, 심리적 불안과 박탈감을 경험하고 나아가 삶 전체에 위협과 불안을 느낀다. 건전한 정체성 확립과 행복한 삶의 추구를 방해받는 결과 앞에서 당사자는 자신의 욕구, 다른 말로 정체성과 존재를 부정하는 주류사회의 무시 질서를 부정의로 인식한다. 사회를 거대한 부조리 그 자체로 체감한다(김나영, 이경옥, 2016).

이렇듯 건강한 자기실현을 좌절시키는 인정 거부의 문화, 즉 무시의 문화 질서는 명백히 부정의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애정, 권리, 업적 및 능력 등을 무시당하여 자기실현을 못 하고 고통과 분노의 정서로 가득 찬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좋은 사회란 구성원들이 사랑, 존중, 존경의 형태로 상호 간 애정, 권리, 업적(능력)을 인정하고 긍정적 자기실현을 통해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사회이다. 그 정반대, 좋지 않은 사회는 독립된 인격체들의 상호 간 인정에 기초하여 정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강자와 약자 간 양극화 심화에 따른 열패감 확산, 공동체 연대 붕괴, 저항과 일탈 일상화, 민주주의 체제 유지에 대한 회의감 확산 등 사회적으로 해로운 결과가 일상화, 만연화한다(김원식, 2013). 호네트는 이를 인정 부재(Anerkennungsmangel)의 사회라고 하였다.

2) 경제적 재분배의 문제

앞서 약자의 취약성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사회적 배제를 부정의로 규정하면서, 이것이 부정의로 인식되는 배경적 원인으로 주류사회 저변에 깔린 무시의 문화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약자를 위한 정의론을 논하면서 부정의의 근원을 문화적인 인정-무시 질서에서만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양극화, 공동체 붕괴, 민주주의 위기 등 현재 진행 중인 우리 사회 다양한 문제들 저변에 깔린 부정의의 상당 부분은 경제 영역에서의 거시구조적 환경변화와 깊은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시구조적 환경이란 개인의 의지, 선택, 책임과는 무관하게 희소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가져오는 외적 위기 요인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실업, 고용불안, 소득감소, 자산감소 등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주기적 경기 침체와 산업 재구조화로 특정된다(김치헌, 2019).

경제 영역에서 진행 중인 거시구조적 환경변화는 부적절한 인정이나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주는 정상 질서의 존재 및 작동과 별개로 우리 사회 분배구조를 왜곡하며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 권리를 침해하는 부정의의 명백한 근원으로 작동한다. 가령 여기 결혼해서 자녀 둘을 키우면서 대기업에서 20년 넘게 일한 중년 남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오랜 시간 성실하게 묵묵히 일한 대가로 그는 최근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수뇌부가 시장 전망을 부정적으로 예측하고 관련 사업에서 철수를 결정하였고, 그 여파로 그가 가진 숙련 기술이 쓸모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자기 책임이나 의지, 선택과 무관하게 산업구조 재편으로 갑작스럽게 회사에서 잘린 이 남성, 여전히 두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야 하고 부동산 대출금 수억 원을 상환해야 하는 남성이 실직 상태에서 느끼는 분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중년 남성은 문화, 연령, 젠더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 사회 주류 지배자의 위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문화적 인정 질서 측면에서만 분석한다면 우리는 그 실체나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왜 분노하는지 이유를 명확하게 찾기 힘들다. 분노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따른 부의 불평등, 즉 경제적 재분배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이다(Fraser, 2003/2014).

비슷한 사례를 다른 상황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여기 우리 사회 평균 이상의 명망을 누리면서 지위에 걸맞은 존경과 인정을 받으며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온 공기업 회사원 A씨, 그리고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카센터를 운영하며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해온 기술자 B씨가 있다고 해보자. 큰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A씨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공기관 정규직 근로자로서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는 삶을 살아왔다. B씨도 성인이 된 후 자기 전문 분야에서 자영업을 시작한 다음부터 사회로부터 어떤 큰 무시나 편견, 폄하의 대접 없이 무난하게 살아왔다.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던 중 A씨는 가족 중 한 명이 큰 병에 걸려 예상치 못한 막대한 의료비를 지출하였고, 이를 감당할 방법을 찾지 못해 단시간 내에 의료 파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B씨는 근래 전기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내연기관 수리 신청 건수가 줄면서 점차 수입이 감소해 폐업 위기에 내몰렸다. 가상의 사례이기는 하나, 각각 파산과 폐업 위기에 놓인 A씨와 B씨가 자신을 둘러싼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느낄 수 있는 막막함과 분노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여러 각도로 살펴볼 수 있겠으나, 의료비 증가를 감당 못 한 A씨의 경우든 소비자의 외면을 받은 B씨의 경우든 둘 다 사회의 희소자원을 적절히 배분받지 못해 고통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여기서 주안점은, 이 분배 왜곡 현상은 그들 욕구와 존재가 무시, 오인, 멸시되어서 생긴 일이 아니고 그들이 게으르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생긴 일은 더더군다나 아니며, 엄밀하게 말해서 국가 경제 둔화와 글로벌 산업구조 재편에 따른 실업, 고용 불안정, 소득 및 자산감소, 세수 감소, 투자 감소, 복지 축소 등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서 비롯한 구조적 결과라는 점이다. 이 같은 현실을 빼놓고 두 사람이 경험하는 고통과 부조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공동체 구성원을 상호 보편적이고 평등한 인간이자 독립적이며 개성 있는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무시의 문화 질서는 그 자체로 분명 심각한 부정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차원의 인정-무시만을 강조하면서 희소자원의 배분을 결정짓는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한 분업구조 및 계급 질서의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그러한 일방향적 접근, 즉 인정 일원론(recognition monism)은 사회 불평등과 부조리의 근본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약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방안 제시도 불가능하게만 할 뿐이다(이충한, 2017).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인정 일원론에 대한 비판이 정반대 분배 일원론(distribution monism)의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한쪽 입장에 치우치기보다 양자를 균형 있게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 이원론적 관점에서 인정과 분배 문제를 동시에 접근하고 사회 배제 문제 해결을 동시에 모색하는 것(recognition- distribution dualism)이 약자가 맞닥뜨린 부정의의 현실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문성훈, 2016). 미국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이원론적 접근은 무시의 문화적 질서와 불평등한 분배 구조가 설령 이론적으로는 구분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는 구분할 수 없으며, 설사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익이 없다는 점, 다시 말해 양자는 사실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약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정의의 두 축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적시한다(김원식, 2009).

