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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33 , No. 2

[ Article ]
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33, No. 2, pp. 289-304
Abbreviation: jss
ISSN: 1976-2984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0 Apr 2022
Received 28 Feb 2022 Revised 30 Mar 2022 Accepted 15 Apr 2022
DOI: https://doi.org/10.16881/jss.2022.04.33.2.289

코미디 형성기의 작품들을 통해 본 한국의 근대성
손병우
충남대학교

Modernity of Korea Seen through the Works of the Formative Period of Comedy
Byung Woo Sohn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손병우,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99, 사회과학대 402호, E-mail : soh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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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코미디에는 사회상황과 대중정서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 이런 특성은 코미디가 시대적 의미를 분석하는 좋은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논문은 한국 코미디 형성기 작품들 속에 나타난 역사적 상황과 그 의미를 분석하여, 한국의 근대성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신불출의 ‘태극기 만담’, 강홍식의 번안 만요 ‘유쾌한 시골영감’, 서영춘의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구봉서의 ‘김 수한무’ 등 네 편의 작품을 저본으로 삼아 그 속에 담긴 한국의 근대성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근대의 충격, 분단의 질곡, 재담의 자원, 일본문화의 번안 등 네 가지 범주 특성을 파악하였다.

Abstract

The social situation and popular sentiment are deeply engraved in comedy. This characteristic means that comedy can be a good resource to analyze the meaning of the times. This thesis attempts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s modernity by analyzing the historical situation and its meaning in the works of the formative period of Korean comedy.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ity were analyzed using the four works as the manuscripts including Shin Bulchul's ‘Taegeukgi Comics’, adaptation comic song ‘A Rural Grandpa’s Tour of Seoul', Seo Young-chun’s ‘Even if cider floats in the sea off Incheon’, and Gu Bong-seo’s ‘Kim Suhanmu’. As a result, four characteristics were identified: the shock of modern times, the bitterness of division, the resources of witty words, and the adaptation of Japanese culture.


Keywords: Comedy, Korean Comedian, Modernity
키워드: 코미디, 신불출, 구봉서, 서영춘, 근대성

1. 서 론

무릇 창작물과 표현물 가운데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없겠지만, 코미디는 특히 시대 상황의 맥락 속에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텍스트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현실 상황을 핵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상징으로 작용하거나, 효과적으로 논평하기 위한 매개로 활용된다. 반영이든, 해석이든, 활용이든 여러 차원에서 코미디는 작품의 의도와 별개로 시대 상황과 강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코미디 장르가 가진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코미디는 짧은 길이로 즐거움과 의미가 완결되고, 과장된 형식으로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 그 덕에 사람들은 다양한 현실 상황 속에서 코미디의 한 대목을 간편하게 모방하거나 인용하면서 효과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가령 김영하(1998)의 유행어 “뻥이야!”를 떠올리면 쉽다. 코미디 속에서 김영하는 뻥할머니 캐릭터로 손자가 다니는 학교 교실에 찾아가 담임 선생님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뒤 “뻥이야”를 외친다. 자기 말에 속아 넘어간 선생님을 골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실로 들어오면 부패한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비판을 표현하는 말로 용도가 바뀌었다. 5공화국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두려운 공포 분위기 속에서 코미디 유행어라는 우회로를 택해 표출한 것이다. 권위주의 정치체제 아래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것을 상징하는 유행어는 이미 1970년대에도 있었다. 배삼룡의 발뺌 “내가 뭘~”이나, 임희춘의 말 줄임표 “어이구야⋯!” 등은 코미디 텍스트를 뛰어넘어 현실 상황에서 흔히 흉내 내거나 인용된 것들이다(손병우, 2002). 1980년대로 오면 폭발적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 이주일 자체가 시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바보 연기에는 천시당하고 억눌린 사람의 처지에서 나오는 깊은 페이소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눅 든 표정 속 흘겨보는 시선은 비록 지금은 세상 속에서 대접받지 못하며 살아가지만 자기 나름의 반격을 노리는 약자의 의지를 상징했다. 분노에서 촉발되어 뭔가 발언을 시작하지만 결국 기회를 제지당한 채 머쓱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연기는 80년대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과 연계하여 받아들여졌다. 힘없는 서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아 보이지만 돌아가는 사정은 다 꿰뚫고 있음을 이주일 코미디는 시종일관 보여주었다.

이처럼 코미디에 사회상황과 대중정서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는 특성은 코미디가 시대적 의미를 분석하는 좋은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이 논문은 한국 코미디 형성기 작품들 속에 나타난 역사적 상황과 그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형성기 코미디에 있어서 그 동기가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풍자였든, 아니면 그저 새로운 돈벌이를 위한 장르의 도입일 뿐이었든,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작품들에는 당시 시대 상황과 정신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코미디가 무대 공연과 함께 형성된 이후 매스 미디어의 주된 장르로 자리 잡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사회의 격변의 시기와 일치한다. 또 급속한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미디 형성기의 작품들 속에는 한국사회의 특수성, 특히 한국의 근대가 가지는 특수성이 잘 담겨있으리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근대성의 한 국면을 규명하는데 도달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이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코미디 형성기의 대표적인 연기자와 작품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근대성에 대한 논의로 논문을 구성하였다.


