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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29 , No. 4

[ Article ]
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29, No. 4, pp. 171-196
Abbreviation: jss
ISSN: 1976-2984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Oct 2018
Received 01 Sep 2018 Revised 25 Sep 2018 Accepted 19 Oct 2018
DOI: https://doi.org/10.16881/jss.2018.10.29.4.171

ASMR의 감각적 친밀감과 젠더/섹슈얼리티에서의 함의
김수정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Sensory Intimacy of ASMR and its Implications on Gender/Sexuality
Sujeong Kim
Department of Communication,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김수정,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99, E-mail : sukim@cnu.ac.kr

Funding Information ▼

초록

이 글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유튜브 문화로 부상하고 있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감각쾌락반응) 방송을 미디어 문화연구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문화비평적 시론이다. 이글은 ASMR 방송에 대해 첫째, 테크놀로지가 매개하는 ASMR 방송의 다양한 소리 창조와 청각 중심의 쾌감의 경험이 시각 지배적인 테크놀로지에 의존해 온 기존의 인식패턴과 사회적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거시적 차원에 주목할 것을 논의했다. 특히, 의식과 언어, 그리고 의미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물질과 몸의 인간 경험과 확장이란 측면의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둘째, ASMR 방송이 형성하는 친밀감의 정동을 ‘속삭임’과 ‘돌봄’의 구성적 실천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셋째, ASMR 방송이 한편으로는 이윤창출을 위한 디지털 주목경제의 다양한 장치를 작동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정된 젠더 관념을 강화시키는 문화형식이라는 점을 주시하면서, 비이형규범적(non-heteronormative) 성 문화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술 담론의 장점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넷째, ASMR 방송을 어떻게 새로운 문화적 실천으로 변형 가능한가를 해외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서, ASMR 문화정치적 변환 가능성을 논의했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ASMR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videos as a new cultural form from the perspective of media cultural studies. The paper argues, firstly, that auditory pleasures derived from ASMR videos impact social relations and cognitive patterns which have been shaped by visionary dominated technology. In particular, this study attempts to emphasize the value of human corporeal experiences and extension, beyond consciousness, language, and meaningness. Secondly, the paper examines the effect of intimacy through ASMR videos in terms of constitutive practices of whispering and care. ASMR videos operate in the digital attention economy while reinforcing rigid notions of gender. Thirdly, this study investigates the merits and limits of academic discourse of ASMR videos' potential for the non-heteronormative sexuality culture. Lastly, the paper discusses the possibility to transform current ASMR videos toward new cultural practices by taking into account ASMRist practices abroad.


Keywords: ASMR, Sound, Aural Sense, Affect, Gender Performativity, Sexuality, Digital Network, YouTube
키워드: 자율감각쾌락반응, 소리, 청각, 정동, 젠더 수행성, 섹슈얼리티, 디지털 네트워크, 유튜브

1. 들어가며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알려지지 않았던 ASMR은 이제 유튜브의 인기 검색어로 자리매김하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화로 부상하고 있다. 일명, ‘자율감각쾌락반응’이라 번역되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은 특정 소리 자극에 대해 느끼는, 머리에서 등줄기로 이어지는 기분 좋은 찌릿한(tingling) 감각 경험을 가리킨다. 속삭임, 귀 파는 소리(ear cleaning), 바삭한 음식 씹는 소리, 요리할 때 생기는 소리, 입으로 내는 소리, 손톱으로 무엇을 긁거나 톡톡 치는 소리, 손이나 브러시로 쓰다듬는 소리, 종이 구기는 소리, 사각대는 글 쓰는 소리 등 다양한 미세한 소리들이 팅글1)을 야기하는 자극물, 즉 트리거(trigger)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콘텐츠의 핵심이 소리라는 점이 다양한 ASMR 콘텐츠를 묶는 공통점이자 여타의 유튜브 영상들과 구별되는 특성이다.

ASMR 콘텐츠가 지난 3-4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급속한 속도로 퍼지며 인기를 얻게 된 까닭은, 비단 팅글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용자들은 ASMR 영상에서 반복되는 부드러운 작은 소리를 통해 불안, 긴장, 스트레스, 불면 상태를 벗어나거나 편안함을 얻는다고 적극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 하듯, 수면 유도나 넓은 의미의 심리적 안정이 ASMR 이용 동기의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조사결과(Barratt & Davis, 2015; 육주원, 권은아, 윤신웅, 2018)도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언론과 비평가들(Bjelić, 2016; 헤럴드 경제, 2018.8.3)은 ASMR 동영상의 등장과 인기 요인을 흔히 경쟁적 삶에 지친 현대인들의 삶과 욕망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영미권에서 2010년 이후 ASMR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면, 한국에서는 2015년 이후에 청년층을 중심으로 회자되며 주류 미디어에 보도되기 시작했다.2) 한국 ASMR 창작자의3) 대부분이 2015년 이후 뒤늦게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ASMR 채널은 올해 구독자 수 기준으로 세계 순위 3위(약 142만 명)에 오를 만큼 글로벌한 인기를 얻고 있다.4) 이는 유튜브의 ASMR 콘텐츠가 창작자의 국적이나 문화적 경계에 영향 받지 않고 전 세계인에게 쉽게 소구되는 새로운 감각의 문화 형식임을 보여준다.5)

그렇다면 ASMR 유튜브 방송의 부상, 이 새로운 문화 형식의 생산과 수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 먼저 간단히 ASMR의 특징을 살펴보고 질문들을 좀 더 구체화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SMR 영상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여러 종류의 ‘미세한’ 소리들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말이 없이 여러 소리만 들려주는(no talking) 영상도 다수이며, 인간의 목소리가 포함되어도 속삭임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청각 지각이 주축이 된다. 시각 이미지도 청각적 쾌감을 위해 작동하며, 이 과정에서 촉지의 느낌까지 다감각(multi-modal sense)적 경험이 가능해진다. 특히 양쪽 귀에 소리를 분리해서 전달하는 고감도 바이노럴 마이크 Binaural Mic를 사용한 ASMR 영상에서, 시청자들은 헤드폰을 통해서 미세한 소리의 질감 뿐 아니라 양쪽 귀에 들리는 소리 간의 입체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개되는 이러한 다양한 소리 창조와 그 청각 쾌감의 문화형식은 무엇을 의미할까? 더 구체적으로, ASMR 문화형식은 몸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이해에 어떤 변화를 요청하는 것일까?

ASMR 방송의 두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ASMR 창작자들이 여러 상황을 설정하고 역할극을 수행하는 동영상들을 흔히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때 선택되는 역할극은 창작자들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시청자를 염려하고 친밀하게 돌보는 서비스 역할이거나, 마사지 숍처럼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작은 소리 집중을 통해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역할극을 차용해서 창작자가 시청자에게 전달하려는 정동은 어떤 성격의 것일까? 즉,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형성되는 이러한 정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더구나 그 창작자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은 무엇을 뜻하는가?6) ASMR 방송은 젠더 권력 관계나 섹슈얼리티 규범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들을 탐색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아직까지 ASMR에 관한 학술 연구는 매우 부족한 편이다. 서구에서는 심리학 분야와 미디어 문화연구에서 연구가 좀 이뤄진 상황이고, 한국에서는 현재까지 모두 세 편의 학술 논문(김자경, 이정기, 2018; 육주원, 권은아, 윤신웅, 2018; 장세연, 박진서, 류철균, 2016)이 출간되었다. 이는 ASMR 관련 연구가 매우 초기 단계임을 보여주며, 많은 학문적 탐색과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ASMR 영상의 문화형식을 통해 어떤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변화 가능성들이 열리거나 제한되는지, 그와 연관된 조건과 쟁점들은 무엇인지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인기 ASMR 채널을 구독하고 여러 ASMR 영상들을 살피지만, 개별 영상들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사유를 자유롭게 전개하면서 기존 논의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쟁점을 도출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이 연구는 어떤 가설 증명이나 효과 검증을 위해 ASMR 콘텐츠의 체계적 분석이나 실증 분석을 수행하는 연구가 아닌, 일종의 문화비평적 시론(試論)이라 하겠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첫째,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개되는 다양한 소리 창조와 그 청각적 쾌감의 문화는 기존의 경험과 인식에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가? 둘째, ASMR이 형성하는 정동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셋째, ASMR에서 테크놀로지, 몸, 정동은 어떻게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연관되며, 현재의 젠더/섹슈얼리티의 질서와 관념에 어떤 함의를 던지는가? 본 연구는 ASMR 문화의 작동과 의미에 대한 이러한 질문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면서 관련 학술 담론을 중심으로 ASMR 문화에 대한 쟁점을 밝히고 이해를 넓히고자 한다.


2. ASMR을 둘러싼 논의들

본격적인 탐색에 앞서, 이 절에서는 ASMR 관련 기존 논의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ASMR 관련 논의의 지형을 간략히 기술하고자한다. ASMR 관련 논의들을 발화 행위자를 기준으로 본다면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기술할 수 있다. 첫째는 대중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주류 언론의 담론이고, 둘째는 ASMR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ASMR 커뮤니티의 담론, 그리고 세 번째는 학술 담론이다.7)

첫째, 영미권의 주류 언론들은 ASMR을 새롭게 부상하는 일종의 유튜브 문화, 또는 특정 공동체의 하위문화 현상으로 소개한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논의에는 ASMR의 현상을 수상쩍게 보는 의혹의 눈길도 발견된다. 즉, 한편으로 ASMR 창작자들이나 ASMR을 경험해 본 칼럼니스트들이 ASMR을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기사들도 제공된다(Beck, 2013.12.16).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ASMR 영상을 성적 흥분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싣는데, 이를 통해 ‘소름끼치는(creepy)이나 이상한(weired)’이라는 평가도 전달된다(Higham, 2016. 11.16; BBC, 2015.12.6). 특히 기사 제목에 ‘뇌 오르가즘(brain orgasm)’이란 단어를 제시하여, 실제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ASMR이 포르노그래피와 연관되거나 선정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점 때문에, ASMR 관련 연구자들은 ASMR에 대한 서구 주류 언론의 담론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고 평가한다(Andersen, 2015).