인정-분배 이원론, 즉 무시의 문화적 질서와 불평등한 분배 구조가 현실 세계에서 어느 한쪽 측면으로 일방 발현되기보다 밀접히 결합하여 한 개인을 사회적 배제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부정의의 양 축으로 동시 작동한다는 프레이저의 논리는 우리 사회 대표적 약자 중 하나인 이주노동자의 삶에서 쉽게 관찰하고 또 증명할 수 있다. 관련된 선행 질적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전 세계 각국 이주노동자들은 구직하거나 이직할 때 또는 월급을 수령하거나 부동산 관련 정보를 얻고 거주지를 구할 때 심각한 부당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일상적이고 만연한 부당 대우에 대하여 당사자들은 그 이유가 자신들이 자본주의 사닥다리의 최하층에 위치한 저학력 미숙련 노동자란 사실에서 비롯됨을 인지하면서, 동시에 외국인이라는 점, 무엇보다 정착국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정착국의 주류 인종, 민족, 피부색과 다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점을 잘 인식한다는 사실이다(김광수, 2017; Ahonen et al., 2009; De Castro et al., 2006). 선행연구 결과들은 이주노동자로서 겪는 차별을 포함한 배제가 기본적으로 경제적이고 구조적인 이유에 기인하지만, 그것에만 환원하지 않고 정착국 고유의 문화, 사회, 언어, 인종적 맥락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증폭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회 어디에도 순수하게 문화적인 또는 경제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영역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문화적이면서도 동시에 경제적이다. 현실 세계에서 양자는 밀접하게 연관되고 불가분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약자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조리의 두 개 축으로 동시에 작동한다. 때문에 위신을 결정하는 인정 메커니즘과 재분배를 결정하는 경제 메커니즘을 분리된(decoupled) 것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비록 분석적으로는 합리적일 수 있지만, 둘을 경험적으로 절연된(disconnected)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현시대 약자가 경험하는 부정의의 원인과 대응 방안 모색을 위한 바람직한 접근이 될 수 없다(이문수, 2012). 약자를 위한 정의론의 규범적 틀 정립을 위한 첫걸음은 정의를 문화적 인정 차원과 경제적 분배 차원, 두 개 차원으로 나누어 보되 이를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 잡힌 정의관에서부터 시작된다.

3) 참여의 동등성과 대표성의 문제

인정 거부와 분배 왜곡을 동시에 경험하는 약자는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사회적 배제를 경험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부정의하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약자 당사자에게는 불의로 인식되는 많은 문제적 상황들이 현실에서는 좀처럼 불의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노인, 장애인, 여성, 아동과 같이 전통적으로 약자로 간주되어 온 집단보다는 근래 등장 중인 새로운 약자 집단에서 더욱 뚜렷이 발견된다. 새로운 약자에 관한 선행연구, 특히 질적 연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가 느끼는 고통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받는다’, ‘나라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니라고 들었다’ 등의 인용이 이를 잘 예시한다(Adler & Adler, 1987; Anderson, 2000).

약자 당사자에게 불의로 인식되는 사회적 배제가 주류사회에서 불의로 규정되지 않는 까닭은 앞서 정상 질서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사회 일반의 지배적 문화 가치규범체계가 해당 문제를 부정의로 인식하지 않는 방향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성별에 따른 승진 기회 차이를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결과가 아닌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 사항으로 봄으로써 여성 근로자를 노동시장의 약자가 아닌 사람으로 인식하는 관념체계라든가, 자동화 및 기술혁신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거시사회 환경의 변화 결과가 아닌 개별 노동자의 기술 부족 또는 적응 실패로 봄으로써 불완전고용근로자 및 기술적 실직자 등을 약자가 아닌 사람으로 간주하는 주류사회의 도식적 인지 구조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상 질서의 흔한 예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인지심리학적 설명 외에 정치학의 관점에서도 해당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우리 사회 다양한 취약한 존재들이 약자의 지위를 정당하게 승인받지 못하고 마치 ‘투명 인간’ 같은 취급을 당하며 주류사회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배경과 이유를 그들이 점한 불리한 사회적 위치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정치 지형에서 찾는다(이상환, 2006).

한 사회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공론장에서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을 자유롭게 제기하고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공동체의 의사 형성과 결정 과정에 모든 개인이 동료 시민으로서 평등하게 참여할 기회와 권리를 보장받아야만 한다. 이를 참여의 동등성 원칙(parity of participation)이라고 한다(Fraser, 1999).

참여의 동등성 원칙은 공동체의 의사 형성과 결정 과정 및 결과에 제 사회구성원의 이해관계가 형식적, 실질적으로 대표될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정치원리이다. 이는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시되는데, 그 까닭은 사회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주변인들, 특히 정치적 조직화 수준이 낮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공보체계를 갖추지 못한 비주류 소외계층에게 있어 동등한 참여란 대체 불가의 정치적 지지와 보호의 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Fraser, 2006).

참여의 동등성 원칙이 지켜지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중요한 공동체 사안들, 가령 우리 사회의 약자가 누구인지, 약자를 위한 보호와 지원의 내용 및 절차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의 이슈에 대하여 구성원 각자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또한 공론장에서 개진한 의견, 가령 나와 타인의 권리, 능력, 정체성을 올바로 인정해달라는 요구, 부와 명예를 좀 더 공정한 방식으로 평등하게 분배해달라는 요구 등이 관련 제도나 정책 설계 과정에 반영되게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집행, 평가 과정에도 관여할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대표성 강화를 가져오는 동등한 참여 원칙이 우리 사회 주변부에 있는 약자들의 삶에서 현실적으로 온전히 구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약자는 인정 거부와 분배 왜곡을 동시에 경험한다. 동등한 가치를 지닌 동료 시민으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약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너는 약자가 아니다’라는 공공연한 비난에 직면), 오늘 공론장에 참여하면 당장 내일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물적 토대를 탄탄히 갖추지도 못하였다(이완영, 박찬우, 2023). 이는 공론장 참여에 대한 약자들의 규범적, 경제적 동기가 현실적으로 탄탄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약자들의 취약성과 공론장 참여에 대한 동기 빈약은 참여 동등성 원칙의 이론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를 기계적으로 강조하고 단순히 독려하기만 하면 결국 그것은 헛된 구호로 남고 말 것임을 예고한다. 가령 여기 회사 동료들의 왕따로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겪은 후 퇴사하고 은둔 고립인이 된 괴롭힘 피해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2차 가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공개된 장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들 것이다. 설령 목소리를 낸다고 할지라도 자기 말에 귀 기울일 사람이 현실적으로 전 직장에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할 것이다. 그래서 부조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문제를 공론화하거나 소송으로 가져가기보다, 그냥 묻어버리거나 개인적 해결을 위해 조용히 노력하는 쉬운 길을 택한 가능성이 높다. 이 가상의 사례는 무시 질서와 분배 왜곡으로 채워진 현실 세계에서 단순히 참여의 동등성을 중립적으로 강조하기만 하면 약자는 공론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싸우기보다 그냥 조용히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 끝까지 남아서 공동체 의사 형성과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결과에 유의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은 쪽은 규범적, 물질적, 모든 측면에서 우위에 선 주류 강자 집단이다(이상환, 2006).