2. 형성기의 대표적 코미디언과 작품

코미디는 연기자가 거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장르이다. 코미디언과 분리시켜 코미디 작품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무리 포복절도하게 재미있는 코미디 작품도 대사만 적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한 일상 대화가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고전 유머극장>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었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1)

#1. (양반집 담장 앞)
하인: (혼잣말로) 대감마님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시지.
대감: (등장하며) 으흐흐흐흐
하인: 마님, 이제 나오시면 어떡하십니까.
대감: 네 이놈, 왜 이리 성화냐.

이런 내용을 대본으로 읽으면서 재미를 느낄 독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코미디 연기로 구현될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텍스트가 된다. 어떤 사건의 전개 없이 그저 대감의 등장과 웃음소리만으로 시청자들의 웃음은 벌써 터지기 시작한다. 대감 역할의 코미디언이 바로 서영춘이기 때문이다. 특유의 성대를 긁는 웃음소리만으로도 서영춘은 무대와 객석을 장악했다. 당대의 대표적인 코미디언들은 모두 그런 뛰어난 연기력으로 코미디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코미디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나 재치 있는 대사를 읽으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문자 텍스트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코미디 대본은 사실상 출연자의 대사를 적어놓은 대사집일 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정 연기자의 표정과 몸짓, 말투의 억양과 강약과 리듬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코미디로서의 실체가 구현된다. 내용에 촌철살인의 웃음 요소를 담는 재담(집)과 다르게, 코미디 대본은 특정한 코미디언만을 위한 표현재료라고 할 수 있다. 코미디의 역사는 사실상 뛰어난 코미디언의 역사와 같은 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장에서는 막간극으로 등장한 이후 TV의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정착하기까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공연과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무대를 주도한 대표적인 코미디언들에 대해 먼저 간략하게 소개하고, 다음으로 대표적인 코미디 작품들을 코미디언의 캐릭터와 연기 특성을 결합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1) 형성기 대표적 코미디언

한국 코미디 역사에서 최고의 코미디언이 누구인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두 번의 조사가 있었다. 1998년 MBC-TV <대중문화 대장정>과 2000년 <월간조선>에서 각각 수행했는데,2) 조사 당시 현역 코미디언들을 제외하면 두 조사 결과가 상당히 일치한다. 앞의 조사는 배삼룡-서영춘-이주일-구봉서-이기동 순이었고, 뒤의 조사는 서영춘-배삼룡-구봉서-이주일-이기동 순이었다. 이런 결과는 이 다섯 명의 역량과 성취에 대하여 전문가들 사이에 높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조사 결과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초창기 여성 코미디언과 일제강점기 최고 인기 만담가 신불출(申不出)이 빠져있다. 어째서 그럴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두 조사가 TV 코미디의 전성기라고 할 시기에 이루어져서 시간적으로 TV 시대까지만 국한해서 대답한 편의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코미디의 역사를 돌아보는 우리의 인식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상위권에 꼽힌 여성 코미디언이 없는 이유는 코미디 형성기의 유교적 분위기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창기 여성 코미디언의 저변이 넓지 않았고, 따라서 1990년대 TV 코미디 PD나 작가에게는 작품과 캐릭터 구상 단계에서 예전 여성 코미디언들이 상상권역에서 배제되기 쉬웠을 것이다. 후배 연기자들에게도 남성 코미디언 선배들에 비해 모델로 삼을 만한 사례가 훨씬 적었을 것이다. 한편 신불출은 1947년 월북으로 활동이 끊긴 점과 그의 ‘태극기 만담’ 사건에서 보듯 좌익성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월북 이전 그의 작품들이 대본과 음반으로 남아 일부가 전해지고 있음에도, 한국사회에서 그는 현재로 이어지는 희극인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속 인물로만 다뤄졌다. 여성에 가해진 제한과 사상에 가해진 금기의 요인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코미디는 여러 연구와 자서전들을 통해 신파극의 막간극과 1930년대 악극의 발전 속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반재식, 2004; 손병우, 2006; 배삼룡, 1999; 구봉서, 1997; 남보원, 2002 등). 그 뒤 매스 미디어의 도입에 맞춰 레코드 음반, 영화, 라디오, TV로 범위를 넓혀갔다. 이 논문에서는 막간극 이후 악극이 발전하던 1930년대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이 정착한 1960년대까지의 기간을 한국 코미디 형성기로 보고 이 기간을 대표하는 코미디언과 작품들을 몇 편 선정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신불출(1907~1969)

막간극, 악극, 음반 등을 통해 만담가로 최고 인기를 구가한, 코미디 형성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25년 극단 취성좌에 입단해 연극배우로 출발하였는데, 비판적인 연기로 일제의 억압을 자주 받았다. 특출한 풍자 만담으로 막간극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1930년대 들어 식민지 조선에 레코드 열풍이 불면서 1933년 발매된 그의 만담 음반 ‘익살맞은 대머리’는 언론에 보도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반재식, 2004; 김은신, 2008; 김정수, 2014; 노명환, 2007).3)


<그림 1> 
오케레코드 익살맞은 대머리 신문광고

TV 코미디가 정초 되던 1960년대의 주축 연기자들은 대부분 악극단에서 출발해 영화, 라디오, 음반 등을 거쳐 온 공통점을 지닌다. 주요 연기자들이 관계한 악극단과 미디어, 그리고 코미디 연기의 특징과 철학에 대하여 약술하면 이렇다.4)

구봉서(1926.11.5.~2016.8.27.)

