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호

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35 , No. 1

[ Article ]
Journal of Social Science - Vol. 32, No. 1, pp. 127-144
Abbreviation: jss
ISSN: 1976-2984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1 Jan 2021
Received 25 Nov 2020 Revised 27 Dec 2020 Accepted 27 Dec 2020
DOI: https://doi.org/10.16881/jss.2021.01.32.1.127

분단독일에서 상호주의의 실천과 남북관계에 주는 시사점
김학성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Reciprocity in Inter-German Relations and Implications for Inter-Korean Relations
Hak-Sung Kim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김학성,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전시 유성구 대학로 99, E-mail : hskim03@cnu.ac.kr


초록

한국사회에는 남북교류협력을 둘러싸고 남남갈등이 존재한다. 핵심 쟁점은 상호주의의 적용 방식에 관한 것이다. 상호주의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는 갈등을 소모적으로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먼저 상호주의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개괄을 시도한다. 이론별로 상호주의 개념이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한국사회가 모범적이라고 평가하는 독일사례에서 상호주의가 어떻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는가를 되돌아본다. 독일사례에서는 상호주의의 적용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동서독기본조약 체결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그 특징들을 분석한다. 결론에서는 이에 기대어 한반도에서 적절한 상호주의의 적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Abstract

There is in South-Korean society a south-south conflict over inter-Korean exchange and cooperation. The key issue concerns which forms of reciprocity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should be applied and hos. Inaccurate understanding among South Korean people tends to lead the conflict into unproductive political and social troubles. Therefore, this paper first attempts a theoretical overview of the concept of reciprocity, especially because that concept is understood differently under each theory. Based on this, this study looks back on how reciprocity was understood and practiced in the division and reunification of Germany, which most South Koreans regard as a model for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e German case is analyzed by dividing it into the periods before and after the 1972 signing of the Basic Treaty, which shows the differences in the application of reciprocity. Leaning on the concept of reciprocity and the analysis of the German case, this paper summarizes what is necessary for the proper application of reciprocity on the Korean Peninsula.


Keywords: Reciprocity, Inter-German Relations, Inter-Korean Relations
키워드: 상호주의, 동서독 관계, 남북관계