그러나 2015년 이후, 특히 최근 서구 미디어 보도에는 부정적인 인터뷰들이 거의 사라지고 ASMR에 대한 프레임이 변화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는 2015년부터 ASMR의 신체적 및 심리적 효과를 뒷받침 하는 논문들(Barratt & Davis, 2015; Baratt, Spence & Davis, 2017; del Campo & Kehle, 2016; Fredborg, Clark & Smith, 2017)이 점차 출간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많은 미디어 보도들이 이 연구들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ASMR이 건강에 도움이 될 가능성을 제시하며 ASMR 창작자와 지지자들의 인터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예, BBC, 2018.6.21). ASMR에 대한 기사 프레임도 콘텐츠 중심에서 이용자와 경제 중심으로 초점의 이동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ASMR 이용자의 다양한 경험을 다루고(Beck, 2016.7.12; Castillo, 2017.2.19; Guardian, 2016.1.8), 셀레브리티도 참여하는 대중문화로 소개하거나, ASMR 콘텐츠 사업과 ASMR을 PR과 광고에 활용하여 수익성을 높이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접근하기도 한다(BBC, 2018.6.5; Fowler, 2018.6.8; Mark, 2018.2.15).

그런데 서구 언론과 달리, ASMR에 대한 한국 미디어 보도는 ASMR을 대체로 긍정적인 시선으로 다뤄왔다(육주원, 권은아, 윤신웅, 2018). 이들 연구자들이 2014년 5월 첫 기사부터 2017년 2월 까지 총 58건의 분석한 결과, 한국 언론들은 수면촉진이나 힐링의 측면에서 ASMR을 소개하고, 수면 부족과 긴장을 겪는 청소년의 세대 문제, 또는 인터넷 창업 관점에서 기사화 하고 있었다. 즉, 애초부터 한국 미디어 담론에서는 ASMR을 성적 콘텐츠로 보는 시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최근 들어 ASMR 인기가 치솟으며 ‘듣는 야동(야한 동영상, 성인물을 일컬음)’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만큼 선정적인 ASMR 방송이 600개 넘게 발견되고 이에 따른 부정적인 논조의 언론보도(아시아경제, 2018. 8. 27)도 등장하고 있다. 이는 ASMR 영상의 증가와 함께 미디어 담론에 관한 추후 연구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담론은 ASMR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생산하고 유통하는 담론이다. ASMR 문화형식을 옹호하는 이들은 ASMR이 성적 쾌락과는 무관하다는 대항 담론을 적극적으로 퍼뜨리고자 애썼는데, 이러한 노력은 과학적 이미지를 주는 ASMR의 작명에서도 드러난다(Andersen, 2015; Waldron, 2017). 이들 커뮤니티는 초기에는 ASMR의 팅글링 효과를 비롯해서 수면 효과나 심신 안정 효과 등을 강조했으나, 최근에는 과학적 입증 부담을 피하고자 ASMR을 동양의 명상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유사한 것으로서 강조한다(Waldron, 2017). ASMR 채널을 온라인 참여 관찰한 한국 연구(육주원, 권은아, 윤신웅, 2018)도 ASMR 커뮤니티들이 돌봄과 휴식 제공의 성격을 강조하고 그에 부합하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느슨한 취향공동체’의 양태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세 번째는 ASMR에 관한 학계 담론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크게 두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 하나는 심리학과 신경학 분야 등에서 서베이나 실험 등으로 ASMR 효과를 다루는 연구들(Barratt & Davis, 2015; Baratt, Spence & Davis, 2017; del Campo & Kehle, 2016; Fredborg, Clark & Smith, 2017)이다. 또, 학생들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ASMR을 교육에 활용할 것을 제안하는 연구(Apprich, 2016a, 2016b)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국내 실증 연구로는 ASMR 이용자의 동기(즐거움 추구, 과시/체면, 외로움 극복)를 살펴본 연구(김자경, 이정기, 2018)가 있다.

또 다른 방향은 ASMR의 사회문화적 성격과 그 함의를 천착하는 미디어 문화 연구와 비평이다. 이들은 ASMR 콘텐츠가 ‘돌봄’의 내용과 친밀감의 정동을 형성하는 것에 공통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그 초점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예를 들어, ASMR 영상의 진료 상황극을 중심으로 돌봄의 친밀성에 주목하는 연구와 비평들(Ahuja, 2013; Döveling, Harju & Sommer, 2018; Miljak, 2017),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돌봄을 개인화 하는 방식으로서 ASMR 문화에 대한 비판 연구(Bjelić, 2016)가 있다. 또한 ASMR이 감각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미학이면서도 소비자본주의 논리를 구현하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주도됨을 주장한 연구(Gellapher, 2016), ASMR 영상에서 생성되는 정동으로서 친밀감이 젠더 수행 및 섹슈얼리티와 갖는 관계를 탐문하는 연구들(Andersen, 2015; Iossifidis, 2017; Waldron, 2016)도 있다. 이들 연구들은 ASMR 현상에 접근할 때, 정동이론과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섹슈얼리티 관점 및 수행성 이론에 직‧간접적으로 의존하며 특히 테크놀로지의 매개적 실천에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관심은 이 글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국내에서 첫 ASMR 관련 학술논문은 장세연, 박진서, 류철균(2016)의 연구로서, 이들은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에 의존하여 ASMR 방송을 청각 콘텐츠를 통한 ‘일탈적 실존 공간’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ASMR 방송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그 설명이 개략적이어서 충분한 논리와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비해, 육주원, 권은아, 윤신웅(2018)의 연구는 ASMR 현상을 ‘미디어 담론, ASMR 콘텐츠, ASMR 커뮤니티’의 세 차원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실증 분석함으로써, 한국의 ASMR 현상에 대한 유용한 기초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분석 결과, 국내 ASMR 콘텐츠 역시 ‘디지털 돌봄과 친밀감’이 핵심임을 주장하며 서구 선행 연구들과 의견을 같이 한다. 이 연구는 여러 장점을 지니지만,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깊이 있는 비판적 논의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지닌다.

다음의 3절에서는 ASMR 문화형식을 감각, 의미, 테크놀로지와의 측면에서 사유하고 4절에서는 ASMR의 친밀감의 정동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마지막 5절에서는 젠더/섹슈얼리티 차원에서 ASMR의 성격과 변형 가능성을 다룰 것인데, 이 모든 과정에서 앞서 소개한 미디어 문화 연구들의 주장들을 불러들여 상세히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입하며 논의할 것이다.


3. ASMR 영상에서 청각적 쾌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ASMR 테크놀로지와 마셜 맥루한

ASMR을 위한 ‘소리(sound)’ 생산은, 음악 콘텐츠처럼 악기나 규칙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도구나 생산방식의 제한 없이 넓은 창작 영역이 허용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요구된다. 그것은 소리의 내용이나 종류 차원이 아닌, 소리의 강세, 즉 작은 소리이다. 소리의 강세는 몸의 움직임 뿐 아니라 주목과 정동에 영향을 준다.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살금살금 걸어본 경험을 떠올려보라. 몸이 접촉을 통해 만드는 소리를 작게 하려면, 몸의 동작은 느려지고 움직임의 크기는 작아져야 한다. 평소 말(talk)의 속도와 크기라면 청자는 ‘발화자’와 말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평소의 수준을 넘는 소리 강세라면 사물이든 말소리이든 소음이 되어 청자에게 불쾌의 정동을 일으킨다. 반면, 작고 부드러운 소리와 그에 수반되는 부드럽고 섬세한 손짓은 독특한 쾌감을 낳는다.

특히 작은 소리는 청취자의 능동적인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는데, ASMR의 마이크 장치는 청자의 수고를 덜어준다. 헤드폰의 사용은 주위의 소리와 세계로부터 청자를 단절시키고 영상 속 미세한 소리를 증폭시켜 평소 주목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리 세계’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소리는 다양하고 찬란한 것이 아니라, 특정의 소리와 리듬이 반복적으로 지속됨으로써 친숙해지고 무감해진다. 따라서 그 소리에 집중하는 가운데 청취자는 외부 세계와는 분리되어, 의식에서 점차 편안히 멀어지는 상태(몰입, 명상, 수면 상태)가 된다. 속삭임과 말조차도 내용보다 목소리의 질감과 리듬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모국어의 ASMR 창작자의 억양이 주는 독특한 소리 질감이 하나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ASMR 창작자들이 각본에 따른 기본적인 외국어 회화로도 국제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을 설명해준다. 청취자들은 그러한 다양한 질감과 리듬을 지닌 소리에 집중할 때, 조광제(2003, 12쪽)의 표현대로, 몸은 소리 자극에 대한 “감각의 떨판”이 된다. 인간의 목소리 역시 육체의 물질성을 전달하는 또 다른 떨판이다. 그래서 몸은 전율하고, 기쁨과 편안함이 표정과 행동으로 살아 나온다.