1945년 태평양악극단 데뷔, 1958년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영화 <오부자>에서 막내아들로 출연하면서 막둥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5) 1960년대 라디오 진행 당시 “이래서 되겠습니까? 안 되죠.”는 세태 비판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코미디에서는 받아주는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구봉서는 수동적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라 상황을 주도하면서 상대방 연기의 공간을 열어주는 포용력을 지녔다. 특히 모든 미디어에 걸쳐 코미디 장르의 형성과 정착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배삼룡(1926.12.27.~2010.2.23.)

1946년 악극단 민협 데뷔, 악극단의 인기가 급격히 쇠퇴하면서 1957년부터 적극적으로 영화에 출연하였고, 잠시 <웃겨보세요>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경유하여 TV 코미디로 진출하였다. 웃음 속에 슬픔을 담는 슬랩스틱 연기로 비실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데에는 자신의 코미디 연기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시골총각이 대도시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때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코미디이다.”6) 이로부터 배삼룡이 지향한 코미디 연기가 바보 흉내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를 희극으로 승화시켜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서영춘 (1928.8.25.~1986.11.1.)

1950년대 극장 간판 화공으로 지내다가 악극단에 결석한 연기자를 대신하면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MBC 라디오를 통해 데뷔한 뒤, 수많은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고, 코믹쇼 무대 공연을 활발히 했다. 이때 백금녀와 함께 갈비씨와 뚱순이로 활동하며 코미디 음반도 다수 녹음했다. 서영춘은 상충하는 특성들을 조합하여 예측 불가능한 연기를 보여준 코미디언이다. 그의 연기에는 깊은 곳에서 긁어 올리는 격동의 감정과 상황의 표층을 타고 어디로든 튈 준비가 되어있는 가벼움이 결합되어 있다. 장광설과 슬랩스틱이 공존하고, 웃음과 울음과 무표정이 갑작스럽게 바뀐다. 감정표현을 순식간에 변조해내는 능력이 뛰어나 반전과 일탈이라는 코미디의 본질이 마치 그의 온몸에 배어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들 외에도 백금녀(1931~1995.3.17)는 부산지역 극단의 배우와 라디오 성우를 거쳐, 김수용 감독의 영화 <공처가>(1958)를 통해 코미디계에 진출한 뒤 뚱뚱이 캐릭터로 홀쭉이 서영춘과 짝을 이뤄 다수의 영화와 만담 음반을 남겼다. 무엇보다 백금녀는 뚱보 여성 코미디언의 원조로서 위압감보다는 친근감과 적극성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양훈과 양석천은 각각 빅터가극단과 성보가극단을 통해 1942년에 데뷔하였으니 구봉서보다 선배이다. 양훈은 최초의 본격 코미디 영화 <청춘쌍곡선>의 주인공이었고, 양석천은 서영춘에 앞서 ‘서울구경’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홀쭉이와 뚱뚱이 캐릭터로 함께 활동했는데,7) 특히 라디오 진행에서 까랑까랑한 양석천의 음색과 훈훈한 양훈의 음색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들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산뜻한 만담과 진행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한국 만담의 대표자로 가장 오래 활동한 장소팔과 고춘자는 한국의 전통 감성에 바탕을 둔 연기를 하였다. 이기동과 이주일은 악극단을 통해 연기를 시작했지만, 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TV 활동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모두 한국 코미디 역사의 앞부분에 빼놓아선 안 되는 중요한 연기자들이지만 한국의 근대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작품들에 집중하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서영춘까지만 포함하였다.

2) 형성기 대표적인 코미디 작품

대중오락의 특성상 코미디 작품의 방대함과 대중 취향의 다양함, 그리고 기억하는 대목들의 차이 등은 어떤 것을 대표로 내세우기 어려운 조건으로 작용한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코미디언 4인과 대표적인 작품들을 소개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음 장의 근대성 분석을 위한 전 단계로 삼고자 한다. 문자로 표현했을 때 딱 떨어지는 대본이나 노랫말이 있으면 아무래도 한 편의 완결된 작품으로 후대에 알려지는 데 유리하다. 그런 점에서 배삼룡의 코미디는 슬랩스틱에 치중하여, 몸동작으로는 가장 강력한 생존력을 보이지만 문자 텍스트 쪽에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신불출, 구봉서, 서영춘 세 사람의 네 편의 작품들은 그러한 완결성의 측면에서 한국 코미디를 대표하는 텍스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네 편의 작품은 원본의 복원 또는 최대한 완성 형태의 정립을 시도하였다. 대중문화 작품들은 맥도날드(D. MacDonald, 1953, p. 59)가 비유했듯이 씹고 버리는 껌처럼 소모적 성격이 강해서 정본 형태의 텍스트로 보존되지 않는다. 이 작품들도 후배 코미디언들이 가끔 재현할 때조차 완성 형태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 단계 복원 가능한 수준에서 최대한 완성 형태로 기록해두는 것 또한 이 논문의 의의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였다.