1. 문제제기

남북교류협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며 한반도 내외의 환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중에서 한국사회가 간혹 잊거나 외면하는 것이 있다. 크게 보면 부정적 대북인식이고, 더욱 구체적으로는 교류협력의 방법에 관한 갈등이다. 혹자는 북한의 핵개발과 무력도발, 미·중갈등 등이 훨씬 높은 비중을 가진 이유라고 생각하며, 남한의 그러한 대내적 원인은 가벼운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단기적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도 보인다. 그렇지만 남북교류협력을 단지 사업적 성과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한반도의 지속적 평화와 나아가 통일을 향한 초석 마련이라는 목표와 연결시킨다면, 그러한 대내적 원인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한국사회에서 남북교류협력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실천적 방법론에 들어가면, 심각한 균열과 논쟁이 드러난다. 그 쟁점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상호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상호주의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 1998년 4월 북경에서 남북차관급 회담이 개최되어 대북 식량·비료지원과 관련된 대화가 시작되자 정치권과 언론을 필두로 대북지원의 대가로 받아야 할 등가적 가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가운데 ‘상호주의’(reciprocity)1) 개념이 부상했다. 당시 남북한 사이에 주고받을 것의 등가성에 대한 논의가 국민적 관심사가 된 상황에서 여론의 부담을 느낀 김대중 정부는 첫 남북협상을 과감하게 진행시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교류협력이 점진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자 상호주의를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에 관한 논쟁이 소위 ‘남남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보수 측에서는 ‘엄격한’ 상호주의라는 이름하에 즉각적이며 등가적인 ‘주고받기’(TFT: Tit for Tat) 방식을 원칙으로 내세우는 반면, 진보 측에서는 ‘느슨한’(또는 ‘신축적’) 상호주의 내지 ‘포괄적’ 상호주의를 주장하면서 반드시 즉각적일 필요가 없으며, 등가성의 계산도 매우 유연하고 포괄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렇듯 상호주의에 관한 상이한 관점의 충돌 속에 언론의 혼란스러운 개념 사용은 남남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쟁의 부정적 효과를 감소시키는 동시에 향후 남북 교류협력의 의미 있는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상호주의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더불어 분단국에서 상호주의의 실제 적용사례를 일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사례분석과 관련하여 한국사회가 모범적이라고 평가하는 독일사례로부터 시사점을 찾아보는 것은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1970년대 초부터 역대 한국정부의 통일정책은 서독의 독일정책(Deutschlandpolitik)에서 많은 부분을 원용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독일의 경험이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해도 동일한 효과나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사례에서 적절한 시사점을 찾아서 창조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마저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독일사례는 전례가 드문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조건들뿐만 아니라, 통일이후 통합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분단시기 동서독이 서로 신뢰를 창출하고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과정을 상호주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국제정치학에서 상호주의는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이지만, 이론에 따라 그 의미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동서독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상호주의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시사점, 특히 한반도에서 상호주의의 적용방식에 관한 논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할지를 간략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2. 상호주의 개념의 다양한 이해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는 상호주의 개념이 “행위자(개인, 단체, 국가 등) 사이에 합리적이고 적절한 이익(또는 손해)의 교환행위 방식”을 의미한다면, 이는 게임이론을 위시한 전략이론, 흥정을 위한 협상이론, 제도주의이론 등의 국제정치이론에서 협력을 가능케 하는 주요 조건으로 간주되는 ‘상호성’ 개념과 상응하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행위자들 사이에 상호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협력이나 교환행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호성은 그리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론들에서는 행위자들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상호성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예컨대 상호성에 관한 판단기준이나 교환(또는 협력)행위에 대한 평가 내지 판단 등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즉 이론에 따라 매우 다르게 이해될 여지가 크다. 따라서 상호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대한 간략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그 관점들을 분류해보면, 크게 ‘행위이론’과 ‘구조이론’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행위이론은 행위자의 전략행위를 독립변수로 간주하여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며, 이와 대비되어 구조이론은 제도를 행위의 독립변수를 간주하여 행위보다 제도에 더욱 주목한다. 물론 행위이론이 모든 종류의 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를 외부환경요소로서 부차적이거나 행위의 결과물로 간주하여 언제나 행위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이론들은 행위와 구조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방식이 있으며, 특히 행위와 구조의 상호 관계를 서로 다르게 판단한다. 그 판단 기준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행위논리’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효율성’에 관한 것이다(March & Olsen, 1998, pp. 949-954).

행위논리와 관련하여 이론적으로는 대체로 두 가지 시각이 상호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결과주의의 논리”(logic of consequentialism)로서 특정 선호 또는 이익추구의 합리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며, 다른 하나는 “적합성의 논리”(logic of appropriateness)로서 행위를 결정하는 정체성 내지 규칙적 기반에 초점을 둔다. 또한 역사의 효율성과 관련하여 역시 두 가지 시각이 경쟁하고 있다. 하나는 역사를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익과 자원에 의해 형성된 유일한 균형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과정(course)으로 간주함으로써 역사를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이에 비해 다른 하나는 역사를 다양한 균형과 이익 및 자원의 내재적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미로를 따르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상이한 견해를 기준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면, <그림 1>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그림 1> 
사회질서의 동력에 관한 관점의 분류

출처: March & Olsen, 1998, p. 957.