약자가 공론장에 참여하여 동료 시민 중 하나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투쟁하는 것을 가로막는 또 다른 저해 요인으로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치 현실과 지형을 거론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약자가 누구인지, 약자가 느끼는 고통의 실체와 이유가 무엇인지,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지원과 보호의 내용 및 수준은 무엇인지 등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합의해야 할 사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진지한 성찰적 논의나 합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기인하는 과도한 이념 갈등, 권력의 중앙집중에 기초한 거대 양당의 대립 구도, 사회적 분열과 미디어의 편향 보도, 특히 민감한 이슈에 관해 대중의 확증 편향성을 자극하는 정치인들의 극단적 해석 등 한국 사회 고유의 정치적 특성과 지형, 한마디로 말해 집단 극화와 극한 대립이 이를 훼방 놓고 있기 때문이다(하상응, 2022). 제3자 입장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시민단체마저 기성 진영정치 논리에 휘말려 독립성과 비판력을 상실한 상태이다(임현백, 2018).

한국 사회 고유의 이 같은 정치적 특징들은 정의로운 사회에 관한 성찰적 논의는 고사하고 약자들이 겪는 문제나 고통에 대한 피상적 문제 제기마저 어렵게 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면 정치적 저의나 배경에 의심의 눈초리를 한가득 사고 마는 상황에서 의제를 던지고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교환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약자 관련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과도한 정치화와 소모적 대응, 무의미한 수사가 난무하는 까닭은 현실정치의 이와 같은 왜곡된 모습에서 비롯한다.


4. 약자를 위한 정의 구현의 방법과 전략

약자가 법, 제도적 지원과 보호를 받을 자격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주류사회로부터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아야 한다(Schneider & Ingram, 2005). 지위를 승인받기 위해서는 약자의 취약성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사회적 배제가 부정의로 규정되는 방향으로 주류사회의 정상 질서가 재편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정상 질서는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들의 욕구와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는 약자가 경험하는 고통과 그들이 직면하는 부조리가 주류사회에 의해 포착되지 않고 사회 공론장의 논의 대상에서 아예 ‘제쳐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암시한다(Fraser, 1990).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시대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한 실천적 노력은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를 통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약자들의 욕구를 공식화하여 제도권 내로 진입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진행되어야만 한다(Nussbaum, 2011). 법과 제도의 테두리 밖에서 별다른 보호나 지원 없이 방치된 사람들을 비롯하여, 테두리 안에 들어 있다 하여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로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약자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제도권 주류사회에 재통합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은 주류사회의 생각과 관념을 바꾸는 것이니만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전개해야 할 중요한 정치 프로젝트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것은 규범적으로는 정의롭고 포용적인 ‘공감과 공존 사회’를 갈망하는 요청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공동체 연대 강화, 사회적 협력과 통합 제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 등 여러 긍정적 결과들을 가져올 것이다. 앞서 약자를 위한 정의론의 규범적·정치적 이슈들을 주로 논하였다면, 아래에서는 상기 논의 결과들을 역으로 짚어가면서 약자를 위한 사회 정의 구현의 구체적 방안과 실천 전략을 정치, 문화, 경제 차원에서 차례로 모색해 보겠다.

1) 동등한 참여 보장을 위한 사회적 논의 기구의 활성화

우리 사회 주변부에 놓인 약자들은 대체로 집단적 효능감이 떨어지고 정치적 조직화 수준이 낮다. 스스로 이해관계를 의식하거나 체계화하여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역량이나 기술도 부족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주류사회에서 문화적으로 무시당하고 경제적 생계유지가 어려운 이중고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크다(Lopez-Guerra, 2014). 이러한 한계 상황은 정의로운 민주 사회를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인 참여의 동등성 원칙이 약자의 삶에서 좀처럼 지켜지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약자를 위한 정의 사회 구현의 첫걸음은 공동체 의사 형성과 결정 과정에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여 자신과 관련된 이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참여의 동등성을 보장하고 대표성을 강화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Fraser, 2006).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치 상황과 지형은 이러한 노력을 과도하게 정치화하고 소모적인 논쟁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생산적 토론을 어렵게 하고 있다. 따라서 외부의 정치 환경에 영향받지 않는 일종의 보호된 공론장을 인위적으로 조성하고 여기에서 약자 집단이 직접 자신들과 관련된 이슈를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 좀 더 현실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 2023년 4월 서울시가 ‘약자 동행 가치 확산 및 활성화를 위한 조례’의 제정과 공포를 기점으로 약자 동행 정책과 사업 전반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자문하는 사회적 논의 기구 약자동행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기로 한 것은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자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례에 따르면 약자동행위원회는 약자 동행 정책 수립에 관한 사항 및 관련 사업의 통합 관리, 조정, 우선순위 설정 등에 관한 심의, 자문을 수행한다. 그 외에도 실태조사, 약자 지수 개발 등을 통해 약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취약성과 욕구 현황을 파악하여 사회적 배제의 발생 원인과 배경, 해결책을 연구하는 일도 수행한다. 연구 결과는 우리 사회 정의 구현에 필요한 사회적 논의의 불쏘시개 역할을 할 것이다. 행복한 인간이란 무엇이며 좋은 사회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저해하는 사회적 부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수렴할 토대를 마련하고 숙의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정의의 규범적 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논의를 통해 정식화된 새로운 시대 정의관은 약자가 쏟아지는 작금의 현실을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과학적 이론 틀을 수립하고 구체화하는 데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다. 특히 약자 조례는 약자 동행 정책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추진을 위하여 4년마다 약자 동행에 관한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약자 발굴 및 욕구와 수요 파악을 위해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정책의 목표 설정 및 성과 측정과 평가를 위해 약자 동행 지수를 개발하는 일 등을 서울시장의 책무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각종 과학적 조사와 결과(증거)에 기반한 정책 업무 기획 및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결 사항은 비전과 방향, 목적 그리고 대상자의 결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매우 중요하면서도 현실적인 결정 사항들은 그에 앞서 누구를 약자로 볼 것인지, 왜 약자로 보아야 하는지, 이들에게 어떠한 법, 제도적 보호와 지원을 어떻게, 얼마만큼, 언제 제공할 것인지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공동체 차원의 고찰이 선행되었을 때 비로소 구체적인 내용을 정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정의관의 정식화 작업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며,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울시 약자동행위원회는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한 사회적 공론화의 전초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시 약자 동행 조례와 여기서 규정하는 약자동행위원회의 향후 활동 결과가 만약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들을 아우르는 정의 담론의 혁신, 나아가 이들의 발굴과 욕구 파악, 정책 기획과 수립, 집행과 평가 체계 확립에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이는 중앙정부와 다른 지방자치단체에도 큰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현 정부는 전통적 약자 외에 새로운 복지 수요를 갖는 신약자층을 아우르는 촘촘하고 두터운 보장 체계 구축을 주요 국정과제로 설정하여 추진 중인 만큼, 서울시의 사회적 논의 기구 운용 선례를 참고하여 내용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친다면 중앙정부는 각 시도 및 시군구 지자체가 준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지침과 기준 마련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인정 문화 확산을 위한 법, 제도적 기반 구축