고감도 마이크를 통해 포착하는 미세한 소리와 청취자의 집중, 이러한 청각적 감각에 대한 강조는 다른 어떤 미디어 학자보다도 마셜 맥루한을 소환하게 만든다. ‘미디엄이 메시지’라는 선언을 통해 맥루한(1964, 2003)은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단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본질이 바로 인간 신체와 감각의 확장(extension)임을 선언했다. 그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인간의 감각 비율을 조정하고,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과 타인과 맺는 관계, 인간 삶의 패턴에 변화를 준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맥루한은 인쇄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명이후 근대 인간의 지배적인 지각방식은 시각 중심이 되어 청각을 비롯한 다른 기타의 감각 작용을 약화시킨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표음 문자와 책은 인간에게 선형적인 읽기의 감각 패턴 위에서 세상에 대해서도 인과적 사유 방식을 내면화시키고, 인간 행위를 분할하고 구획하여 전문가 중심의 사회조직으로 변화하는 압력을 가한다. 또한 책이나 신문은 개인이 고립된 공간에서 읽고 사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면서, 서구에서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이 이처럼 감각균형을 재편해 가면서 미디어와 기술을 사용하게 된다고 말한다.8)

그렇다면 맥루한의 관점에서 ASMR 영상을 볼 때, 어떤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까? 이는 항상 종속적 위치였던 청각을 중심으로 세상을 지각하는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유하는데서 시작될 것이다. 아마도 그 첫 번째는 시각 중심적인 경험과 사회구조가 갖는 부정적 효과에 대한 대안적 지각 경험방식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천착일 것이다. 과학 발전을 토대로 17-18세기 서구 근대 이성이 해부학 도해서와 실험과학의 전시 및 시범(demonstration)의 발달과 함께 이뤄졌듯이, ‘시각 이미지’와 ‘관찰’은 지식의 특권적인 출처이자 정보원으로서 간주되었다(Alpers, 1983; Snyder, 1980). 예를 들어, 카메라와 같은 시각 테크놀로지가 인간 지각의 주관적이고 가치 평가적 한계를 넘어 객관성을 담보하는 테크놀로지라는 믿음은 현대 사회의 곳곳에 ‘객관성’의 태도와 담론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했다(김수정, 2003). 인쇄 테크놀로지 등 시각 테크놀로지가 가속화한 인과적 사고방식은 사회의 이성 중심주의를 강화하고 다양한 차이들을 평가하고 규율하는 정상화(normalization)의 기능 역시 수행했다. 미셸 푸코(Foucault, 1975)가 죄수의 몸과 나아가 사회를 규율하는 권력으로서 ‘감시’ 원리를 벤담의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건물 감시체제로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시각 중심주의가 모든 문제들의 단일한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맥루한이 강조한 것처럼, 그 어떤 미디어도 “독자적인 의미를 갖기 보다는 오직 다른 미디어와의 지속적인 교섭의 관계 속에서 존재와 의미를 갖기” 때문에, “미디어의 효과는 개별적으로 따로 고립시켜 파악해서는 안 된다”(McLuhan, 1964, pp. 530, 67).

그동안 미디어 문화연구 분야에서 소리에 대한 연구는 영화에서 소리, 라디오에서 소리 등등처럼 개별적인 소리 재생 매체 자체에 초점을 두고, 소리의 듣기와 실천 그리고 소리 생산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충분히 접근되지 못했다(이희은, 2018, 131쪽). 이제 청각 중심의 테크놀로지로서 ASMR 방송이 시각 편향적 감각을 중화시키거나 또는 새로운 차원의 감각 경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듣기 실천과 맥락에서 고찰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각은 시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주관적이며, 말소리 이외의 소리는 언어로 재현하기 어렵다. 공간적인 시각과 달리, 시간의 경험 속에서 작동하는 청각은 표상하기도 어렵고 객관적으로 양화시켜 비교하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ASMR에서 소리는 청취자 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따라서 팅글의 경험도 달라지며, 특정 소리자극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만큼 큰 개인차를 지닌다. ASMR에서 영상이라는 시각 요소, 창작자의 터치의 행위는 청각과 결합되어 상상적으로 공감각을 느끼게 하며, 개인에 따른 감각과 의미는 고유의 차이를 주장한다. 이처럼 감각의 사용 비율과 그에 대한 효과가 개인의 주관성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ASMR 방송을 두고, 이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의 패턴이나 특정한 관념을 발전시키는가를 얘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른다. 또한 감각 역시 사회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산물이라는 지적(이희은, 2018, 131쪽)은 더 복잡한 생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맥루한의 테크놀로지 관점은 ASMR 방송을 인간을 확장하고 인간과 사회에 변화를 가하는 하나의 테크놀로지로서 간주하며, 동시에 소리의 감각이 인간 자체와 사회와 주고받는 작용에 주목하게 한다. 이제 ASMR 방송의 감각작용을 언어적 차원과 연결시켜 살펴보자.

2) 인간과 비인간의 감각 회로로서 ASMR 방송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그 의미는 언어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Saussure, 1916/1977)는 언어를 청각 이미지인 기표(signifier)와, 머리에 떠오르는 개념으로서 기의(signified)의 결합으로 설명하며, 언어의 의미는 한 기표(signifier)가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가치(value)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구술언어든, 문자언어든 우리는 공시적 기호체계 내에서 기호의 발음이나 모양의 변별적 특성을 구분해냄으로써 의미를 파악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ASMR 방송에서 말소리 이외의 잡다한 소리는 객관화된 차이로서 공시적 음운체계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소리의 변별이나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의 감각을 통해 주어진 자료를 지각하고, 범주들을 작용시켜 어떤 이해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작용이라는 칸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파악과 판단 작용의 결과로서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려면 언어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말이나 글자인 언어는 차이(difference)의 체계로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를 변별적 차이로 분할시키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구술 언어가 인간을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집합적인 의식 혹은 직관적 깨달음을 감소시키고”, “인류를 우주의 무의식으로부터 분리” 시킨다는 맥루한의 생각과 연결된다(McLuhan, 1964/2011, p. 164). 이런 점에서 볼 때 ASMR 콘텐츠에서 말 이외의 사물과 인간이 내는 소리란 아직 말(speech, language)이 아닌 상태로서, 자극 감각의 언어 이전의 질료적 수준이다. ASMR 방송에서는 인간의 속삭이는 말조차도 내용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 목소리의 질감, 톤, 억양 등의 목소리의 물질적 차원이 중시된다. 그래서 유튜브의 ASMR 방송을 통해 ASMR 청취자는 인간의 ‘실존’을 경험하게 된다는 주장(장세연, 박진서, 류철균, 2016)도 제기된다. 즉, ASMR 영상에서 사물과 몸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은 인간 언어의 의미체계와 이성을 우회해서 몸의 떨판들에 작용한다.

이러한 필자의 사유는 ASMR에 대한 롭 갤러퍼(Gallagher, 2017)의 주장과 일정 정도 공명한다. 의존하는 문헌은 서로 다르지만, 갤러퍼 역시 ASMR 동영상이 말(speech)이라는 언어와 이성적 이해를 무력화시키면서 미학적 소음으로서 우리 삶을 재구성하는 코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ASMR 콘텐츠에서 발화나 소리가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사이버네틱스 모델에 따라 ASMR에서 발화나 소리를 소음(noise)으로 접근한다. 소음은 의미를 지닌 신호(signal)를 촉진하면서 동시에 왜곡하고 개입하는 일종의 원재료로서, 이를 담은 ASMR 방송은 입력물(input)이 되고 이것의 산출물(out)은 몸의 미학적 쾌감과 친밀성의 정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갤러퍼는 미디어가 무엇을 ‘의미 하는가’보다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do)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는 ASMR 공동체들이 ASMR 콘텐츠를 판단하는 기준이 몸에 주는 특정 효과인 점에서 방증된다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ASMR 방송과 접촉해 얻는 몸의 쾌감과 정동, 또는 심신의 긴장이완은 의미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명상의 상태, 자연에 둘러싸여 있을 때 느끼는 상태, 어떤 재미에 푸욱 빠져서 내가 누구인지를 잊은 몰아(沒我)와 같은 상태, 심리학자들이 표현하는 전념(mindfulness 또는 flow)의 상태와 ASMR 영상에서 얻는 청취자의 긴장이완 상태는 유사해 보인다. 학자들은 이를 추구하는 청취자들의 동기를 경쟁 사회가 주는 긴장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추론한다(Bjelić, 2016; Gallagher, 2017).

그런데 ASMR 방송을 통한 실존의 경험을 현실 사회에서의 기능성의 측면이나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사물의 세계나 인간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시각 중심의 영상 콘텐츠였다면, 시청자들은 영상 속 사물을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기존 지식과 경험에 따라 규정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ASMR 방송에서는 소리만 듣고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히 상상하다가, 영상을 통해 그것이 사물의 몸과 인간 몸의 부딪힘이었다는 새로운 지각을 하게 된다. 평범한 일상의 재료들(담요, 수건, 종이, 비닐 등)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사물의 소리는 인간 몸과의 관계에서, 그 사물의 질감을 새롭게 느끼게 하며 자신의 물질성과 존재를 고감도 마이크를 통해 드러낸다. 현실 세계를 인간들 간의 관계만이 아닌, 인간 중심적인 인식을 넘어서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성된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사물의 물질성과 개별성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성을 부각시키는 ASMR 방송의 경험은 사회를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로서 이해하는 브뤼노 라투르(Burno Latour)와 같은 학자들의 ‘과학기술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TS)’ 관점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자 홍성욱(2016)에 따르면, 라투르는 과학기술(Techno-Science) 자체를 비본질적으로, 즉 문화적 구성물로 바라보며, 과학기술을 포함해 동물, 사물, 기구, 장치 등의 비인간적 존재들에게도 행위성을 부여하며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을 제시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과 비인간의 속성은 어떤 네트워크에 속하여 작동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며, 생성과 변환을 겪는 비결정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과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개별 존재를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개별 존재자들의 특수성에 주목하게 한다. 인간의 목소리를 여러 소리 가운데 특권화 시키는 근대성과 현대 사회에서 ASMR 방송은 그 질서를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이는 테크놀로지, 사물, 동물, 자연 등 비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소리(voice of the world)’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인간 중심적 시선을 넘어서는 소리정경(soundscape)을 강조하는 도미닉 페트만(Pettman, 2017)의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는 디지털로 매개된 ASMR 영상의 소리를 소리정경의 한 예로 제시한다. ASMR 문화의 부상은 ASMR 콘텐츠의 독특성뿐 아니라, 조회 수가 많은 콘텐츠를 상단에 위치시키고 고객의 검색 기록에 맞춰 제공하는 인터넷 플랫폼의 알고리즘의 영향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구글과 같은 기업이 이용자의 편리함과 서비스를 앞세우는 이면에는 빅데이터와 그 운용 알고리즘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취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 작동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사람들의 접근, 주목, 행위를 일정한 패턴으로 규율화 하고 자기 관리를 수행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장치라는 점은 여러 학자들(김예란, 2013; O’Neil, 2016)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이 점에서 ASMR 영상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갤러퍼(Gallagher, 2017)는 ASMR 콘텐츠에 대한 참여자들의 피드백이 온라인 플랫폼의 광고, 콘텐츠 큐레이션 알고리즘, 데이터 마이닝, 그리고 감성분석을 거쳐 구글 검색 색인으로 업데이트 되며 소비 자본주의를 작동시킨다고 지적한다. 그는 ASMR 영상은 소리와 몸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미학적 장르이지만, ASMR 영상의 하부구조는 몸과 테크놀로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를 새롭게 상호 조응시켜 자본주의를 실행시키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알고리즘’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튜브의 ASMR 문화 형식은 고감도 마이크와 카메라에서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매개를 통해서 사물과 인간의 몸 사이, 그리고 창작자와 이용자 사이를 연결하는 다중 감각 회로이며 동시에 디지털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를 위한 회로이기도 하다. 이제 이 회로에 따라 흐르며 움직이는 정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4. ASMR은 어떠한 정동을 형성하는가?
1) 정동 네트워크로서 ASMR