일반적으로 상호주의의 개념은 위 그림에서 “기능적 합리성”에 속하는 이론들에 의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그중에서도 이익 극대화를 위한 전략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합리적 행위이론은 상호성을 전제로 하는 게임이론을 고안했다. 특히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이론가들은 무정부상태의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이익이 생존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를 담보할 수 있는 TFT 방식의 상호성 추구를 합리적 행위로 간주한다. TFT 방식에는 교환가치의 기준과 교환시점에 대한 특정한 시각이 있다. 즉 교환가치의 기준에서는 항상 ‘상대이득’(relative gains)을 강조하기 때문에 TFT의 결과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주는 것은 금물이며, 무정부상태로 인한 상호불신 탓에 교환시점 역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게임이론에서 잘 드러나듯이 합리적 행위이론이 가정하는 TFT 방식의 상호성 실천은 사회의 현실과는 일정한 괴리가 있다. 행위자들의 일상적 교환행위 속에서는 항상 등가적이지도 또 동시적이지도 않은 결과들이 빈번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현실적이든 이론적이든 분명한 이유들이 있다. 무엇보다 교환하는 대상의 가치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특히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교환에서 가치의 정확한 측정은 항상 어렵다. 또한 현실 사회에서 상호 교환행위는 단지 말이 없는 게임이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다(Müller, 1994, p. 24; Risse-Kappen, 1995, p. 176). 대체로 협상을 통한 흥정은 정보에 대한 비대칭성이 전제된 경우가 적지 않다. 정보가 충분하기 않을 경우, 가치의 정확한 추산은 더욱 어렵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게임은 일회적이지 않고 반복된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학습효과는 제도를 태동시키기도 한다. 즉 현실의 게임은 결코 제도의 진공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제도에 주목하는 신자유제도주의 국제정치이론은 무정부상태에서도 국가들이 제도 덕분에 상호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제도는 국제규범 형성, 교환비용(transaction costs) 감소, 정보의 투명성을 증대하여 시장의 실패를 억제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제도가 그렇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으로서 국가들 사이의 ‘특화된 상호성’(specific reciprocity)과 ‘분산된 상호성’(diffuse reciprocity)이란 개념이 제시되기도 한다(Keohane, 1989, pp. 137-151). 신자유제도주의는 합리성을 강조하는 제도 개념과 더불어 현실주의와 대비되는 ‘절대이득’(absolute gains) 개념을 도입하여 TFT 방식을 넘어서 더욱 풍부한 상호성의 실현 방법을 설명했다.

기능적 합리성 범주에 속하는 이론들이 상호성 개념을 기반으로 행위자들 사이의 협력 가능성을 설명한다면, 구조를 중시하는 이론들은 국가간 협력의 근거와 과정을 구조적 요인과 결부시킨다. 예를 들면 공동체, 정체성, 문화, 규범 등이 협력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행위자의 모든 행위가 전략적 계산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그 기저에 문화나 규범과 같은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전략적 행위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무엇이 이익인지가 규정되어야 하며, 그 이익은 국가의 문화 내지 규범이 반영된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리적 행위이론이 말하는 협력행위의 상호성은 이미 국가의 문화와 정체성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Wendt, 1994, pp. 385-388). 즉 어떠한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는가에 따라 국가간 상호성의 실천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요컨대 구조이론에서 상호성은 단지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에 적합한지 여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지향적이기보다 과정지향적인 성격을 띤다.

이렇듯 상호주의 개념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며, 현실적으로는 각 사회의 규범 및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능적 합리성으로 분류된 이론들이 생각하는 상호주의는 정책 및 전략을 모색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으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비록 합리주의 이론이 정책의 효율성 측면에서 강점을 가지나, 이것만으로 정책의 정당성 문제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행위이론과 구조이론이 항상 배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론적으로는 배타적으로 보이나 현실세계에서는 대체로 매우 미묘한 상호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현실의 행위자는 반드시 완벽하게 결과만을 계산하는 목적합리성이나 규범 중 어느 하나 만을 따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행위전략이 규범에 맞게 구성된 것이라면, 이를 바탕으로 상호작용을 통해 축적된 경험은 상호주의를 판단하는 강력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교환 및 협력 행위에 어떠한 상호주의가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행위이론과 구조이론을 두루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상호성을 강조하는 행위이론의 논리를 무턱대고 국가간의 협력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기보다 각 사회의 문화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동서독 관계에서 작동한 상호주의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3. 동서독 관계에서 상호주의의 실천방식들2)