정치적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우리 사회 정상 질서에 내포된 무시의 문화를 시정하고 인정 문화를 확산하는 활동을 전개해야만 한다. 이와 관련한 활동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합당한 인정을 쟁취하려는 개인 당사자의 노력, 즉 개별적인 인정투쟁을 통해 개진될 수 있다. 가령 사회권이나 복지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한 개인 당사자가 법적 권리의 적용 범위를 넓히고 집행 방식에 내재한 인간적 모멸감의 유발요인을 찾아내 제거하는 투쟁에 돌입한다든가, 노동시장에서 올린 성과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한 개인 당사자가 실적 평가 기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적용 범위 확대를 위한 투쟁에 돌입하는 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Reynaert et al., 2022).

그렇지만 약자는 일상적 생계유지에 어려움이 크고 조직화 정도가 낮으며 만연한 무시의 문화로 인하여 정치적 효능감이나 임파워먼트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Lopez-Guerra, 2014). 따라서 당사자의 개별 행동에 기대기보다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단체, 시민단체, 학계 및 법조계의 옹호(advocacy)와 함께 조직적 차원에서 인정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처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정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투쟁은 사회 제도와 정책 전반에 구성원 개개인의 건강한 자아실현을 가로막는 요소가 있는지 점검하고, 만약 그러한 요소가 발견되면 이를 제거하는 노력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하고 집행, 평가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야만 한다. 여기서 건강한 자아실현을 가로막는 요소란 다음 세 가지를 뜻한다(Honneth, 1992/2011). 각각을 시정하는 국가와 민간의 활동은 인정 문화 확산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자연적 욕구(사랑, 돌봄 등)를 부인하는 학대, 고문, 폭력, 괴롭힘 등. 둘째, 보편적 권리와 균등한 기회를 부인하는 사회적 배제. 셋째, 폭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을 부인하는 푸대접, 평가절하, 명예훼손, 모욕 등.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문화 저변에 깔린 무시의 질서에 대해 사회적으로 깊은 논의를 꺼리고 무시당하는 자들의 고통이나 분노에 대해 임기응변적 처방에 의존하며 대증적 해결책만을 제시하여 왔다. 그렇지만 사회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고 다양한 가치와 정체성이 분출하면서 이들 간 공존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이는 그간 정상 질서 바깥에서 음지에서만 활동하거나 활동해 온 우리 사회 수많은 취약한 존재들이 자신들에 대한 올바른 인정을 이전보다 훨씬 더 빈번하고 더 강력하게 요구할 것임을 시사한다(김은희, 2018).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인정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그 결과를 정책, 특히 사회정책, 사회보장정책의 수립, 운영, 평가 체계 전반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기덕, 2015).

(1) 사랑과 돌봄의 욕구를 부인하는 학대, 괴롭힘 등의 문화적 질서 시정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애정과 돌봄의 욕구를 지닌다. 그런데 학대나 폭력, 고문, 괴롭힘 등은 그것이 신체적이든, 정서적, 정신적, 언어적, 성적이든 관계없이 모두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인정 욕구를 파괴하여 건강한 자기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학대 및 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지 못한다. 법에 명시된 다양한 보호와 지원제도를 좀처럼 이용하지 않고 혜택받는 것을 주저한다. 그로 인해 정상적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요건들을 충족하지 못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한다. 이는 명백한 부정의로, 인정투쟁의 동인이 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명시적인 신체 학대나 폭력, 고문, 괴롭힘을 불관용 대상으로 간주하며 법적으로 엄히 처벌한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불분명하거나 복잡한 문제는 없다. 다만 일부 약자들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차별과 편견으로 여전히 문화적,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고 - 가령 보육원 출신이라고 다르게 대접받는 자립준비인의 예 등 - 그로 인해 국가가 엄연히 보장하는 법, 제도적 지원과 보호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큰 심리적 고통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이정우, 이소연, 2023).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시행 중이거나 향후 계획 중인 사회서비스 전반을 검토하고, 특히 그 전달체계 내에 이용자를 정신적, 정서적, 언어적,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폭력적으로 다루는 요소가 내포되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서비스와 관련된 가장 큰 최신 쟁점은 민영화, 탈시설화, 개별유연화인데, 이 전환이 지나치게 빠르면 취약한 상태에 놓인 이용자들에 대한 학대나 폭력, 괴롭힘이 묵인, 조장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는 만큼, 관련 쟁점을 풀어나가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학대와 폭력 및 괴롭힘 예방 및 근절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만 할 것이다. 아울러 학대나 폭력, 괴롭힘 피해자들에 대한 상담, 가해자들에 대한 개입, 학대 폭력 괴롭힘 예방 및 근절을 위한 종사자 교육과 대시민 캠페인 전개 등에도 꾸준히 힘써야만 한다.