ASMR 콘텐츠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팅글의 쾌감이나 긴장 이완, 친밀감의 정동들을 추구한다.9) 몸 감각의 쾌락을 강조하며 정동의 생성과 운동을 보여주는 디지털 대중문화로서 ASMR 방송은 한국에서 인기를 끈 인터넷 ‘먹방(먹는 방송)’ 콘텐츠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먹방은 먹는 모습을 ‘보는’ 시각적 쾌감이 중심이며, 다량의 음식을 먹어대는 과도한(excess) 먹기라는 점에서 감각의 강도가 매우 높다. 또한 시청자에게 친밀감과 힐링을 줄 수 있지만, 일반적 문화규범을 기준으로 볼 때는 “자칫 수치심, 혐오, 역겨움을 야기” 할 수 있다(김예란, 2017, 112쪽). 반면, ASMR 방송은 ‘듣는’ 청각적 쾌감이 중심이며, 비록 테크놀로지를 통해 증폭되지만, 일상에서는 포착하거나 주목하기 힘든 미세한 소리라는 점에서 그 자극 강도가 낮다(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ASMR을 ‘저자극 영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도 평온함, 긴장이완, 힐링의 느낌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먹방과 ASMR 방송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는, 두 방송 모두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매개를 통해서 육체적 감각과 그로 인한 다양한 쾌락의 정동을 생성하고 극대화하려는 콘텐츠이다. 두 방송 모두 교차적이고 다중적인(cross-and multi-modal)의 감각들을 조정하면서, 먹방에서는 시각이 미각을 일깨우고 ASMR 방송에서는 청각에서 촉각을 느끼는 하는 공감각적 환각(illusion) 체험을 제공한다. 두 번째 공통점은 먹방이나 ASMR 방송 모두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에서 디지털 소비 자본주의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노동방식이자 수익 창출 기제라는 점이다.

이는 ASMR 문화가 매우 특별하고 배타적인 문화 형식이기보다 먹방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디지털 자본주의 문화에서 배태된 문화형식들 중 하나임을 드러낸다. 즉, 테크놀로지의 매개 속에서 몸의 감각 쾌락을 극대화하고 이러한 정동을 토대로 자본과 사회적 관계를 재배치하는 욕망의 장치 중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예란(2017)은 먹방을 힐리스와 그 동료들(Hillis, Paasonen & Petit, 2015)이 제시한 ‘정동 네트워크(networked affect)’로 인식한다. 먹방이 신자유주의의 한국사회에서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생존주의의 발산 뿐 아니라, 그 사회적 상황을 비틀고 조롱하며 비판하는 “저항적 쾌락의 적극화되는 양상”이라는 양가성을 김예란(2018, 111쪽)은 통찰력 있게 포착해 낸다. 그렇다면 ASMR 문화 또한 어떤 양가성과 변이의 잠재성을 가질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ASMR 창작자나 연구자들이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ASMR 콘텐츠에서 경험되는 정동의 핵심, 즉 ‘친밀감(intimacy)’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 친밀감의 정동

ASMR의 신체적 쾌감은 순전히 소리의 감각적 자극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쾌감을 제공하고자 하는 창작자의 관심과 노동, 그리고 이를 수용하려는 시청자의 공통의 관심, 서로를 향한 지향성이 형성하는 ‘친밀감’의 정동에 의해 더욱 활성화되고 극대화 된다. 친밀감은 친밀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정동이라고 동어 반복적으로 얘기될 수 있을 만큼, 정동은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친밀감의 정동을 발생시키는 다양한 행위와 방식이 존재하며, 그 방식을 통해 해당 관계와 관련 행위자들의 정체성이 구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개인방송의 창작자들은 시청자 팬과의 친밀감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과 수행 전략을 구사하는데, 게임 BJ 경우 시청자 팬과 ‘남성 지배적인 저속문화를 공유’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임명빈, 김수정, 2018). 이들 인터넷 방송인들은 친밀성을 형성하고 관리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의 감정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데, ASMR 창작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처럼 친밀감이 자명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전략과 수행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ASMR의 친밀감의 정동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것은 속삭임과 돌봄의 두 차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친밀감은 창작자들의 ‘속삭임’의 방식을 통해 생성되고 작동한다(Andersen, 2016; Bjelić, 2016; Gallagher, 2016; Garro, 2017; Iossifidis, 2017; Miljak, 2017; Waldron, 2016). 한국 ASMR 콘텐츠도 약 70%가 속삭임을 포함하고 있을 만큼(육주원 외, 2018, 330쪽), 속삭임은 ASMR의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속삭임을 연인과 같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행위라고 미리 전제하고 있어서 ASMR 방송에서 친밀감 생성의 구체적인 방식을 살피고 있지 않다.

속삭임이 형성하는 친밀감의 정동을 현상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속삭임은 무엇보다도 두 행위자 간의 물리적 근접성과 접촉성을 요구한다. 속삭임은 소리의 강도가 작기 때문에 청자의 귀에 대고 발화하거나, 청자가 화자에게 귀를 갖다 대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다. 특히 속삭임은 발성의 힘을 조절해야하기 때문에 발화시 공기를 많이 내 뿜게 된다. 그래서 청자는 말과 함께 화자의 숨소리와 귓가에 닿는 공기의 터치, 목소리의 질감을, 즉 화자의 몸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면서, 그 관계를 친밀한 것으로 의미화 한다. 그래서 ASMR 속삭임은 ‘친밀한’ 사회적 관계 유형에 조응하는 행위로 사회적 의미를 띠게 된다. 즉, 가깝지 않은 타인이 속삭이거나, 또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길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수행할 경우, 속삭임의 작은 자극이 큰 폭력으로 작동하고 극도의 혐오라는 불쾌의 정동으로 변화된다. 이런 점에서 속삭임의 친밀감의 정동은 청취자의 수용성 여부에 의해 최종 결정된다. 정동이란 “몸들 사이의 마주침”이 형성하는 “관계에 대한 경험이고 지각”이라는 김예란(2018, 52쪽)의 설명은 ASMR 방송에서의 친밀감의 정동을 매우 잘 표현해준다.

그런데 물리적인 접촉과 근접성이 없이도 친밀감의 정동이 생성될 수 있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매개 덕분이다. 더구나 바이노럴 마이크와 헤드폰이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ASMR 영상에서 속삭임은 청각적으로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체험될 뿐 아니라, 창작자의 몸짓 등 시각적 자극으로 강화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보이는 모형 귀를 만지며 속삭일 때, 시청자에게 다가가듯 카메라에 접근하며 얼굴을 들이밀거나 카메라를 터치하는 행위는 시청자에게 물리적 근접성과 촉감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클로즈업된 창작자의 얼굴 표정, 눈 맞춤, 말하는 입술로 인해 더 일대일의 내밀한 관계를 느끼게 하고(장세연 외, 2016; Miljak, 2017),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친밀감을 환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로써 목소리가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 속삭임의 행위를 통해서 감각적 쾌감과 친밀감의 정동이 함께 ASMR의 창작자 몸과 청취자의 몸을 가로지르며 운동한다. 친밀한 관계이어서 속삭이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속삭임의 행위가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친밀한 것으로 지각시키며 그에 상응하는 정동을 발생시킨다. ASMR 창작자들의 의도 이상으로 친밀감은 청취자의 최종 수용성에 의존하며, 청취자에게 권능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청취자는 자신의 통제력을 기대하며, 자신에게 적절한 쾌감을 줄 수 있는 동영상을 찾아다닌다.

둘째, ASMR 동영상에서 친밀감은 ASMR 창작자의 ‘돌봄’의 발화 수행과 이를 극대화하는 상황극의 내러티브 장치로 구성된다. 창작자는 카메라를 통해 마치 시청자를 잘 아는 것처럼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가’라며 청취자의 안부를 묻고, 시청자의 심신의 상태에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어온다. 치과, 미용실, 강습, 마사지 숍 등과 같은 상황을 설정하는 역할극에서 시청자는 서비스 받는 사람의 위치를 자동적으로 떠맡으며, 창작자의 주목과 돌봄을 한 몸에 받는다. 이처럼 창작자와 시청자가 함께 공모하며 ‘연기하는 놀이(performance play)’로 친밀감의 정동은 강화된다. 실제 현실에서 이러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자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ASMR 방송에서 돌봄 받는 감정은 시청자인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구성되고 움직인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돌봄의 수혜자에게 권능감을 부여한다.