1949년 동서독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동서독 관계에 적용된 상호주의는 1972년 공식적 관계 정상화를 이룬 시점을 전후해서 큰 차이를 보인다. 1972년 12월 21일 「동서독 기본조약」(Grundlagenvertrag)이 체결된 이후 동서독 관계는 당국간 대화를 통한 교류협력의 제도화를 점진적으로 이루기 시작했다. 물론 기본조약 체결 이전에도 동서독 사이에 교류가 있었으나, 관행적 내지 비공개적이거나 사안별로 이루어짐으로써 안정성 및 지속성이 담보되지 못했다. 요컨대 기본조약 체결이전에 작동한 상호주의는 4대강국의 점령시기에 시작되었던 관행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새로운 이슈에 대해서는 이슈별 TFT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더욱 느슨하고 비등가적인 상호주의가 점차적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1)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전의 교류협력 사례들

이 시기동안 동서독 정부는 상호 대결과 경쟁에 주력하는 가운데 1970년까지 공식적인 대화에 나서지 않았으나, 점령시기 전승국에 의해 마련된 제도를 기반으로 비정부 차원 또는 비공식적인 형태의 교류를 유지했다. 서독정부는 동독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데 반해, 동독정권은 1950년대말 이후 대서독 관계를 국제관계로 간주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서로 대립했으나, 인적·경제적 교류와 체육 교류는 거의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쌓은 데 대한 서독정부의 반발로 몇 개월동안 경제교류를 비롯하여 인적 교류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 예외적으로 체육교류의 경우에는 1965년까지 단절되기도 했으나, 국제적 차원에서 체육교류는 끊임이 없었다. 특히 1956년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이후 1964년 동경 하계올림픽까지 단일 국기와 국가 아래 동서독 단일팀이 참가했다.3)

1950년대 동서독 정부는 냉전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전후 복구와 패전국의 지위를 벗어나기 위한 국가적 과제를 안고 각각의 정치·사회·경제체제 건설에 몰두하며 상호 경쟁했던 탓에 상호 관계는 전략적인 성격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서독 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동독주민의 서독으로 탈출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독은 인도적 차원에서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보인 반해, 동독은 탈출을 막을 수 있는 방안 마련에 골몰했다.

1960년대 초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고, 곧이어 미·소 데탕트가 시작되자 동서독은 당시의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분단이 조만간 극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Ludz, 1974, pp. 47-49). 이후 서독정부는 교류협력의 확대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 동서독 사이의 교류협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는 정치범 석방거래, 동서독 교류분야의 확대, 이산가족 및 친지의 상호방문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를 통해 서독은 인도적 문제와 분단의 고통을 감소하려 했던 반면, 동독은 동독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는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했다.

(1) 인적 교류 및 인도적 사안

동서독 교류의 출발점은 1945년에서 1949년까지 전승 4대국의 분할 점령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점령당국은 규정을 제정하여 독일인들의 점령지역간 여행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1946년 가을부터 타 점령지역으로 여행하는 모든 독일인은 “점령지역간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만 했으며, 소련 역시 동독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여행증명서를 제한적으로 발급했다. 이러한 점령지역간 방문은 1949년 동서독 정부수립 이후에도 관행적으로 유지되었다. 서독정부는 분단에도 불구하고 양지역 주민들의 상호 방문을 적극 권장하고 활성화시키려 노력한 데 반해, 동독당국은 양독주민들의 통행을 다양한 형태로 통제하고자 했다.

1950년대까지 동서독 인적교류는 대체로 동독정권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었다. 동독정권은 서독주민의 동독방문을 제한적이나마 허용한 반면, 동독주민의 서독 방문은 엄격히 규제했다. 동독정권이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을 허가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주민의 서독탈출 때문이었다. 당시 동독정권의 그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전까지 매년 약 70만에서 80만명 가량의 동독주민이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Bundesminist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1988, p. 124). 그렇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노동력이 없는 연금수혜자들이었다. 동독정권은 주민의 탈출로 심각한 노동력 감소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독주민의 동독방문도 처음에는 동독에 친척이 있는 경우에만 허용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도 1957년 한해에만 약270만의 서독주민이 동독을 방문하자 동독정권은 통과사증 등 여러 여행제한 조치를 취했다.