(2) 보편적 권리와 기회의 균등을 부인하는 배제의 문화적 질서 시정

모든 개인은 평등한 법률적 주체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다양한 사회, 경제적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는 사회보장체계에 완전하게 포함되지 못함으로써 또는 애당초 포함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제외됨으로써 보편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와 기회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처럼 기존 사회안전망의 결함이나 적용 범위의 빈틈으로 인해 혹은 사회안전망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음으로써 공동체 일원으로 누려 마땅한 권리와 기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흔히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표현한다(이영글, 박성준, 함영진, 2019). 아래에서는 이 사각지대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약자의 보편적 권리와 기회를 부인하는 배제의 질서를 시정하기 위한 인정투쟁의 방향성에 대해 알아본다.

취약한 상태에 놓인 사람이 법·제도적 지원과 보호(benefits)를 받을 자격(eligibility)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 주류사회가 정해놓은 정상 질서의 틀 안에서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아야만 한다. 틀에 어긋남이 없어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은 사람을 적격 판정을 받은 사람(the qualified)이라고 한다. 그런데 적격자가 모두 실제 수급자(recipient)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 수급자가 되려면 당사자는 관련 법령에서 정한 사업에 직접 신청을 해야만 한다. 이와 더불어 당대 사회의 정치 지형, 경제 상황, 여론 등을 반영해 각 사업마다 일정한 선정 기준(selection criteria)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기준에 부합하는 조건도 아울러 갖추어야만 한다. 적격 신청자 중 선정 기준을 충족한 사람만이 최종적으로 자격을 갖춘 수급자(eligible recipient)로 대접받는다(Schneider & Ingram, 2005).

<그림 1>은 위 설명을 도식화한 좌표평면으로, 가로축은 적격, 세로축은 수급 여부를 표시한다(임완섭 외, 2019). 각 사분면을 하나씩 살펴보면, 먼저 제1사분면은 [적격&수급]을 나타낸다. 이는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았고 관련 사업에 신청을 했으며 해당 사업에서 정한 조건에 부합하여 최종적으로 자격을 갖춘 수급자로서 혜택을 확보한 상황에 해당한다. 혜택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제1사분면에는 사각지대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혜택을 받되 그 양이 불충분하거나 종류가 부적절하면 욕구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을 수 있기에 제1사분면에도 사각지대는 엄존한다. 전자를 불충분 사각지대, 후자를 부적절 사각지대라고 한다.

<그림 1>

적격 및 수급 여부에 따른 약자와 사각지대 유형 구분출처: “약자에 관한 이론적 고찰”, 김욱진 외, 2024, <사회보장연구>, 40권 2호, 20쪽. (논문에서 재구성하여 인용)

제4사분면은 [적격&비수급]을 나타낸다. 이는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았으나 최종적으로 수급에서 탈락한 상황에 해당한다. 탈락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청주의에 따른 자발적 미신청 또는 정보 부재에 따른 미신청, 다른 하나는 신청은 했으나 엄격한 기준 적용, 행정 오류, 담당자 과실 등으로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판정받은 데 따른 탈락이다. 전자를 미신청에 따른 사각지대, 후자를 거부에 따른 사각지대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사각지대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때 말하는 사각지대가 바로 이 제4사분면에 존재하는 두 개 유형의 사각지대이다.

제3사분면은 [부적격&비수급]을 나타낸다. 이는 우리 사회 주류로부터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당사자의 취약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배제의 문제가 부정의로 인식되지 않는 상황, 특히 공공에 의해 인지되지 않아 국가의 정책 개입에서 당사자 욕구가 누락된 상황을 가리킨다. 누락에 따른 부적격 판정 혹은 적격판정 유보는 주류사회가 의도한 결과일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도성 여부에 있다기보다, 앞서 정상 질서라고 표현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규범체계가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길 원하는 사람들의 존재와 욕구를 아예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법·제도적 보호와 지원을 요구할 자격에서 원천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데 있다. 앞서 제1사분면과 제4사분면의 사각지대가 기존 사회안전망의 결함이나 적용 범위상(coverage) 구멍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제3사분면의 사각지대는 사회안전망 자체가 만들어져 있지 않아 생긴 것이라는 측면에서, 굳이 경중을 따진다면 제3사분면의 미·불인정 사각지대가 더욱 심각한 권리 침해, 기회 부정을 동반하는 사회적 배제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2사분면은 [부적격&수급]을 나타낸다.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하여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면 당사자가 아무리 자신 처한 상황이 부조리하다고 주장하며 고통을 호소한다고 한들 주류사회가 그 사람에게 어떤 혜택에 대한 자격을 부여할 리 만무하다. 만약 자격을 부여한다면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위법행위로 처벌받게 된다. 제2사분면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나타낸다. 즉 적격판정을 받지 않았는데 혜택을 수급하는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상황을 묘사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정상 질서는 빈민, 노인, 장애인 등 근로 능력을 일부 또는 완전히 상실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전통적 약자들을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적 지원을 제공해야 할 주요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이 주류사회로부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림 1>의 제1사분면과 제4사분면에서 볼 수 있듯 불충분, 부적절, 미신청, 거부의 사각지대가 엄존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사각지대의 존재는 현 사회보장 체계가 약자의 욕구를 인정하고 관련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다분히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나, 제도적 허점, 운영 및 관리상 미비, 전산 낙후, 실무자 실수 등 각종 하자로 인해 그 욕구를 완전히,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해소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사회변동에 따라 근래 새롭게 등장하는 약자들의 경우는 전통적 약자와 성격이 자못 다른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들이 겪는 고통과 문제는 전통적 약자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욕구와 존재 자체가 주류사회에 의해 제대로 포착되지 않았다. 그래서 약자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약자들이 기존 사회안전망 체계에서 대체로 부적격 판정을 받거나 적격판정 유보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은 이들이 현 주류사회 정상 질서 아래에서 - 근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중심으로 약자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주류 가치규범체계에서 - 애당초 정책적 개입의 대상 자체로 간주받지 못한다는 것, 즉 전통적 사회보장 체계의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나 특별한 보호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3사분면의 사각지대를 미·불인정 사각지대라고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제와 무지의 문화적 질서를 극복하고 재편하기 위해서는 약자가 처한 사각지대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파악한 결과 만약 불충분, 부적절, 미신청, 거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확인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 사회안전망의 결함을 보완하고 적용 범위의 구멍을 메우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만 한다. 신청주의에서 발굴주의로의 전환, 수급 조건의 완화, 급여의 현실화, 전산시스템 고도화 같은 시도가 그 예이다(이영글 외, 2019).