(1) 익살맞은 대머리

지금 남아있는 신불출의 만담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익살맞은 대머리’이다. 전체 대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본]
여자; 영감님!
노인; 아이구 깜짝이야. 논꼬창이 목소리냐 왜 그리 뾰족하냐 이 자식
- 내 본성이 그래요
- 아서라. 그 목소리로 사람 찌르면 즉사하겠다. 그런데 왜 그래?
- 영감님 올해 몇이시우?
- 나 그림자하고 둘이다.
- 아니, 나이가 얼마 잡수셨느냔 말이예요.
- 정월 초하룻날 하나씩 먹지 이젠 없단다.
- 계시긴 어디 계슈?
- 지금 레코드 속에 들어앉았다.
- 아이 참 입담도 어지간 하슈. 그런데 왜 그리 늙으셨소?
- 세상이 하도 거칠어서 다 해졌단다.
- 영감님 머리는 왜 그렇게 벗어졌어요?
- 알뜰한 세상에 남의 걱정하다가 인함박8)을 썼단다.
- 영감님, 영감님더러 왼통들 무르팍대가리니 수박통대가리니 중대가리니 파리통대가리니 모두들 그러겠지
- 중국말로는 투더의라고 그러구, 일본말로는 하게아다마, 조선말로는 공산명월이라고 그런단다.
- 뭐 공산명월이요? 그럼 아주 화투판엘 가시면 삼십끗은 먼저 따시겠구려.
- 너도 나이 어린 게 아주 내던졌구나.
- 던지다니요
- 버렸단 말이다. 얘, 그러나 저러나 대가리 벗어진 덕분에 기막힌 얘기 하나 할게 들어보련?
- 네네 어서 해주세요.
- 첫째, 방정맞은 여자 옆에서는 행여 못 잘 게니라.
- 왜요?
- 만일 잠을 자다가는 다듬이돌로 잘못 알고 방맹이질을 할 게니 이게 걱정이란 말이야.
으하하하
(여자 노래) 영감님 대가리는 다듬이돌 대가리 방정맞은 여자 옆엔 못 잔다누나
- 그나 뿐이냐 이 자식아. 해수욕을 갔다가는 만일 어부들이 문어대가리로 잘못 알고서 쇠갈구리질을 할 모양이니 이런 질색이 어디가 있나. 으하하
(노래) 영감님 대가리는 문어대가리. 어부 있는 해수욕장 못 간다누나.
- 이 자식아 어디 또 그뿐일세 말이지. 모자 벗고 운동장엔 행여 못 갈 게니라. 까딱만 잘못 하다가는 말이야 후도뽈9)로 잘못 알고 구두발길 세례를 받을 모양이니 이런 질색이 으하하
(노래) 영감님 대가리는 후도뽈 대가리. 모자 벗고 운동장엔 못 간다 누나.
- 얘, 그뿐이라면 내가 용춤이라도 추겠다.
- 아니 그럼 또 있으세요?
- 말 마라. 밤에 애들하고는 행여 못 잘 게니라. 만일 같이 잠을 자다가는 잠결에 요강으로 잘못 알고 대가리에다가 오줌을 쌀 모양이니 으하하
(노래) 영감님 대가리는 요강대가리. 오줌벼락 맞을까봐 걱정이래요.

신불출의 첫 번째 만담 레코드 <익살마진 대머리>는 OKEH 레코드사에서 1933년 2월에 발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대본은 시에론(Chieron) 레코드 79-A 폭소극 <읽살마진 대머리> (신불출 편, 윤창순 작곡, 노인 신불출, 소녀 김연실)에서 옮겨 적었다.10) 이 음반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어 발매 보름 만에 2만장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신불출은 ‘인생에서 왜를 없애야 한다’는 일제 풍자 만담과 신탁통치 갈등 상황에서 한 ‘태극기 비유’ 만담 등 사상성으로 인해 많이 언급되지만, 이 작품에서 보듯이 그는 기본적으로 웃음을 추구한 코미디 만담가였다. 신불출의 육성은 EBS <지식채널 e ; 조선 땅을 웃게 하라>(2010. 3. 15. 612화)에 담겨있다. 대본만으로 전달되지 않는 신불출의 만담 톤과 리듬을 들으면 어째서 그가 당시 대중의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는지를 금세 실감할 수 있다. 특히 신불출 특유의 터져 나오려는 웃음 속에 빠르게 대사를 뭉개고 들어가는 스타일과 성대를 긁어 올리는 웃음소리가 뒷날 TV 코미디 시대에 시청자들이 익히 접한 양석천과 서영춘의 톤과 웃음소리의 원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2) 서울구경

‘서울구경’은 만요(漫謠) 즉, 코믹한 노래이다. TV 시대에는 주로 서영춘이 불렀는데, 그에 앞서 양훈과 양석천 콤비도 불렀다. 두 팀 다 코미디 음반에 이 노래를 수록했고,11) 1962년 시민회관 ‘희극 30년 잔치’ 공연에서는 서영춘과 양석천이 함께 부르기도 했다(대한뉴스 374호). 가사를 보면 차표 값을 아끼려는 시골영감이 골탕을 먹는다는 내용이다.