그런데 ASMR 방송의 속삭임과 돌봄의 행위에서 경험되는 ‘디지털 친밀감(digital intimacy)’ (Bjelić, 2016)이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상기시킨다고 ASMR 지지자들은 얘기한다. 엄마의 속삭임과 돌봄에서 느끼는 친밀감과 보호받는 안온감은 꼭 자신의 직접 경험의 상기이기보다는, 드라마 등 미디어에서 엄마의 재현, 수많은 담론에서 구성된 ‘엄마의 속삭임’, 즉 일종의 모성에 대한 사회적 상상에 기초한 것일지 모른다. 사실 모성적 친밀감은 앞서 역할극에서 수행되는 돌봄에서 느끼는 정동보다 더 강력하다. ASMR 방송에서의 서비스는 아무리 친밀해도 타인과의 사회적 거래인 반면, 모성적 속삭임과 돌봄은 무조건적인 이타적 사랑으로 신화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SMR에서 친밀성이 쉽게 모성 담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과거 경험에 대한 향수나 잊고 있던 정동의 귀환이 아니라, 모성 담론의 재생산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띤다. 이제 우리는 테크놀로지, 몸, 정동이 젠더 차원에서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논의할 때가 되었다.


5. ASMR 콘텐츠는 어떻게 젠더/섹슈얼리티와 연결되는가?

기술과학 철학자인 돈 아이디(Ihde, 2002/2013)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지각하고 움직이고 감정을 느끼는 몸의 차원(몸1)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지닌 몸의 차원(몸2)으로 분석적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테크놀로지는 이 두 차원을 가로지른다고 말한다. 이 절에서는 ASMR 영상에서 사회 문화적으로 의미화 되는 몸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를 ‘젠더/섹슈얼리티’ 차원에 주목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ASMR 방송에서 젠더/섹슈얼리티 차원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ASMR 창작자들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ASMR이 형성하는 쾌감과 돌봄의 친밀감이 모성 담론과 같이 여성성의 관념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ASMR 방송에서 이러한 측면과 관련된 담론들을 여기서 4가지 시선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시선 1: ASMR은 성적인 콘텐츠 인가?

앞서 논의한 것처럼, ASMR 방송 초창기에 서구 주류 미디어들과 일부 사람들은 ASMR 방송을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시키는 성적 콘텐츠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이런 시각은 다음과 같은 ASMR 방송의 세 측면에서 지지될 수 있다. 첫째는 창작자의 다수가 여자인 ASMR 동영상에서 성적 자극과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킬 법한 여성의 선정적인 행동(예를 들어, 귀모양의 입체음향(binaural) 마이크를 핥는 모습)과 몸짓, 그리고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특히 가슴, 목덜미, 입)를 강조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ASMR 창작자의 부드럽고 느린 속삭임, 조심스런 손의 움직임, 애무와 같은 쓰다듬고 어루만짐, 창작자와 시청자 간의 일대일의 친밀감의 강조는 마치 섹스 직전에 ‘전희를 위한 페티쉬(fetishistic)’로 간주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Miljak, 2017). 그러한 부드러운 방식의 쾌감이 기본적으로 남성가 다른 여성 취향의 ‘여성 포르노’라고 주장하는 사람(Brand, 2015)도 있다. 물론 폰섹스 등이 자위(masturbation)를 수반한 쾌락인 반면 ASMR은 팅글과 평안함의 쾌락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둘 다 여성의 나긋한 목소리의 속삭임 방식이나 ‘원격의 친밀감’의 공통점이 의혹을 제기하게 만든다(Hudelson, 2012; Andersen, 2015, p. 695).

둘째, ASMR 영상 창작자나 다수의 옹호자들은 ASMR의 성적인 성격을 적극 부인해도, 실제로 성적인 자극의 목적으로 ASMR 방송을 이용하는 시청자들이 존재하며, 이는 유튜브 댓글에서 확인가능하다. 더구나 사람마다 ASMR 자극에 대해 상이한 몸의 감각과 쾌감을 경험한다면, ASMR을 포르노그래피처럼 느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감상이나 이용이 틀렸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셋째, ASMR 동영상의 창작 동기가 수익 창출이며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그것은 가능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끄는 일이라는 점을 모두 알고 있다. 따라서 눈길을 끄는 섹스나 선정적인 영상 제작의 유혹이 항상 상존하고 실제 그런 방송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ASMR 콘텐츠를 이처럼 성적인 것으로 보는 시선이 ASMR 방송뿐 아니라 창작자와 이용자에 대한 사회문화적 편견을 만들기 때문에 ASMR 지지자들은 그러한 시선에 대해 격렬히 저항해 왔다(Andersen, 2015; Waldron, 2017).

그런데, 앞서 논의했듯이, ASMR 이용 동기의 다수가 ASMR 방송을 통한 긴장이완이며, 실제 그 효과가 최근 연구들에 의해 뒷받침 되면서 성적인 것으로 보는 시선은 약화되었다. 475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Barratt & Davis, 2015)에 따르면, 성적 자극을 위해 ASMR 미디어를 이용했다는 응답자는 불과 5%에 불과했고, 84%가 넘는 대다수가 그 의견에 반대했다. 한국의 연구 결과(육주원, 권은아, 윤신웅, 2018)도 다르지 않다. 연구자들이 성적인 몸짓부터 성적인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까지 폭넓게 ‘성적인 것’을 정의하여 200편의 ASMR 동영상 내용을 분석한 결과, ‘성적인 것’으로 분류된 것은 놀랍게도 단지 5편(2.5%)에 불과했다. 이들 연구자들은 ASMR 콘텐츠는 돌봄과 휴식 제공과 관련된 것이 지배적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볼 때, 비록 ASMR 콘텐츠의 재현들이 성적인 것을 연상시키거나 그와 유사해 보이는 요소들을 지닐 수는 있지만, ASMR의 본질적 특성을 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ASMR에 대한 협소하고 피상적인 이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적인 의혹과 혐의에서 벗어나고 있는 ASMR은 젠더/섹슈얼리티와는 정말 무관한 것일까?

2) 시선 2: ASMR은 ‘젠더화 된 수행’이다.

일부 미디어 문화연구자들은 ASMR 영상이 ‘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동의한다고 해도, ASMR 영상에서의 ‘젠더 수행(performance of gender)’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젠더 수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떤 점에서 그럴까? 그것은 섹슈얼리티와 어떻게 관계되는가? 연구자들은 여성의 전형적인 역할과 여성성으로 간주되어온 ‘돌봄과 친밀감’을 ASMR 영상에서 여성 창작자가 반복해 제공하는 것을 을 ‘젠더 수행’으로 본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이 기존의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를 ASMR 방송이 강화한다는 해석이나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슬린 앤더센(Joceline Andersen)은 ASMR 방송이, 이성애주의의 특권을 떠받치는 규범주의에 도전하는 새로운 친밀감 양식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기존의 성역할 각본에 따른 ‘젠더 수행’을 통해 다시 규범적 문화에 순응하는 모습도 지닌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Andersen, 2015). 이 절에서는 젠더 수행의 측면을 먼저 논의하고, 앤더센이 주장하는 AMR의 비규범적(nonnormative) 성격에 대한 주장은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앤더센은 ASMR 영상은 “여성들이 남성을 향해 연출하는 이형규범적인(heteronormative) 돌봄과 친밀성을 재생산하며 명백한 젠더 편향성을 보인다”고 지적한다(Andersen, 2015, p. 692).10) 이 주장의 근거로서 앤더센은 ASMR 창작자나 이용자들이 ASMR 방송에서 친밀감의 경험을 ‘엄마와 아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표현하는 점을 제시한다. 즉, ASMR 방송에서 친밀감이 상기시키는 환상, 향수, 기억이 엄마의 돌봄 역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ASMR 창작자들의 젠더 수행을 지적한다. 또한 앤더센은 ASMR 방송아 주로 창작자 자신의 사적 공간인 침대, 욕실 또는 집 안에서 진행되며, 치과위생진료, 소매업, 여행, 스파, 화장교습 등의 상황극의 역할도 사회에서 주로 여성이 맡는 역할임을 지적한다. 즉 이것들은 사회가 여성에게 할당해 온 가내(domestic) 작업을 반영하며 여성의 전형적인 성역할을 강조한다.

필자도 ASMR 영상이 젠더의 고정된 성역할을 강화하는 젠더 수행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현상의 판단과 그 함의에서 일정정도 다른 의견을 가진다. 첫째, 이성애 특권을 지탱하는 이형규범성의 근거로서, ASMR 방송에서 ‘여성들이 남성수용자를 향해 돌봄의 친밀성을 수행한다’는 앤더센의 언급은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 ASMR 창작자들 다수가 여성이라고 해서 그들의 수행이 곧바로 ‘남성 시청자를 향한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또 수용자 대부분이 실제로 남성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어쩌면 앤더센 자신이 ASMR 방송을 이성애 규범적 시선 아래 미리 가정한 결과가 아닐까? 아직까지 ASMR의 적극적인 이용자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조사 결과는 없으며, 실제로 ASMR 커뮤니티나 유튜브 코멘트나 피드백을 토대로 살펴도 그런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11)

어떤 여성 ASMR 창작자는 자신의 시청자의 80%가 30세 이하의 여성이며 이들 중 10대 후반의 여성이 압도적이어서 자신이 ASMR에서 ‘큰언니’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BBC, 2018.6.8). 같은 기사에서 어떤 남성 ASMR 창작자는 자신의 시청자는 거의 다수가 남성인데, 이들을 위해서 소비자 테크놀로지, 비디오 게임, 풋볼, 맥주 등에 대해 속삭인다고 말한다. BBC 기사가 인용한 여성 창작자 사례는 앤더센의 판단과 상충하고, 남성의 사례는 앤더센(Andersen, 2015, p. 693)도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러한 사례는 젠더 차원에서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필자는 바로 이 사례들에서 ASMR 영상이 고정된 성 역할과 이분법적 성 관념을 강화하는 젠더 수행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불평등한 젠더 위계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고 보는데, 정작 앤더센(2015)의 글에서는 불평등한 젠더 위계를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앤더센에게 젠더 수행은 ASMR의 친밀성의 쾌락을 이성애규범에 밀착시키는 효과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그는 ASMR에서 비형규범적 친밀성을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활용하지 못하고, 자꾸 ‘젠더 표식’을 찾거나 강화하여 (이성애) 규범적 친밀성에 가까워지는 것만을 유감스러워 한다(Andersen, 2015, p. 693).12)