반면 만약 미·불인정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확인되면, 사회안전망 자체가 미구축 또는 미완성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여, 당사자들을 개별 사회보장정책의 구체적인 개입 대상으로 채택(적격판정)하고 이를 통해 기존 사회안전망에 연결, 통합할 수 있도록 문화, 제도, 정치적 환경을 최대한 포용적으로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만 한다(김욱진 외, 2024). 제도권 밖에 방치된 자들의 욕구를 제도권 내로 진입시키는 작업은 그간 적격 판정조차 받지 못한 최 취약계층에게 우리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보호와 지원을 제공, 실 수급자로 전환함으로써 주류사회에 재통합시키는 공동체 차원의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정상 질서에 각인된 인지 구조의 도식을 바꾸는 일이니만큼 단발성 사회적 합의나 이벤트성 제도 개선 같은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접근으로는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불인정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들을 주류사회에 재통합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개별 사회보장 정책의 대상 케이스들을 장기적으로 면밀하게 모니터링하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안전망으로부터 부적격 판정 혹은 적격판정 유보 결정을 받음에 따라 적절한 혜택을 수급하지 못하는 특이 사례들을 발굴하고, 이러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위기 계층의 등장을 기민하게 감지하면서 해당 사례를 구제하기 위한 법·제도적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아래로부터의 인정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앞에서 언급한 서울시 약자동행위원회와 같은 동등한 참여 및 대표성이 담보되는 공론화 기구를 창설하고, 여기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정의로운 미래 한국 사회의 규범론과 사회이론을 정립한 후, 이에 근거하여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욕구와 수요를 도출, 대응책을 마련하는 위로부터의 인정투쟁도 동시에 전개해야 한다.

(3)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을 부인하는 푸대접, 평가절하, 명예훼손, 모욕 등의 문화적 질서 시정

사람들은 노력, 능력 및 성과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대우를 원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이나 그들이 성취한 업적을 올바르게 인정하지 않거나 부당하게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기술과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는 온당한 보상을 받던 직종이나 역량이 사회적으로 과소 평가되는 상황이 빈발하며 심화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개인의 실제 능력이나 성과는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으며, 당사자는 폐업, 실직 또는 경력 단절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유범상, 2017).

앞서 언급한 카센터 수리공 기술자 B씨가 여기에 해당하는 예가 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B씨의 기술은 사회적으로 적절한 인정을 받고 경제적 보상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자동차의 등장과 그에 따른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한 수요 감소는 B씨가 가진 특수한 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감가로 이어졌고 결국 B씨에게 폐업이라는 위기로 귀결되었다. 가상의 사례이기는 하나, B씨의 폐업은 단순한 사회경제적 지위 하락만이 아닌, 좌절과 절망감,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라는 부정적 심리정서, 나아가 사회적 고립을 야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를 우리는 최근 자동 통번역기의 등장으로 일감을 구하지 못하는 속기사, 온라인 뱅킹 및 모바일 뱅킹 앱 등 디지털 업무의 활성화로 일자리를 잃는 은행 창구직원, 그리고, 아직 현실화되려면 멀었지만 곧 일어날, 자율주행차의 등장으로 예전만큼 승객을 찾지 못하는 택시 기사, 트럭 운전사의 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술과 경제 환경의 변화가 초래하는 특정 직종이나 역량의 평가절하, 그 결과 자기 능력과 성과에 대해 온당한 보상을 못 받는 약자들의 출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능력과 성과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체계를 도입하고 이를 환경변화에 맞추어 꾸준히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에 따라 보상과 대우를 결정하되, 사회변화에 맞추어 보상과 대우 수준을 탄력적으로 가져가야만 한다(김원정, 임연규, 2020).

아울러 환경변화에 발맞추어 직업 역량을 갱신하고 최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평생 교육과 재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실직자나 경력단절자들이 다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구직상담 서비스나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또한 일시적 실직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강화 노력도 요구된다. 짧은 시간 동안 겪는 경제적 어려움의 단기간 해소는 그 효과가 영구적일 수 있는 당사자의 사회경제적 지위 하락을 예방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덧붙여, 기술 및 산업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는 장기적 계획을 세워 변화의 파장을 예방하거나 최소화하는 전략을 세우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다양한 직업과 역량, 능력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언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직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홍보하고 교육하는 한편, 그간 유급 시장노동에만 치우쳤던 노동에 대한 경제적, 물질적 보상 체계를 가사, 양육, 돌봄, 자원봉사 등을 포함하는 무급 비시장 (재생산) 노동 영역에도 확대 적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석재은, 2020).

한편 환경변화에 따라 이전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약자들의 직종 또는 역량을 재평가하고 보상 체계를 재정립할 시, 당사자가 하대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체계 안에 존엄성과 사생활을 존경하는 문화적 요소를 세심히 반영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만약 새로운 체계에 따라 보상받을 자격이 있음을 새롭게 증명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과도한 침습적 자산조사를 받거나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관료주의적 행정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면, 이는 당사자에게 수치스러움, 모욕감, 창피함 등의 감정을 줄 수 있고, 권리로서 주어지는 보상을 취하는 일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새로운 보상 체계에 따른 수급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과 오해를 키울 수 있다. 이는 모두 당사자에게 치유할 수 없는 도덕적 상처와 고통을 준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을 말살하는 부정의는 그 자체로 반드시 시정해야만 할 대상이다(김기덕, 2015).

3) 재분배 문제 해결을 위한 미래 사회보장제도의 대안 모색

사회 부정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인정-무시 질서 외에 구조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도 함께 검토해야만 한다. 특히 약자를 둘러싼 최근의 환경 변화, 그중에서도 특히 산업구조 재편, 의료비 증가, 디지털 전환, 기술 발달, 지방소멸, 도심 낙후 등 신사회위험 사유들은 향후 사회 부정의를 오로지 문화적 인정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며, 경제적 분배 차원에서도 동시에 접근하면서 양자를 동시에 시정하는 것이 필수적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재분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세제 개혁(특히 소득공제, 세액공제 및 감면의 누진성 강화를 통한 저소득층 지원 확대와 세 부담 형평성 증대), 교육 기회 확대, 근로자 권리 강화, 지역 발전 격차 해소, 사회적기업 및 협동조합 지원 등을 검토해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띤 논의의 중심에 선 것은 대안적 소득제도, 그중에서도 특히 기본소득과 부의 소득세이다(김현철, 2022).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조건에 상관없이 일정 수준의 현금 급여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제도이다(임운택, 2020). 기본소득은 소득 보장 측면에서 적용 대상의 문제는 없으나, 우리나라처럼 세제 역진성이 강한 경우 재원 마련이 어려워 급여 충분성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 한계이다. 현재 전면적인 기본소득은 도입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아동수당, 청년수당, 기초연금, 장애인 연금 같은 범주형 사회수당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를 사실상 변형된 형태의 기본소득으로 볼 수 있다.