1961년 소련과 동독이 갑자기 쌓은 베를린 장벽은 독일분단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서독정부는 분단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비(연방)정부차원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민당 출신의 브란트(W. Brandt)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1963년 동·서 베를린 주민들의 상호방문 재개를 위한 협상을 동독당국과 시작했다. 여기서 단기간만 유효한 ‘통과사증협정’(Passierscheinabkommen)이 체결되어 이산가족의 만남이 몇 차례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협상에 임했던 동독정권의 의도는 서독의 동독불인정 정책을 무효화하고, 서베를린을 서독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것이었다(Mahncke, 1973, p. 222). 서독 연방정부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인도적 문제해결을 위한 그 협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협정이 성공적으로 체결됨으로써 동독은 동베를린을 사실상 수도로 인정받았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서베를린 당국은 당시 서독정부의 동독불인정 정책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소위 ‘구제조항’(die salvatorische Klausel)이라는 것을 협정에 삽입했다. 즉 “본 협정이 어떠한 공적 기관의 표기에 관한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적 사안의 실현에 있다”는 조항을 통해 국가간 합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Gesamtdeutsches Institut, 1985, p. 37). 이후에도 서독연방정부가 동독불인정 정책을 포기하지 않자, 동독은 구제조항을 트집 잡아 1966년 다섯번째 협정 연장을 거부했다.

이외에도 1960년대 서독정부가 동독당국에 공식·비공식적으로 경제적 대가를 치루고 인도적 문제를 해결했던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동서독 당국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정치범 석방거래’(Freikauf)를 손꼽을 수 있다. 당시 서독의 내독성 관리가 동서베를린 양측에서 활동하는 동독변호사를 통해 동독 검찰당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물질적 대가를 주고 동독에 수용된 정치범을 석방하는 동시에 서독으로 추방하는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현금을 지불했으나, 이후 서독 개신교단의 대동독 지원물품으로 위장하여 현물로 대가를 지불했다. 이 사업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Rehlinger, 1991).

나아가 정치범 석방거래의 방식으로 서독정부는 이산가족의 재결합, 특히 서독으로 이주하거나 추방된 동독인의 남겨진 자녀들을 서독으로 이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4년 약 2,000명, 1965년~1970년 사이에는 2,700여명의 어린이가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당시 명시적인 물질적 대가는 없었으나, 동독당국은 이주나 탈주 등으로 헤어진 부모 중 어느 한명이 동독에서 어린이를 양육한데 대한 비용을 추후에 요구했다. 그 즈음에는 동서독간 외환거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독측의 요구가 실현되지 못했으나, 1969년 초 특별협상을 거쳐 서독정부는 동독당국에 약 5백만 DM을 양육비로 지불했다(Rehlinger, 1991, pp. 69-70). ‘통과사증협정’이나 어린이 이주사업이 성사된 배경에는 각 사업에서 이루어진 직접적인 거래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 시도된 서독의 대동독 경제지원 협상이 영향을 미쳤다. 1964년 동서독간 차관협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이 협상은 서독의 비정부기관과 정부기관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최초로 차관문제를 의제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 협상은 실패했으나, 1965년 4월 서독 금융기관이 동독회사에 대해 최초로 장기융자를 제공함으로써 인도주의적 차원의 교류에 대한 동독정권의 호응을 유발했다.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동서독 인적 교류는 1963년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동독지역을 방문하는 서독주민의 수는 매년 약 200만에 달했다. 방문자의 증가에 따라 동독정권은 주민들의 상호방문에 대해 새로운 규제들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방문은 연 1회로 제한하고, 모든 방문자는 동독 마르크를 일정액 환전해야 하는 ‘최소의무환전’ 규정을 만들었다. 이는 동독당국의 외화벌이에도 기여했던 것으로서 당시의 동서독 교류에서 서독과 동독의 전략적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어쨌든 1960년대 서독정부의 노력 덕분에 인적 교류는 확대되었으나, 동서독 당국간 제도적 합의가 뒷받침 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위험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동독방문중 서독주민이 여러 사고나 정치적 이유로 체포된 사례가 매년 적지 않게 발생했기 때문이었다(Deutsche Bundestag, 1966).