서울구경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다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싱강이 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 달라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으하하하~

기차는 삑 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주
저 기차 좀 붙들어요 돈 다 낼 테니
으하하하

3등차는 만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에 차는 슬쩍 보니 자리가 비었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집어 탔더니
표검사에 2등차라고 돈을 더 물어
으하하하~

이럭저럭 서울에를 도착하여서
인력거를 타시는데 발판에 앉아
위로 올라 앉으라니 영감님 말씀
이등 타면 돈 더 받게 나는 싫구매
으하하하

이 노래에서 즐거움의 핵심은 웃음소리에 있다. 각 절 끝에 붙은 웃음 부분에서 대중들의 폭소를 얼마나 많이 끌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양훈과 양석천은 두 사람이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서영춘은 혼자 웃음의 텐션을 쭉 유지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웃으면서 “아이고 배야”를 추가하거나, 웃다 못해 울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음반에서는 자신을 대표하는 추임새와 유행어인 “싱가라 시가자가 시가작작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으로 마무리 한다. 이 노래는 모두 4절로 되어있는데, 양훈 양석천과 달리 서영춘은 음반에서 3절까지만 부르면서 골탕 먹는 상황에 집중한다.

(3) 김 수한무

‘김 수한무’의 줄거리는 이렇다. 손이 귀한 양반집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도사들 말만 믿고 십장생 동물과 설화 속 장수인들의 이름을 너무 길게 이어 붙인 게 도리어 화근이 되어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긴 이름을 부르느라 시간이 점점 더 지체되는 역설적인 설정도 재미있는데, 여기에 희한한 발음으로 이어지는 긴 이름을 발성하거나 들으면서 갖게 되는 쾌감이 결합하여 이 코미디가 완성된다.

이 작품은 구봉서가 처음 만들어12) 배삼룡과 서영춘이 리메이크를 하며 꽤 오래 이어졌다. 그래서 그 귀한 자손의 이름도 김 수한무에서 시작하여, 배 수한무, 서 수한무로 바뀌었고, 시청자들도 누구 판본으로 처음 접했느냐에 따라 입안에서 자연스럽게 감도는 성씨가 저마다 다르다.

구봉서 원본과 서영춘 변형본을 비교해 보면 이렇다.

(구봉서 원본)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새프리카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

(서영춘 판본) 서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지리지리박박 사리사리폰타 모리모리 세뿌리깡 홍파리 송파리 호리호리야소 호까이야소 복동아~13)

장수 기원, 십장생, 설화 속 인물, 그리고 가상의 아프리카 추장까지 두 판본의 앞부분은 동일하다. 그 다음부터 갈라지는데, 구봉서 원본은 전래동화 <쥐의 사위 구하기>에 등장하는 강한 존재의 연쇄를 차용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서영춘의 판본은 그 부분을 없애고, 가상의 존재들로 계속 이어간다. 즉, 구봉서 원본이 의미에 중점을 두었다면, 서영춘 판본은 발음의 쾌감 쪽에 더 치중하여 변형시킨 차이를 보인다.

(4) 인천 앞바다에 / 산에 가야 범을 잡고

이 작품은 특별한 제목이 없이 도입부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또는 ‘산에 가야 범을 잡고’로 불린다. 서영춘과 백금녀가 봄을 맞이한 기분을 나누는 만담 중간에 등장한다. 서영춘의 작품들이 늘 그렇듯이 다양한 변형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완성된 형태는 1964년 발매된 <서영춘과 백금녀의 가요 폭소코미디,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에 수록되어 있다. 일정한 박자와 운율에 맞춰 쉬지 않고 사설을 쏟아내는 묘미가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랩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을 가사의 성격에 따라 범주로 표시하여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도입부) 차이코프스키 동생 두리스위스키 작곡 C장조 도로또 4분의 4박자 스그즈그 자그즈그 자그즈그즈 잔즈그즈그즈그 자그즈그즈

(기본형) 이거다 저거다 말씀 마시고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길 잡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이는 못 마십니다.

(동요) 산에 산에 산에 사는 산토끼야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 가느냐.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가보자. 선생님이 문 앞에서 기다리신다.

(유행가) 비빠빠 룰라 비스마이 뷰티(잇스 마이 베이비) 울며 헤(어)진 부산항아 쿵자자작 비 내리는 호남선에 완행차가 웬 말이냐 상즈그 지기지기 자그지기직

(세시) 정월이라 대보름 이월이라 초하루 삼월이라 삼짇날 사월이라 초파일 오월이라 단오날 유월유두 칠월칠석 팔월추석 구월구일 시월 동지 섣달

(유행어) 니가 먼점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점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나

(타령)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여름 바지는 솜바지 겨울 바지는 홑바지

(마무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잔즈그즈그즈그 자그즈그즈

일정한 박자에 맞추기만 하면 어떤 내용이 들어와도 되기 때문에 서영춘의 특징인 즉흥성과 순발력에 따라 중간에 여러 부분이 생략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대목이 들어오기도 한다. 가령 다른 연기에서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의 변형)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마구마구 밟지 말고 돌아가세요.

이 작품은 코미디언 서영춘을 대표하는 만큼 장례식 조사에 한 대목이 인용되면서 후배 코미디언들로 하여금 울다가 웃게 만든 전설적인 장면으로도 알려져 있다.


3. 형성기 코미디 속 근대의 특성

한국에서 코미디가 형성되던 시기인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식민지, 전쟁, 산업화로 이어지는 총체적 격변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런 질곡의 조건 속에서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자아정체성 형성, 새로운 사회관계 정립, 문화변동과 감수성의 변화 등 상부구조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봉건성 - 식민성 - 외래문화의 교체 - 분단 - 산업화가 서로 겹쳐지면서 한국사회의 근대는 복합적 성격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코미디 형성기의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근대가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발견하게 된다. 형성기 코미디의 대표적인 작품들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근대의 표징과 성격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근대의 충격; 차가운 규율

1960년대부터 양훈, 양석천 콤비와 서영춘에 의해 주로 연주된 코믹송 또는 만요 ‘서울구경’은 사실 리바이벌 곡이다. 일본에서 유학한 배우이자 가수였던 강홍식(1902~1971)이 1936년 콜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범오(凡吾) 작사14) ‘유쾌한 시골영감’이라는 제목으로 훨씬 먼저 발표한 것이다. 강홍식은 이미 1926년에 인기 배우로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배우로서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이제 꽤 알려진 편이다.