부의 소득세는 일정 기준(예: 중위소득 85%) 이하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환급 또는 보충해 주고 기준을 넘어서는 사람에 대해서는 소득세 등 조세를 강화하는 방안이다(박기성, 2022). 이 제도의 특징은 특정 기준선을 설정한다는 데 있다. 특히 기준선을 낮게 잡으면 근로빈곤층, 높게 잡으면 중간계층까지도 대상을 확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기준선 이하에서 급여 보전율을 어떻게 설정하냐에 따라 급여 충분성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근로 유인성 부분에서 아직 불확실한 측면들이 남아있고, 기준선 이상의 개인이나 가구에 대해 재원 확보 차원에서 조세가 강화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논란이 따른다. 부의 소득세 역시 우리나라에서 전면 실행된 적은 없다. 2009년부터 근로장려세제가 도입되어 운용되고는 있으나 이는 근로 소득이 있는 저소득층에게만 혜택이 부여된다는 측면에서 부의 소득세로 간주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울시가 2022년부터 3년간 시범사업으로 도입하여 현재 추진 중인 안심소득의 경우 부의 소득세와 상당히 흡사하여 이를 사실상 우리나라의 부의 소득세 도입의 전초로 볼 수 있겠다.

향후 우리 사회는 더욱 비정형적이고 불가예측적, 비결정적인 사회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지난 2020년대 초반 팬데믹 시기에 우리는 이를 분명히 경험하였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사회위험으로 방역 체계가 장기화하면서 불안정고용근로자, 영세 소상공인, 돌봄 위기 계층 등 약자들의 삶이 크게 위협받았고, 그 결과 현재의 소득보장제도로는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국민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 지원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환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존 소득보장제도 개편을 포함한 대안적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활발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김태완, 최준영, 2024).

다가올 미래 사회의 위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특히 부의 불평등한 배분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기본소득과 안심소득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지난 2022년부터 도입되어 추진 중인 서울시 안심소득의 경우 참여 가구에 대한 5년간 추적조사를 통해 효과성을 분석하는 실험연구를 진행 중이어서 곧 발표될 그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박기성, 2022). 연구 결과는 미래 사회보장제도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5. 나가며: 공감과 공존의 사회를 위하여

지금까지 약자를 위한 사회 정의 구현의 방법 및 전략을 정치, 문화, 경제 세 가지 차원에서 차례로 살펴보았다. 각 접근 방식에는 나름의 논리가 깔려있지만 셋은 분리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로 합쳐져 우리 사회 취약한 존재들에게 필요한 보호와 지원의 내용 및 성격 파악, 향후 정부 정책의 방향성 모색 및 관련 사회적 논의 개시에 필요한 소재들을 풍성하게 제공한다.

그렇지만 사회적 논의 기구 활성화, 인정 문화 확산, 대안적 사회보장제도 모색만으로는 약자를 아우르는 정의 사회 구현에 역부족일 수 있다. 사회적 논의 기구의 경우 약자들의 참여 동기가 약할 수 있고, 기계적인 참여 독려는 강자의 독점, 즉 정치적 대표성에 편의(bias)를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김기덕, 2015). 인정 문화 확산의 경우 약자의 존재와 욕구에 대한 인정이 단순 용인(acceptance)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그들이 겪는 불리함이나 고통에 대해 사실상 무관심, 무관여로 일관하는 대중을 만들어 내어 종국적으로 그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윤인진, 송영호, 2018). 대안적 사회보장제도의 경우 실제 운영에는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세금을 인상하거나 다른 예산을 삭감해야 할 수 있어 반발이 예상되며, 덧붙여 근로의욕 저하, 세금 회피, 예상치 못한 행정력 낭비 등 문제가 많아 현실화에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김태완, 최준영, 2024).

따라서 위에 제시한 세 가지 방안 외에 약자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다각화가 요구된다. 여러 각도에서 노력해 볼 수 있는데, 지금은 글을 마무리 짓는 시점인 만큼 또 다른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나 전략을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화두를 던지는 것으로 약자를 아우르는 정의 사회 구현에 관한 종합적 제언을 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사회 약자가 경험하는 다차원적 사회 배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약자의 고통을 당연한 것, 원래 그러한 것,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부자연스러운 것, 바람직하지 못한 것, 부정의한 것으로 보는 쪽으로 정상 질서가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논의한 세 가지 방안, 구체적으로 정치적 논의 기구의 설치 운영, 인정 문화의 확산, 대안적 사회보장제도의 수립은 그저 허황한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도식적 인지 구조에 각인되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가치규범체계, 즉 정상 질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일부 정책결정자나 행정관료의 단기 처방책으로 바꿀 수 있는 간단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순 관찰이나 측정을 통해 얻은 자료의 분석 결과에 입각하여 바꿀 수 있는 공학적 성질의 것도 아니다. 한 사회의 도식적 인지 구조에 각인된 정상 질서는 그 사회의 주류, 즉 강자 또는 다수자나 지배적 위치를 점한 권력자가 자신들의 태도와 행동 하나하나가 약자, 소수자, 피지배자 등 우리 사회 음지의 여러 취약한 존재들의 삶에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그간 무의식중에 취해 온 태도와 행동을 조심스럽게, 의도를 갖고 조금씩 고쳐나가면서 정치공동체의 공론장에 참여할 때 비로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동료 시민과의 이와 같은 평등한 조우는, 주류사회의 지배적 가치규범체계나 기존의 익숙한 권력관계와 단호한 작별을 고하는 이념적, 문화적 재지향 내지는 정치적 결단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은 권력자의 자발적 태도 변화 또는 인식 교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기보다, 앞서 언급한 문화적 인정, 경제적 재분배, 정치적 대표성 강화라는 삼 요건 - 여러 개혁적이고 다소 강제적인 활동들을 포함하는 - 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상 질서 재구조화란 매우 고난이도의 사회 프로젝트라고 말할 수 있다(김희강, 2016).