이외에도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동독주민의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동독에서 발생한 모든 폭력행위에 대한 자료를 서독이 공식기관을 설치하여 수집했다는 사실이다(Sauer & Plumever, 1991). 1961년 잘쯔기터(Salzgitter)시의 검찰청에 동독지역의 정치적 폭력사례에 관한 중앙기록보관소(die zentrale Erfassungsstelle)가 설치되어 동독내부의 인권침해가 수집·기록되었다. 이 기관의 존재에 대해 동독당국은 거칠게 항의를 했으며, 실제로 1970년대 동서독 관계 정상화이후 그 활동이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활동은 지속되었다. 이 기관의 설치 및 활동은 동서독 관계에 있어서 서독정부의 인도주의적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 동서독 경제 교류

동서독 사이에 공식적 대화가 없는 시기에도 경제적 교류는 항상 있었다. 점령시기동안 전승국들 사이에 합의되었던 4대 점령지역 사이의 ‘점령지역간교역’(Interzonenhandel)이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지역간 교역이 이루어졌던 근거는 “점령기간 중 전독일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간주한다”는 「포츠담 협정」의 조항에 있다. 나아가 1949년 6월 점령당국간에 체결된 「프랑크푸르트 협정」에서는 교역의 결제단위, 결제방식, 거래방식 등 기본적 틀이 확정되었다. 이 협정의 연장선상에서 동서독은 1951년 9월 「경제 및 교역에 관한 베를린협정」을 체결했으며, 이는 동서독 교역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동서독 정부 수립이후 동서독 교역에 대한 양 정부의 입장은 상이했다.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세법이나 대외무역법을 동서독 교역에 적용하지 않았고, 점령지역간 교역에 관한 연합국 군정법을 근거로 “동서독간 경제교류 규제법”을 신설하여 적용했다. 반면에 국제적으로 국가인정을 받기를 원했던 동독은 동서독 교역을 대외무역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서독의 경우에 동서독 교역에 대한 허가는 연방경제성과 연방산업청이 관장했지만, 협상대표 및 실무는 정부기관 대신 민간기구인 상공회의소(DIHT) 산하의 “점령지역간 교역 신탁관리사무소(Treuhandanstalt)”에 맡겼고, 동독의 경우는 정부의 대외무역성이 직접 관장했다. 즉 동서독간 교역에 관한 협정은 국가간 차원이 아니라 비정부기구와 정부사이에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를 띠었다(김영윤, 1995 참조).

베를린 협정이후 동서독 교역은 정치적 갈등 속에서 순탄치는 않았지만 비교적 빠르게 확대되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서독정부는 동서독 교역을 통해 동독주민들의 저항의식을 북돋움으로써 통일을 앞당기고자 했으며, 나아가 서베를린으로 연결되는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간주했다. 즉 교역은 정치적 의미를 가졌으며, 그 배경에는 역사의 효율성을 믿는 서독정부의 정책의지가 분명하게 작용했다. 반면에 분단이 초래한 산업구조의 불균형 상태와, 1953년까지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지속된 소련의 경제수탈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독에게 동서독 교역은 경제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서독내부에서는 동서독 교역을 통일실현의 정치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들이 점차 대두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은 매우 어렵다는 점을 깨달은 서독주민들은 조만간에 실현되기 힘든 통일을 희구하기보다 분단으로 인한 민족적 고통을 감소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Hacker, 1992, pp. 278-341).