<그림 2> 
姜弘植 朝鮮映畵界明星點考

(동아일보 1926. 11. 11. 5면)



그런데 이 또한 번안곡으로 원곡은 미국 가수 조지 존슨(George W. Johnson)이 1890년에 발매한 ‘Laughing Song’이다.15)

강홍식의 ‘유쾌한 시골영감’은 모두 4절로 되어있고 어법의 시대적 차이에 따라 가사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내용은 ‘서울구경’과 같다. 특이하게 서영춘의 ‘서울구경’은 3절까지만 녹음이 되어있는데,16) 근대성과 관련해서 보면 이 노래의 의미는 4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내용은 시골 영감님이 기차를 타고 서울 구경 가는 동안 겪게 되는 시행착오 이야기다. 여기서 시행착오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근대화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파를 이해하게 된다.

3절까지 소개되는 시행착오의 내용은 차표 가격, 기차 시간, 좌석 지정 등 세 가지이다. 이것들은 생활세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근대적 시스템의 대표적인 예이고, 시골영감의 연이은 시행착오는 그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시골영감은 몸에 밴 전통적 행동양식에 따라 나름대로 영악하게 대응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거절과 낭패(기차를 놓침)와 처벌(벌금)이다. 그런 근대의 시스템을 경험한 시골영감은 4절에 가서 인력거 좌석이 아니라 발판에 쪼그려 앉는 식으로 낯선 것에 대한 의심과 그 냉정함에 주눅 든 행태를 보인다.

따라서 이 노래의 웃음은 세태를 조롱하는 소극(笑劇)의 웃음에 머물기보다는 현실 풍자로 승화된 웃음에 가깝다. 근대의 차가운 규율(예외 없음과 오차 없음)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낯설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지를 웃음으로 에둘러 표현했는데, 그 중심된 매개물을 산업혁명의 총아인 기차로 설정한 것도 상징적이다.

2) 분단의 질곡; 단절과 금기

신불출은 지금까지 전하는 만담 음반 속 작품들에서는 순수한 농담과 재담으로 청중을 즐겁게 했지만, 여러 사건들을 통해 후세에 더 유명해졌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미 의문사 ‘왜(why)’와 일본을 나타내는 ‘왜(倭)’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만담으로 탄압을 받았고, 해방 후 좌우대립 시기에는 좌익 만담으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태극기 만담 사건’이다. 그 만담의 내용은 이렇다.

태극기의 사괘는 조선을 둘러싼 미·소·영·중 4대 강국을 뜻하고, 중앙의 태극은 위의 적색과 아래의 청색으로 나뉘어 있는 형편, 세월이 흘러 비바람이 불고 태극기가 물에 젖으면 위의 적색이 녹아 흘러 청색 부분까지 붉으스레 하여지는 것이 자연현상인 것처럼, 3.8선으로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지만 세월이 가면 남측에도 사회주의 세상이 올 것이다.

이것은 1946년 6월 11일 ‘6.10 만세운동기념 연예대회’의 공연 ‘실소사전(失笑事典)’의 한 대목이다. 이 공연으로 신불출은 폭행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이틀 뒤 미군정 맥아더 포고 2호 위반 혐의로 서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당시 상황은 <동아일보> 6월 13일자 2면에 “태극기를 희롱타 재담꾼 신불출 국극서 매찜”이라고 기사화되기도 했다. 1948년 월북한 이후 신불출은 대한민국 코미디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졌다.

비단 신불출처럼 사상적인 내용으로 공연을 하지 않았어도 앞서 소개한 강홍식, 그리고 문학과 국악 등 대부분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월북 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은 모두 금지되고 언급마저 금기시되었다. 분단은 문학과 예술 등 표현 영역에서 근대적 양식의 도입과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시기에 전통의 한 축과의 단절과 사상의 검열 문제를 노정시켰다.

3) 재담의 자원; 근대의 맛, 근대의 텍스트

1964년 음반에 담긴 내용을 저본으로 하여 볼 때, 서영춘의 이른 바 ‘산에 가야 범을 잡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근대를 나타낸다.