여기서 규범적 문화를 강화하는 젠더 표식의 사례로 앤더센(Andersen, 2015)은, “남성 [창작자]의 속삭임은 소름끼치기(creepy) 쉽”고, “정동이 쾌락에서 공포(fear)로 변형된다”는 여성 창작자의 발언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는 고정된 젠더 관념을 드러내는 이 발언이 이성애적 규범을 강화하는 사례이기보다는 사회의 불평등한 젠더 위계의 효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남성의 속삭임’이 오싹하고 공포가 되는 이유는 남성이 해서는 안 된다고 간주되는 여성적 행위를 남성이 수행했기 때문에 나온 정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여성적 위치에서 체험하게 되는 정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번 반대로 가정해보자. 과연 여성이 남성적이라고 간주되는 방식으로 발화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특히 남성 청취자가) ‘오싹하고 두려운’ 정동을 경험할까? 아닐 것이다. 이것은 젠더 권력 관계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버틀러(Butler, 1990)는 고정된 젠더 이분법이 이성애주의를 비가시화하고 정당화시킨다고 지적하며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범주적 구분을 문제시 했다. 하지만, 젠더 범주의 교란이 꼭 이성애 섹슈얼리티 규범의 교란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분명히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그 역도 성립한다. 이성애 섹슈얼리티 규범의 교란이 젠더 범주와 규범을 흔들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항상 젠더 위계에 대한 전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곧바로 남녀 간의 젠더 권력관계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점을 상기한다면, 앤더센의 ASMR 영상에서 젠더 수행에 대한 해석은 젠더 권력관계 차원을 생략하고, 이성애주의의 섹슈얼리티 권력만을 비판하고 있는 한계를 노정한다.

이 때문에 앤더센(Andersen, 2015)은 오히려 ASMR 콘텐츠에서 고정된 젠더 규범을 교란시키는 젠더 수행의 측면을 놓치고 있다. 먼저, 남성 창작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ASMR 방송이 주는 효과를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남성적 발화는 남성적 권위와 신뢰를 강화하는 발화 방식, 즉 크고, 힘차고, 굵고, 절도 있고, 명료하게 발화하도록 기대된다. 그런 점에서 ASMR에서 남성의 속삭임은 기존의 남성성 관념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요리와 헤어스타일링 역할극을 하는 남성 창작자의 배려와 돌봄의 몸짓들도 기존의 남성성에 도전하고 고정된 젠더 이분법을 흐트러뜨리는 잠재성을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ASMR 현상의 젠더수행이 돌봄노동과 다수 여성창작자의 조합이 기존의 젠더 이분법과 젠더 권력관계을 강화하는 측면을 지니지만, 동시에 남성 창작자들의 증가 속에서 균열의 잠재성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제, ASMR 방송의 친밀감이 이형규범적 문화를 위반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앤더센(Andersen, 2015)의 주장을 엠마 왈드론(Emma Waldron)의 논의와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3) 시선 3: ASMR은 ‘이성애규범을 넘어선 대안적 쾌락’이다.

앤더센(Andersen, 2015)은 젠더 수행 자체보다도 사회문화적 규범에서 연인 간에 사적으로 허용되는 친밀감이, ASMR 동영상을 통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타인들 간에 ‘공개적으로’ 경험되는 측면에 주목한다. 그는 자신이 명명한, ASMR 방송의 ‘원격의 친밀감(distant intimacy)’이 ‘이형규범적(heteronormative) 문화’를 위반하고 단절하는 ‘비규범적’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제 그의 논리와 주장을 검토해보자.

앤더센(Andersen, 2015)은 버란트와 워너(Berlant & Warner, 1998)가 ‘공개적인 섹스(sex in public)’라는 논문에서 제기한 개념들과 주장을 자신의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삼는다. 이들 연구자들은 이성애주의를 교란시키거나 넘어서는 새로운 섹스와 다른 유형의 친밀감의 방식들을 모색하고 추구한다. 특히 이성애주의 규범의 섹스와 쾌락이 ‘사적인 친밀성’로 특징화 된다고 보면서, 이를 넘어서는 ‘공(개)적인’ 친밀감의 쾌락을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앤더센은 테크놀로지에 매개된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 (비록 참여자들은 일대일의 사적인 환영을 갖더라도) 공개적인(public) 방식으로 타인과 친밀감의 쾌락을 누리게 하는 ASMR 방송은 비규범적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3) 어쩌면 앤더센은 친밀감의 쾌락 정동의 네트워크에서 비독점적인 다자간의 사랑(polyamory)의 자유로운 열린 관계(박선희, 2017)를 은연중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앤더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ASMR 형식이나 유튜브 뿐만 아니라 인터넷 테크놀로지의 매개를 통해 타인과 ‘공개적으로’ 친밀감의 쾌락과 정동을 생성하는 콘텐츠라면 모두 비규범적 문화 실천으로 일반화되게 된다. 앤더센은 정말 이를 주장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비규범적 실천이 진정 이성애주의를 특권화 하는 규범들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아요’의 감정 피드백을 통해 작동하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정동의 역학(Gallagher, 2017)이 규범에 대한 도전을 의도치 않게 돕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까? 이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순수하게 이론적 가정이거나 형식논리학에 그칠 뿐, 어떤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엠마 왈드론(Waldron, 2017)은 수행이론과 정동이론에 기대어 좀 더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앤더센의 주장을 확대한다. 그 역시 ASMR 방송에서 여성성의 수행이 이뤄지지만 그 친밀감은 근본적으로 이형적 규범을 넘어서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앤더센(Andersen, 2015)과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왈드론의 논리는 앤더센과 좀 다르다. 앤더센은 ‘성적 실천’을 남녀 간의 성행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ASMR 방송의 이용을 성적 실천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왈드론은 섹스를 ‘이성애적인’, ‘두 몸’이 관련된, ‘성기 중심의 성행위’, 그리고 ‘오르가슴의 쾌락’에 관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대신 그는 ‘섹스’ 자체를 ‘쾌락, 친밀감, 돌봄으로 정의되는 육화된 실천의 배열(an array of embodied practices)’로 재개념화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ASMR 동영상에서 소리, 터치, 시각에 의해 생성되는 팅글의 감각들과 신체적 반응들, 매개된 접촉, 상대에 대한 주목은 관능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ASMR 동영상이란 여러 테크놀로지들(고감도 마이크, 카메라, 사운드 편집 소프트웨어, 헤드폰, 높은 정세도의 디지털 비디오 녹화기, 유튜브 플랫폼 등)의 결합체(assemblage)를 통해 육화된 관능적 촉감과 친밀성의 정동을 경험하게 하는 성적 실천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다시 말해, 왈드론은 성적 관계(sexual relation)를 ASMR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체를 매개하고 친밀성의 정동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집합체 간의 배치(configuration)로 본다. 이로써 그는 ASMR 동영상이 기존의 협소한 도덕체계와 ‘섹스’ 개념을 넘어 ‘지배적인 서구 패러다임 밖에 위치하는 대안적 섹슈얼리티’로서의 함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왈드론(Waldron, 2017)의 ‘섹스’, ‘성관계’, ‘성적 실천’에 대한 재개념화와 ASMR에 대한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섹스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ASMR이 ‘성적인 실천’임을 정면에서 주장하면서도, ASMR 문화형식이 비정상적인 실천으로 낙인 될 위험을 영리하게 피할 수 있게 된다. 즉, 왈드론의 주장은 이성애 규범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격이기 보다는 오히려 성 행위나 성 실천의 개념, 또는 몸의 다양한 쾌락을 성 실천(sex practice)으로 확대함으로써 이성애 규범주의를 탈특권화하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앤더센(Andersen, 2015)과 달리 왈드론은 ASMR 방송이 이성애를 지탱하는 이형규범적 문화에 ‘위반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이성애 규범과 “나란히” 또는 “대안적인” 쾌락의 원천을 제공한다고 표현한다. 이는 분명 인간과 인간만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가능한 다양한 쾌락과 친밀성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창의성에도 불구하고 왈드론의 긍정적이고 새로운 ASMR 문화실천에 대한 주장은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첫째,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왈드론의 재개념화와 성적 실천으로 파악된 ASMR 방송이 실제로 기존의 섹슈얼리티 관념과 권력관계를 불안정하게 하거나 해체하는 데 실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존의 규범적 섹슈얼리티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성애주의 규범에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ASMR이 성적 실천이라면 이 성적 수행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주체는 어떤 것일까? ‘대안적’인 것은 지배적인 것의 특권적 지위를 가시화하면서 상대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하지만, 때론 지배적인 것을 보충하며 그 절대성을 유지하는데 이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ASMR의 쾌락이 기존의 섹슈얼리티의 규제에 어떻게 관계되거나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과 연구가 요청된다.

둘째, ASMR을 둘러싼 성의 실천과 관계가 기존의 불평등한 젠더 권력 질서에 대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왈드론(Waldron, 2017)도 ASMR이 젠더화 된 정동 수행을 수반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앤더센(Andersen, 2015)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젠더 권력구조와 맺는 관계와 작용에 대해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는 점이 의아하다. 그러한 논의 생략은 ASMR 동영상의 ‘내용’ 차원이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매개하는 ASMR 동영상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왈드론과 앤더센 모두 젠더 권력관계의 문제를 모두 섹슈얼리티 문제로 떠넘기고 있다는 의구심을 제기할 수 있다. ASMR 방송이 테크놀로지 장치에 의해 가능해진 성관계이며 쾌락이라고 주장한다면, 왈드론은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젠더와 관계 맺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 권력관계는 상호 규정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에겐 대안적 섹슈얼리티와 테크놀로지의 실천이 젠더 범주와 위계적인 젠더 권력 질서를 어떻게 교란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겨져 있다.