그렇지만 강자의 태도와 행동 변화, 그를 위한 문화적 인정, 경제적 재분배, 정치적 대표성 강화만으로도 여전히 불충분하다. 이러한 노력들과 더불어, 우리 사회 다양한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깊은 공감의 가치와 문화가 사회 기층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작동되어야만 한다.

공감(empathy)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감정 심연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정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에만 공감하지 않고 기쁨에도 공감한다. 따라서 혹자는 공감을 다른 사람의 곤경 및 기쁨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인식 경향 혹은 정서 상태로 정의하기도 한다(박병준, 2014).

공감은 “이해”, “뒤따라 느낌”, “뒤따라 삶” 등의 하위요인들로 구성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그의 상황에 감정이입하고 여기에 덧붙여 행동까지 함께 하는 것이 공감의 핵심임을 함의한다. Batson(1987)과 같은 사회심리학자들은 공감의 이러한 행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낯선 타인을 돕는 인간의 친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 다음과 같은 인과 관계를 제시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각 → 타인의 역할을 취함 → 공감의 정서적 반응 발생 → 타인의 고통을 줄이려는 동기 출현 → 조력 행위 개진’. 여기서 최초의 지각과 최후의 행동을 연결해 주는 논리적 고리로 등장하는 중요 단서가 바로 공감이다.

친사회적 행동과 공감의 이와 같은 인과 관계를 본 논문의 결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약자의 존재나 욕구를 인정(단순 용인)한다거나 경제적 곤궁 문제 해결에 동참한다거나(피상적 재분배) 공동체 의사 결정 과정에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노력(기계적·형식적 대표성 보장)만으로는 약자의 사회적 배제 문제를 완벽히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약자를 배제의 늪에서 나오게 하고 그들을 사회에 완전히 포용, 통합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노력에 곁들여 약자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행동에 실제 나서게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동기화하고 관련 교육을 제공하여 경험을 쌓게 하는, 이른바 ‘공감의 사회화’를 이루는 것이 요청된다.

공감을 사회화한 사람은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안준희, 2020). 이를 토대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파악하고 그들 경험의 고유성을 수용하며 각자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나름의 가치를 추구할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와 다른 미지의 낯선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와 같은 차이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지니게 함은 물론 충돌과 갈등의 소지를 줄이는 데 기여한다. 결과적으로 미지의 낯선 타자들과 유대, 신뢰, 협력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인으로 발전한다. 그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힘으로 진화한다.

공존(coexistence)은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박찬운, 2016). 상호 간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차이에 따른 충돌 없이 더불어 존재하고, 나아가 서로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본래적으로 타고난 역량을 북돋는 상호 고양의 상태를 의미한다. 공존은 다양한 가치와 차이들에 대한 상호 존중과 조화, 협력 및 포용의 문화를 배양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제고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및 혁신을 촉진하는 등 여러 긍정적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공감과 공존의 가치 및 문화 확산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강화로 이어진다. 타인의 경험과 감정에 대한 온전한 정서적 수용은 강자와 약자 사이에 놓인 분열과 사회 갈등의 소지를 없애고,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은 약자의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보장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며, 그들이 사회의 한 구성으로서 권리와 기회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끔 실제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동기화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약자가 경험하는 고통의 해결에 공동 대처 공동 노력하게 하고, 사회 내 자원과 기회가 더욱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힘을 싣는 데 자발적으로 투신하게 한다(Nussbaum, 2013).

이 모든 변화의 최종 종착지는 본 논문에서 살핀 여러 약자 집단을 포함한 우리 사회 다양한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감소, 궁극적으로 포용성 향상과 사회 정의의 구현이다. 본 논문에서는 우리 사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정의의 조건으로 바로 이 공감과 공존의 가치 및 문화 확산을 제시하며, 여기서 긴 글을 마친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서울시복지재단의 <「서울시 약자와의 동행」을 위한 기초연구 보고서> 내용 일부를 요약, 재구성하여 작성하였다.

Notes
1) 노인은 물리적 힘이나 인지력 측면에서는 약자이지만 정치 세력화나 지혜의 측면에서 강자로 간주될 수 있다.
2) 대표적 약자 중 하나인 장애인의 경우, 일부 장애인은 뚜렷한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즉각 식별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그래서 매우 특별한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동질성 수준이 대단히 높은 소수자 집단에서 볼 수 있는 것만큼 강한 연대의식이라든가 모든 구성원을 빠짐없이 아우르는 폭넓은 조직화, 세력화를 이들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Mann, 2018).
3) 일각에서는 빈민, 장애인, 노년층, 여성 등 대표적인 약자 집단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추구해 온 다양한 사례들을 거론하며 이들의 정치적 역량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례들을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면, 이러한 성과들이 달성된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가 아닌, 차별과 소외가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특별한 정치적 지지와 지원이 이루어진 드문 기회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Heyes, 2020). 이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적 노력과 조직화를 통해 종종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낸 소수자 집단의 경험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4) 최근에 많이 언급되는 ‘새로운 약자’ 집단은 바로 이 정상 질서의 점진적 변화에 따라 문자 그대로 새롭게 지위를 승인받고 약자로 판정받은 신 비주류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요즘 언론이 크게 조명하는 새로운 약자 집단인 외로운 이들(loners)은 근로 능력이 중시되던 전통 산업사회,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를 중심으로 사회안전망이 짜진 전통적 복지국가에서는 결코 약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던, 그저 정신이 나약했던 외톨이에 불과하였다(Hertz, 2021). 최근 약자 관련 정상 질서의 특징은 이처럼 근로 능력 상실이나 저하, 경제적 위기나 곤궁과 거리가 먼 비경제적 가치들, 시장 경제 체제에서의 ‘쓸모 있음’과 무관한 개인의 정체성과 밀접히 연관된 문화적, 심리정서적 가치들이 약자 여부를 가늠하는 판단 및 평가 기준으로 새롭게 부상하여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김욱진 외, 202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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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그림 1>
적격 및 수급 여부에 따른 약자와 사각지대 유형 구분출처: “약자에 관한 이론적 고찰”, 김욱진 외, 2024, <사회보장연구>, 40권 2호, 20쪽. (논문에서 재구성하여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