하나는 소재 차원에서 사이다의 등장이다. 특히 인천 앞바다와 사이다를 연결 지은 배경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설명이 이루어져 있다. 요약하자면 1905년 2월 일본인이 처음 창업한 탄산수 제조소가 인천 신흥동에 있었고, 상표는 ‘별표 사이다’였다고 한다. 그 뒤 인천과 평양에 연이어 사이다 공장이 서면서, 인천은 사이다의 고장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사이다의 등장은 기호식품 음료가 공산품으로 대량생산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무알콜 탄산음료를 ‘사이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이다. 미국에서는 통칭하여 soda 또는 soft drink라고 하고, 영국 등 유럽에서 cider는 알콜이 함유된 사과향 음료를 뜻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무알콜 탄산음료를 사이다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1868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영국인이 제품을 개발하면서 이름을 ‘샴페인 사이다’라고 붙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을 통해 번안된 음료의 범주가 우리에게 유입된 하나의 사례이다. 백욱인(2018)의 표현을 따르자면 “일본이 심은 근대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표현 차원에서 눈에 뜨이는 재담의 재료들이다. 약 1분 동안 쉬지 않고 박자에 맞춰 가사를 발음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어구(語句)들이 필요했고, 대략 120 단어 363 음절이 동원되었다. 이런 식의 말로 하는 리드미컬한 재담이 드문 시기에 그 많은 말들의 출처는 당시 리듬에 맞춰 매만질 수 있는 언어적 표현재료들을 최대한 모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도입부의 외국어 각운(~스키)을 맞춘 재담, 기본형의 야바위 재담, 교과서 동요 변형, 팝송과 유행가 가사 변형, 열두 달 세시, 유행어, 각설이 타령, 그리고 마무리는 자신의 유행어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이 변형 사용된 경우도 있다. 범주화하자면 도시화 속 통속문화(야바위), 대중교육(교과서), 미국문화(팝송), 전통(세시와 타령), 대중문화(유행가와 유행어)이다. 그 이전 조선시대 재담과 비교하면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풍자에 주로 쓰이던 한문이 재료에서 빠진 점이 눈에 뜨인다. 전통과의 단절이라기보다는 표현 주체의 계급 차이(선비와 대중)에서 비롯된 특징으로 봐야할 것이다. 현대의 랩과 비교하면 이 재담은 문형의 완결과 리듬의 규칙성을 중시하여, 라임의 다양성이 적고, 리듬과 문형이 서로 밀고 당기며 엇나가는 변화가 없다. 어쨌거나 리드미컬한 언어자원을 총동원해야 하는 동기에 의해 만들어짐에 따라 이 재담에는 한국 근대의 대중들에게 제공된 텍스트들이 정직하게 담겨있다.

4) 일본문화의 번안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의존성은 꽤 오래 유지되었다. 한국 코미디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는 ‘김 수한무’는 사실 일본 ‘주게무’의 번안물이다. 일본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테지만, 한국 방송가에서는 구봉서의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다가 KBS-1TV <아침마당>(2014. 8. 12.)에서 각색임이 표명되었다.

사회자(이금희); 직접 선생님께서 지으신 거라면서요?
구봉서; 네.
사회자; 어떻게 지으셨어요?
구봉서; 일본 책 보고 거기다 좀 가미를 했죠.

주게무는 ‘수한무(壽限無)’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 만담의 한 형식인 라쿠고(落語) 공연 때 만담가가 입을 푸는 용도로 흔히 제일 앞부분에 배치하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우리 것과 같고, 중간에 이상하고 재미있는 발음들을 배치한 것도 같다.17) 이는 지난 세기 일본 대중문화의 번안물들이 그 원본과 유래는 가려진 채 한국인들의 감성과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모델이 되어온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번안임을 모르고 즐긴 것과 알고 즐기는 것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알고 난 연후에도 계속 이 작품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고, 각종 변주 역시 자유롭게 행하는데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결 론

근대나 근대성은 통상 자본주의적 자유시장경제의 확립, 과학기술의 발달,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원칙, 새로운 사회계급 혹은 시민의 형성 등을 내용으로 한다(김동춘, 2000).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 정치경제 질서의 확립, 그리고 뒤이은 냉전과 분단으로 연결된 대한민국의 역사는 매우 착종된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등식 속에 전통의 요소들은 급속하게 제거되었고, 여기에 일본에 의해 번안된 서구화가 섞였으며, 다시 분단으로 인해 인적 자원과 외래 사상의 절반은 금지된 근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요인들로부터 한국인에게는 근대인이 되어가며 독특한 심성이 형성되도록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먼저 새롭고 우월한 것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문화라는 점이다. 배삼룡의 슬랩스틱과 복장 그리고 서영춘의 콧수염 분장에서 연상되는 채플린의 코미디, MBC-TV의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과 TBC-TV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쇼쇼쇼> 등에서 차용한 보드빌 공연 양식, 양훈과 양석천의 콤비 연기에서 연상되는 미국 코미디언 콤비 Laurel and Hardy의 스타일, 남성 연예인들의 연미복과 중절모 등은 모두 서구적 스타일의 차용이다. 여기에는 동경심과 의존성도 작용했겠지만, 자생적인 새로운 자원이 너무 없어서 채택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 또한 외면해선 안 된다.

둘째는 일제가 물러가고 미국식 대중문화가 빠르게 그 자리를 대체하고 난 연후에도 아주 오랜 기간 일본풍의 감수성과 표현 양식들은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일본 전통의 것과 일본에 의해 번안된 일본식 서양문화는 한국의 근대문화 형성에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로 참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백욱인(2018)의 저서에서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는데, 아직 코미디 장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논문은 코미디 영역에서도 일본 유학, 일본 텍스트, 일본인에 의한 공장 설립 등 다양한 차원에서 일본이 작용했음을 분석했다.