4) 시선 4: “ASMR 젠더/섹슈얼리티 수행은 변화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시선들에도 불구하고 앞서 논의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ASMR 방송이 기존의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권력 관계, 관념, 수행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또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ASMR 방송을 어느 정도 통일되고 안정된 대상이나 현상처럼 취급한다. 테크놀로지로 폭 넓게 가능해진 ASMR 만의 독특한 특질들, 구체적으로는 다른 소리 감각을 통한 쾌감과 친밀성의 수행을 어떻게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적 태도와 비전은 결여되어 있다.

필자는 앞선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더 나아가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차원에서 ASMR의 실험과 실천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추구는 예술가이자 ASMR 콘텐츠 창작자인 클레어 톨란(Claire Tolan)에 의해 효과적으로 대변될 수 있다. 필자는 이를 젠더/섹슈얼리티 차원에서 ASMR 문화 실천에 대한 제 4의 시선으로 간주한다.

클레어 톨란의 수행적 실천과 그 가치는 미란다 아이어시피디스(Miranda Iossifidis)에 의해 명료하게 소개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14) 톨란은 주디스 버틀러(Butler)와 도나 해러웨이(Haraway)의 영향 아래, “자신의 젠더화 된 역할 수행을 뒤틀어버리는 욕망”을 ASMR의 소리 예술에서 실천한다(Iossifidis, 2017, p. 113). 그 방법은 여성화 된(feminized) 역할이 “여성성의 풍자”로 변화되도록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젠더 수행이 모방하는 이상적인 젠더 관념은 ‘가정된 것’이기에 그 자체로 완전히 구현할 수 없으며, 결국 젠더 수행에는 “구성적 실패”가 내재하고 있으며 균열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버틀러(Buterler, 1990, p. 359)의 지적을 상기시킨다. 톨란의 젠더 실험은 목소리 발화방식에서도 이뤄진다. 예를 들어, 톨란은 흔히 이상적인 남성적인 목소리로서, 그래서 여성화 된 목소리에서는 배제되는, ‘든든하게 안심시키는’ 톤을 사용함으로써 여성적 소리내기의 변형과 확장을 시도한다. 그 ‘기묘한 친밀감’은 ASMR 창작자와 청취자 간의 안정적이고 쾌락적일 수 있는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젠더에 관한 성찰을 유도한다.

사실 그녀의 실험은 기존의 젠더 관념을 불안정하게 하는 것 이상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쉿! 가라오케’라는 공연이다. 여기서 톨란은 진행자의 역할을 맡아서, 무대 위에 여러 구절이 쓰인 스크린을 띄우고, 군중들이 ASMR 영상 특유의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 구절들을 돌아가며 소리 내게 한다. 이때 톨란의 목소리와 다중의 목소리가 함께 어울려, 서로에게 쾌감과 위로를 낳는 친밀감의 정동을 생성하고 교감한다. 이는 아이어시피디스의 표현대로 ASMR의 “생산과 유통의 형식과 모델을 바꿔”버리는 수행이 아닐 수 없다(Iossifidis, 2017, pp. 113-114). 여타의 ASMR 방송이 제공하는 창작자와 청취자의 일대일의 환영적인 사적 관계는 공연장이라는 공(개)적인 공간에서 다중이 참여하는 ‘분산된’ 접촉과 탈중심화 된 관계로 변형된다. 이처럼 돌봄을 집단적으로 분배하고 동시에 협동적으로 창조해 냄으로써, 톨란은 친밀한 돌봄의 관념을 집합적으로 재개념화 할 뿐 아니라 젠더화 된 돌봄과 헌신의 규범을 심문하고 교란한다.

또한 형식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도 실험적으로 개입한다. 예를 들어, 속삭임의 목소리로 다양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세상에 당신의 아이디어를 줘서 고마워요” 또는 “이 메시지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까요?”) 담은 모닝 알람 등을 만들기도 한다. 그는 음악 연주회, 미술 갤러리 등 다양한 공간에서, 또 유튜브에서 아이튠즈까지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ASMR 작업을 진행한다. 또한 새로운 청각적 자극과 쾌감을 주는 다양한 현장의 실제 소리도 녹음해서 인공지능 핸드폰 벨소리를 대체하기도 한다. 이로써 그는 “청취자와 테크놀로지의 관계를 질문하면서 ASMR의 변형적 잠재력을 작동”시킨다(Iossifidis, 2017, p. 114). 즉, 톨란은 ASMR의 생산과 유통, 소비 공간을 변화시켜서 생산자와 청취자의 관계 성격을 변화시키고, 대등한 동료와 동료 사이의 돌봄도 탐색한다. 그는 몸, 젠더, 테크놀로지기 접합방식과 과정을 실천적으로 변형(이동후, 김수정, 이희은, 2013)함으로써 젠더/섹슈얼리티의 범주를 교란시킨다.

맥루한은 예술가들이야말로 미디어가 메시지이자 마사지(massage)임을 깨달은 자들로 간주한다. 맥루한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자신의 지식은 모두 예술가들의 통찰에서 얻은 것임을 고백하며, 예술가란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표현을 위해 가능한 수단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사람들이었다고 지적한다(McLuhan & Steines, 2003, p. 126). 인류의 생존을 지켜주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맥루한의 강조는 클레어 톨란의 ASMR 작업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아이어시피디스의 훌륭한 논평이 전달하는 톨란의 개입적 실천의 함의는 다음의 두 문장으로 집약해 볼 수 있다. “톨란은 ASMR 공동체를 조롱하지 않고, 그렇다고 돌봄 작업을 가치절하 시키지 않으면서도 젠더화 된 돌봄의 관념을 교란시킨다.” 그리고 “유튜브를 넘어서 ASMR의 형식, 내용, 유통을 실험함으로써”, “동시대 디지털 문화에서 돌봄과 그 표현의 한계에 관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Iossifidies, 2017, p. 113). ASMR 문화현상을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 비판적 시선들이 어떻게 더 비판적으로 확장되고 실천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톨란의 사례가 미디어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6. 나가며: ASMR 방송의 가능성을 향하여

본 연구는 유튜브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중문화로 부상하고 있는 ASMR 방송을 미디어 문화연구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사회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사유하고자 했다. 본문은 먼저 ASMR에 대한 담론 지형을 개략적으로 기술하며 시작했다. 즉, ‘뇌오르가즘’이라는 용어만큼 초기에 서구 주류 언론들로부터 의혹을 받았던 ASMR 방송이, 비성애적 몸의 쾌감과 다양한 심신의 평안 효과를 강조하는 ASMR 이용자들의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심리학 연구논문들이 나오면서 그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뒤늦게 시작된 한국에서는 ASMR 콘텐츠 등장 초기부터 수면유도와 같은 심신에 주는 순기능을 위주로 미디어 담론이 형성되었음을 기술했다.

미디어 문화연구 관점에서 전개된 ASMR에 대한 본격적인 사유는 세 가지 차원에서 이뤄졌다. 첫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구현된 ASMR 콘텐츠가 청각중심의 지각과 몸의 쾌감을 위한 새로운 문화형식이라는 점에 주목해,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감각 및 지각의 새로운 관계가 인간의 실존적 경험과 사회에 주는 영향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탐색하였다. 이를 위해,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적 측면에서는 마셜 맥루한에 기대어 ASMR 방송을 인간의 감각비율의 사용의 변화를 일으키는 테크놀로지로서 볼 것을 주문했다. 이로써, 시각 지배적인 테크놀로지에 의존해 발전시켜 온 기존의 지배적인 인식 패턴과 사회적 조직에 대해 앞으로 ASMR 방송이 끼칠 영향이라는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고찰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했다. 또한 ASMR의 경험이 실존적 차원에서 사물과 인간의 연결성, 그리고 의미를 건너뛰는 물질성에 기초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특이성을 지적했다. 이를 통해 필자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한 소리 자극과 청각 지각 체험에 대해, 기존의 시각과 언어를 토대로 작동해온 차이체계와 의미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인간 경험과 세계의 확장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두 번째 논의는 ASMR의 감각적 경험이 더욱 쾌감적인 이유를 ASMR을 매개로 창작자와 이용자 사이에 형성되는 친밀감의 정동 때문이라고 보고, 이 정동이 어떻게 테크놀로지를 통해 매개되고 작동하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즉, 개별적인 ‘몸의 감각 차원’과, 그 개별성을 넘어서는 ‘몸의 사회적 차원’을 서로 중첩시키고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친밀감의 정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친밀감의 정동이 ‘속삭임’과 ‘돌봄’의 구성적 실천을 통해서 형성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감정이라는 용어보다 정동이라는 용어를 본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친밀감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정동이론, 또는 정동개념은 테크놀로지의 매개를 통해 개인들 간에 형성되는 감정의 초개체적인 운동성을 추적할 수 있게 하며, 개인들 간의 관계 형성과 성격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즉, 정동의 용어는 몸 간의 관계 및 물질적 차원에 주목할 수 있게 한다.

ASMR 문화 현상에 대한 세 번째 논의는 테크놀로지 장치를 통해 경험되는 청각 감각과 사회적인 친밀감의 정동이 젠더/섹슈얼리티의 차원에서 어떠한 성격을 지니며 어떠한 한계나 변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다. 이 논의는 주로 여성 창작자들이 수행하는 친밀한 터치와 쾌락, 돌봄으로 구성된 ASMR 콘텐츠의 특성이 여성 젠더에 대한 고정 관념, 이미지, 역할을 강화하고 불평등한 젠더 위계를 재생산한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필자는 ASMR의 젠더화 된 수행을 하는 여성과 남성 창작자가 전통적인 성 역할의 각본대로 쾌감과 친밀성을 구축해 나간다면, 분명 ASMR 공간은 젠더 이분법과 고정관념에 의해 구조화되며 기존 젠더 질서를 강화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남성 창작자들이 기존의 여성적 특성으로 여겨진 속삭임, 주목, 돌봄을 반복 수행하는 것은 여성을 돌봄 제공자로 배타적으로 인식하는 젠더 관념에 도전하는 잠재성 역시 지닌다고 보았다. 그 양가성이 균형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ASMR 문화 실천에서 젠더 수행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놓고자 했다.