2) 동서독기본조약 체결 이후의 교류협력 사례들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배경에는 단지 동서독 정부의 의지뿐만 아니라 당시 동서진영의 긴장완화 분위기가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9년 여름 서독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이후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는 1960년대초 서베를린 시장 시절부터 주장해온 동서독간 긴장완화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동서독의 긴장완화가 없이 당시 유럽의 긴장완화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브란트 정부는 먼저 소련과의 협상을 시작으로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동독정권은 동서독 관계 정상화의 전제로 동독의 독립국가지위를 서독이 인정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법적 인정을 거부하는 대신 사실상 인정으로 대응했다. 동서독 사이의 협상이 평행선4)을 달리자 소련은 적절한 선에서 동서독이 타협하여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동독정권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서독의 뜻이 관철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동독은 서방국가들과 국교 정상화를 약속 받음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국가 인정이라는 오랜 외교적 숙원을 해결했다. 동서독 관계 정상화는 1975년 헬싱키 선언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성사시킨 동서진영간 일련의 연속적 협상들의 첫 관문으로서 유럽 긴장완화가 실현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Ropers & Schlotter, 1989, pp. 324-325).

동서독 관계 정상화 협상의 진행과정에서 독일문제를 둘러싼 몇몇의 국제협상들이 연이어 진행되었으며, 이 협상들은 선순환 효과를 발생시켰다. 예를 들면, 서독은 소련 및 폴란드와 무력포기 및 관계정상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1971년 4대 전승국 사이에는 베를린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서베를린 주민의 동베를린 방문이 용이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 브란트 정부 출범직후 동서독 사이의 우편 및 교통에 관한 협상이 촉진되었고, 마침내 1972년 통행조약과 기본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자 동독은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는 있었으나, 동서독 관계의 확대가 동독사회에 미치게 될 영향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독정권은 서독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소위 ‘차단정책’(Abgrenzungspolitik)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동독정권의 우려는 동서독 문화분야 협상에 대한 소극적으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경제나 인도적 사안과 달리 문화분야의 교류협력은 정치적·이념적 영향력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동독정권을 움츠려 들게 했다. 결국 1973년에 시작된 문화분야의 협상은 1975년 이후 결렬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야 소련의 개혁정책이 전개되면서 비로소 본격화 되었고, 1986년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문화분야 뿐만 아니라 동서독 관계 전반에 걸쳐 전개된 동독당국의 차단정책에 대해 서독정부는 동독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경제적 인센티브로 대응했다. 동서독 교역은 물론이고 비상업적 차원의 교류협력을 통해서도 동독은 서독으로부터 경화(hard currency)를 획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서독과의 우편 및 전화통화료, 통과도로 및 철로 사용료, 방문객의 비자신청비, 서베를린의 폐기물 처리비, 국경지역의 환경보호 관련 비용 등을 비롯하여 스윙차관(청산결제에서 마이너스 통장 허용)과 심지어 1980년대 초에는 직접적 금융차관 제공방식 등을 통해서 동독은 서독으로부터 외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서독은 동서독 교역에서 발생하는 물류수송을 동독업체에게 전담시킴으로써 눈에 잘 띄지 않은 이익도 보장해주었다.