셋째, 앞의 두 가지가 제공 요인이었다면 분단은 배제 요인으로 매우 강력하게 작동했다. 금기와 자기 검열을 거쳐 비판 정신의 탈색에 이른 까닭에 분단 이후 한국 코미디에서는 풍자와 공격성이라는 코미디의 본질이 오랜 기간 숨어버렸다. 오로지 허용된 것은 세태 비판이거나(구봉서의 “이래서 되겠습니까? 안 돼죠”라든가 김희갑의 “에이, 모르는 소리”), 너무나 함축적인 연기(배삼룡의 발뺌과 임희춘의 말없음표와 이주일의 눈 흘김과 얼버무림)뿐이었다.

근대는 한국인에게 새로운 자아정체성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새 정체성은 생존을 위한 요구이자 기회이기도 했다. 이 논문에서는 전통문화를 밀어내며 유입된 근대의 새로운 시스템, 분단으로 인한 사상과 표현의 억압, 산업화와 대중교육의 확산, 일본문화의 잔존과 미국문화의 확산에 따른 외래문화의 중첩 등의 조건 속에서 한국인이 느꼈을 충격과 그에 적응하며 겪었을 감정과 정체성의 변화에 대하여 근대화의 시기와 일치한 대표적인 형성기 코미디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Notes
1) 이는 TBC-TV에서 1976년 방송된 <고전 유머극장>의 도입부에 자주 나타난 상황설정을 재조합한 것이다.
2) MBC-TV ‘21세기 대중문화 대장정 - 코미디 편’ (1998.12.31. 방송). 여기서 조사 대상 전문가는 PD, 작가, 교수 등이었다. <월간조선> “코미디언 100명이 뽑은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 (2000년 9월호). 이 조사 결과 득표수는 서영춘(37표), 배삼룡36, 구봉서22, 이홍렬21, 주병진19, 심형래15, 이주일14, 최양락13, 전유성9, 이기동8 순이었다.
3) 신불출의 생몰연대는 김정수(2014)에 따랐다. 익살맞은 대머리의 인기 관련 언론보도는 <매일신문> 1935. 1.3. “종로 축음기상에서 신불출의 만담 ‘익살맞은 대머리’가 흘러나오자 60세 된 노인을 비롯해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모두 히히거리고 웃다가 더욱 극적인 부분에서는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4) 서술된 내용의 많은 부분은 2016 ‘제2회 청도 세계 코미디아트 페스티벌’의 기획 전시 ‘한국 코미디의 역사’(기획 구성 손병우)에 담긴 것들이다.
5) 최초의 코미디 영화는 1926년 개봉한 <멍텅구리 헛물켜기>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코미디 영화는 1956년 <청춘쌍곡선>부터이고, 1958년 <오부자>는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로 여겨지고 있다.
6) 2000년대 초 방송된 코미디 발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 발언인데, 정확한 시기와 프로그램명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런 코미디 관을 나타내는 술회가 그의 자서전(배삼룡, 1999, 317쪽) 곳곳에서 발견된다.
7) 할리우드 코미디언 로렐과 하디(Laurel and Hardy) 캐릭터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한국 코미디 계에서는 손일평과 김원호 콤비를 홀쭉이와 뚱뚱이의 직접적인 선례로 여기고 있다. <코미디 반세기> (KBS-1TV 1984.12.1.)
8) 쌀을 일 때 쓰는 함지박을 뜻하는 이남박의 방언
9) 축구공, 풋볼의 일본식 발음.
10) 한국음반아카이브 연구소 한국 유성기음반(78archive.net)에서 원 가사지를 볼 수 있다.
11) 서영춘, 이순주의 ‘서라벌 폭소 씨리즈1. 웃음따라 요절복통’(유니버설레코드, 1970) 등의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
12) 2014년 8월 12일 방송된 KBS-1TV <아침마당>에 출연한 구봉서 본인의 말로 확인된다.
13) 이 논문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서영춘 판본이 기록된 첫 사례일 것으로 생각된다.
14) 범오는 시인 유도순(1904~1938)의 예명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왔지만, 장유정(2013)의 연구를 통해 현재 결론이 유보된 상태이다.
15) 조지 존슨은 미국 흑인 최초로 레코딩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가수이다. 그의 첫 레코딩 곡은 휘파람을 위주로 한 ‘The Whistling Coon’이고, ‘The Laughing Song’은 두 번째 녹음 곡이다. 이 곡은 엄청나게 인기를 끌어 1890년부터 5년 동안 약 2만5천에서 5만 개에 이르는 녹음 실린더(wax cylinder)가 판매되었다고 한다(Brooks, 2004). 원곡 가사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 노래가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곡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현상과 대비되면서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상황이 어떤 지경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실감하게 된다.
16) 물론 창자에 따라 4절을 다 부르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인력거가 1960~70년대 상황과 맞지 않아 생략했다는 해석도 있다. 가령 https://namu.wiki/w/%EC%84%9C%EC%9A%B8%EA%B5%AC%EA%B2%BD#rfn-8
17) じゅげむ じゅげむ 寿限無、寿限無ごこうのすりきれ 五劫の擦り切れかいじゃりすいぎょの 海砂利水魚のすいぎょうまつ うんらいまつ ふうらいまつ 水行末 雲来 末 風来 末くうねるところにすむところ 食う寝 る処 に住む処やぶらこうじのぶらこうじ やぶら小路の藪柑子ぱいぽ ぱいぽ ぱいぽのしゅー りんがんしゅー りんがんのぐー りんだいぐー りんだいのぽんぽこぴーのぽんぽこなーのちょうきゅうめいのちょうすけ 長久命の長助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9 충남대학교 자체연구비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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