ASMR 방송은 한편으로는 새롭고 다양한 소리로 소리 정경(soundscape)을 넓혀가며 젠더적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창출의 디지털 주목경제 원리 아래 유사한 자극과 내용을 상호 복제하여 일정한 패턴과 양식으로 정형화되어 가며 기존의 젠더 상상력과 관습으로 그 새로운 공간을 영토화 하는 모습을 현재 노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상태에서는 ASMR 문화의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과 젠더 정치 차원의 함의를 예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논의에서 오히려 주목할 만한 최근의 주장들은 젠더 권력 관계에 있어서 젠더 수행의 함의가 아니라, ASMR 문화형식 자체를 이형규범적 문화에 도전하거나 대안이 되는 성의 실천으로 재개념화 하려는 시도에 있다. 새로운 성 실천으로서 ASMR을 보는 시선은 기존에 남녀 간의 직접적 신체적(특히 성기 중심적인) 결합만을 성적 실천으로 특권화 해온 이성애주의 규범을 불안정하게 하고 탈중심화 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론적 개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선이 현실적 효과를 만들어내려면, 섹슈얼리티 실천과 관계에 개입하는 소비자본주의 경제의 권력 규제와 이와 연동되는 테크놀로지 활용 및 작동논리, 그리고 젠더 위계의 문제가 함께 고찰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절에서는 현재의 ASMR 문화형식을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지 않고, 그 자체를 변용시키려는 비전, 그래서 젠더/섹슈얼리티의 규범과 규제를 비트는 비판적 실험과 실천이 필요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ASMR에 대한 실험적 태도와 프로젝트를 통해서 젠더적 수행을 변화시키고, 헤게모니적 젠더/섹슈얼리티 관념들에 도전하는 클레어 톨란의 작업을 소개했다.

ASMR이라는 비교적 연구되지 않은 대중문화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사유하면서 학술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본 연구의 방식이 지니는 한계는 ASMR 현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제공하고 있지 못한 점이다. 다양한 유형과 방식의 ASMR 동영상에 대한 꼼꼼한 분석들, 창작자들에 대한 분석들, 이용자들의 분석이 긴급하게 요청된다. 그러한 후속 연구들 속에서 ASMR 방송과 여타의 유튜브 방송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네트워크로 매개되는 친밀감은 결코 ASMR 문화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그 친밀감이 청각 감각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방식이 어떤 특이성인가가 좀 더 분명해질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러한 경험적 연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ASMR 문화현상에 대한 여러 관점과 문제의식, 쟁점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ASMR 문화의 정치적 가능성은 ASMR 방송을 우리의 수행 실천을 통해서 구성되는 문화형식이자 테크놀로지로 인식하는데서 시작될 수 있다. ASMR 문화현상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 감각, 정동, 그리고 젠더/섹슈얼리티의 관계에 대한 이 글이 부족하나마, 다른 사유를 어떤 측면에서든 자극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ASMR 방송에 대한 많은 경험적 비교 분석과 논의들이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Notes
1) 이 글에서는 ‘팅글’ 또는 ‘팅글링’ 용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2) 한국에서는 2013년 후반기에 4-5명의 ASMR 창작자들이 등장했으며, ‘미니유’ ASMR이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헤럴드 경제, 2018.8.3).
3) ASMR 동영상 크리에이터는 영어권에서는 ASMRist로 주로 표기되며 ASMR creator로도 불린다. ASMR 커뮤니티 내에서는 소리를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ASMR artist라고도 불린다. 본 연구에서는 ASMRist을 ASMR 창작자로 부를 것이다.
4) 젊은 한국인 여성 창작자가 만드는 ‘ASMR PPOMO 뽀모’ 채널은 현재 323개의 동영상이 게시되어 있으며, 총 조회 수는 3억 410만이며, 개별 동영상 중 최고 조회 수는 1천 410만에 이른다(2018.8.5 기준 자체검색). 7개국의 언어로 자막을 넣고 있다(미디어투데이, 2017.3.26). 2017년 3월에 39만 명의 독자수를 지녔던 ‘뽀모’가 1년 반 만에 구독자가 무려 3.5배 증가한 것은 이례적이다.
5) 2016년 10위까지 순위(2016.3.15. 구독자 수 기준)에서 1위는 ‘GentleWhispering’ ASMR로 당시 약 919만 명이었다(Waldron, 2017).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현재(2018.8.5. 기준) 당시 10위 중 4명만 현재의 10위에 포함되고, 새롭게 6명이 진입했는데 이중 3명이 한국인 창작자이다. 현재 1위는 ‘Satisfying Slime ASMR’(약 222 만 명)인데, 이 영상에서는 슬라임을 만지는 손동작만 나타난다. 얼굴의 일부라도 포함한 경우만 고려한다면, ‘ASMR Darling’이 1위(약 186만 명)를, 한국인 창작자 ‘뽀모’가 2위(142만 명)가 된다. 3위 GentleWhispering(약 141만 명), 4위, Gibi ASMR(약 117만 명), 5위 ASMR SUNA(약 86만 명), 6위 Mpatient13(약 78만명), 7위 FrivolousFox(약 ASMR 72만 명), 8위 MassageASMR(약 69만 명, 남성), 9위 WhispersRed ASMR(약 54만 명), 10위 Latte ASMR(약 53만 명, 한국인)의 순서이다.
6) 2016년 3월 왈드론(Waldron, 2017)의 유튜브 검색결과에 따르면, 세계 인기 순위 10위에 드는 ASMR 채널 중창작자 10명 중 8명이 여성이었다. 2018년 8월 필자의 유튜브 검색결과에 따르면(2018.8.5. 기준), 10위 순위에서 9명이 여성이고, 20위에서는 여성이 15명(75%)으로 나타났다. 국내만 한정해 보면, 2017년 2월 육주원 외(2018, 333쪽)의 20위 검색결과에 따르면, 여성 창작자가 17명(85%)으로 나타났다.
7) 각 영역에서 담론은 ASMR에 대한 행위자 각각의 관점, 경험, 지식, 믿음 체계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기에 물론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의 설명은 지배적인 경향을 가늠하는 수준에 머문다.
8) 맥루한은 신문 테크놀로지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녔지만 ‘집단적인 태도를 형성하거나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모순을 지적(1964/2011, 374쪽) 한다. 이는 그가 테크놀로지 결정론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9) 김예란(2018)의 정리에 따르면, 정동(affect)이란 개별 주체들의 몸에서 체험되는 운동으로서 개별 주체를 존재하고 행위 하게 하는 힘이며, 초개체적 차원에서야 온전히 파악될 수 있는, 관계 내에서 진행되는 생성적이고 변이적인 운동이다(52). 정동(affective)과 감정(emotion)의 개념 차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필자는 ‘정동’을 그 운동성과 변이의 잠재성이 강해서 사회적인 의미가 아직 비결정된 상태를 지칭할 때 사용하며, ‘감정’은 정동의 체험이 사람들 간에 언어로 소통 가능할 만큼 구체적 의미를 지닐 경우에 사용한다. 즉, 필자는 정동과 감정 간에 본질적인 차이를 가정하지 않으며, ‘정동’의 운동성과 변이의 잠재성이 약화된 상태를 ‘감정’으로 한주하기 때문에, 두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한다.
10) 버란트와 워너(Berlant & Warner, 1998, p. 548)는 이성애주의를 ‘일관되고 특권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제도, 관념, 실천지향을 ‘이형규범성(heteronormativity)’로 정의한다. 이형규범성(heteronormativity)은 이성애(heterosexuality)와 유사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버란트와 워너는 ‘어떤 특정 상황’에서는 남녀 간의 섹스의 형태도 이형규범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직접적으로 성적 실천과 관련 없어 보이는 ‘삶에 관한 내러티브’도 이형규범적일 수 있다. 또한 이형규범성(heteronormativity)과 이성애(heterosexuality)와 구분되는 점은 전자가 어떤 대칭어를 가지지 않는 데 반해 후자는 ‘동성애’라는 대칭어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본 연구자는 연구자들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이성애규범성’대신 ‘이형규범성’으로 번역했다.
11) ASMR에 대한 칼럼을 쓴 훠덜센(Hudeson, 2012)의 글에서 한 여성 ASMR 창작자가 자신의 ASMR 수용자 중 70%는 남성이라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마치 한 사례를 일반화된 조사결과인양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12) 필자는 섹슈얼리티 차원에서는 앤더센(Andersen, 2015)의 입장을 더 강하게 밀고나가서, ASMR 방송의 잠재성은 비규범적(nonnormative)인 성격을 넘어서 이성애주의에 대해 분명한 반규범적(counter-normative) 함의까지 타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기의 인용들에서 드러나듯, 여성들끼리 또는 남성들끼리의 ASMR 커뮤니티에서 경험하는, 몸의 쾌락에 수반되는 친밀성의 정동은 동성애의 잠재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13) 주류 사회에서 부정적인 낙인을 피하고자 ASMR은 ‘성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거나 ‘ASMR은 성적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ASMR 커뮤니티들에게는 ASMR이 이형규범적 문화에 ‘위반적이라는’ 앤더센(Andersen, 2015)의 주장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14) 클레어 톨란(Clair Tolan)의 ASMR 실험적 수행에 대한 설명은 <페미니스트 미디어 연구(Feminist Media Studies)>에 실린 아이어시피디스(Iossifidies, 2017)의 논평에 의존하였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7년 충남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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