통행조약과 기본조약 체결로 서독주민의 동독방문 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동독정권의 수입도 증가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매년 약 140만명, 1980년대는 600만명의 서독주민이 동독을 여행하게 되자 동독정권은 동독여행에 대한 간접적 규제 조치를 마련했다. 이미 1960년대부터 도입했던 최소의무환전액을 인상함으로써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주민수를 감소시키는 것과 동독탈출자나 정치범 석방으로 서독으로 이주한 자들의 동독방문 허가를 거부하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서독정부는 동서독 교역부문에서 스윙차관을 공여함으로써 동독의 여행규제를 완화하려 했다, 동독정권은 최소의무환전액을 낮추는 것은 수용했으나, 탈출자나 서독으로 추방된 정치범의 동독입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관계정상화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동서독 교류협력의 활성화가 거듭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독언론인의 동독내 활동이 보장기도 했다. 동독언론은 이미 1950년대부터 서독에서 활동했지만 기본조약 체결까지 서독언론인의 동독내 활동은 불가능했다. 또한 상주대표부가 각각 본(Bonn)과 동베를린에 설치되었고, 1974년 보건협정을 통해 동서독 주민의 상호방문시 의료문제가 해결되었다. 같은 해에 체육협정도 체결되어 침체되어 있던 체육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이에 비해 문화협정은 난항을 겪었으나 출판, 공연예술 분야 교류는 유지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교류협력의 폭이 확대되면서 청소년 교류와 동서독 도시간 자매결연 사업도 이루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동서독 관계의 개선 및 발전은 기본적으로 동서진영의 긴장완화를 배경으로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79년 동서진영의 긴장완화가 중단되고 소위 ‘신냉전’이 발생했다. 당시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미·소의 중거리미사일(INF) 유럽배치에 관한 협상이 난관에 봉착한 결과 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국제환경변화는 동서독 관계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동서독 정부는 신냉전으로 인해 동서독 관계가 위축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서독은 그동안 노력해왔던 인적 교류가 저해될 것을 우려했고, 동독은 서독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서독의 보수정부는 1983년~1984년 과거 어느 정부도 하지 않았던 20억 DM 규모의 경제차관을 동독에 제공했고, 동독은 “피해의 제한”(Schadenbegrenzung)이란 미명아래 동서독 관계가 국제정세에 의해 훼손되지 않아야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독의 그러한 태도는 이유가 있었다. 동독은 1970년대 추진했던 산업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외채 압박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서독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서독 교역 및 경제협력이 동독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몇 가지 통계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동독은 총 대외 교역에서 차지하는 동서독 교역의 비중을 평균 7~8%로 공식 발표했으나, 아래 <표 1>에서 보듯이 실제로는 훨씬 높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평균 약 20%에 육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독붕괴 당시 약 680억 달러에 이르렀던 총외채규모와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을 근거로 일부 경제학자들은 1980년대 초반 서독의 경제지원이 없었다면, 동독경제는 파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Gumpel, 1995, p. 1). 또한 추정치에 따르면, 서독정부의 대동독 이전지출과 주민방문 등으로 발생한 지출은 1980년대 매년 약 20~25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이 금액으로 동독은 외채의 이자지불을 충당할 수 있었다. 통일이후 독일연방의회 조사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1972년 기본조약 체결이후 1989년까지 서독정부와 민간이 동독에 제공한 경제지원(물자+현금)은 약 1,044.5억 DM로 추산되었다(통일부, 2001.4.20).

<표 1> 
동서독 교역액과 대외무역에서 동서독교역이 차지하는 비중
연도 서독반출액
(백만 VE)
동독반출액
(백만 VE)
총교역량
(백만 VE)
동서독교역/서독무역
(%)
동서독교역/동독무역
(%)
1950 330 415 745 4.1 16.0
1960 960 1,122 2,082 2.1 10.3
1970 2,415 1,996 4,411 1.8 11.0
1980 5,293 5,580 10,872 2.3 8.4
1985 7,903 7,636 15,537 1.6 8.0
1989 8,104 7,205 15,309 1.4 7.8
VE: ‘결제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서독 교역의 청산결제를 위해 인위적으로 도입한 화폐단위. 1VE = 1DM (서독화폐)
출처: Deutsche Institut für Wirtschaftsforschung, 1989, p. 321.

동서독 교역에서 서독의 경제적 이익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수의 서독측 중소기업에게는 그 교역은 중요했으나, 서독경제의 전반적 규모에서는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즉 동서독 교역에서 서독의 중심 목표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인적 교류를 비롯한 정치 및 사회문화적 차원의 것이었다. 이와 비교해서 동독정권은 차단정책을 추구하며 서독의 영향을 최소화하길 원했으나, 서독과의 경제교류·협력에서 얻는 경제적 이익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단정책을 완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요컨대 1970년대 관계정상화 이후 동서독 관계 전반에 걸쳐 관계 개선 및 인적 교류 증가는 동독에 대한 서독의 경제적 이익 보장을 통해서 가능했으며, 여기에는 서로 다른 가치들의 교환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성이 작용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 경제분야에서 동서독 협력의 잠재성은 더욱 컸다. 교역부문에서 동서독 당국은 교역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상응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동서독 모두 공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우위성 내지 보완성을 가지는 상품의 교역보다는 원자재, 자본재, 반제품에 집중된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확장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독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 부분적으로는 서방진영의 대공산권수출금지(COCOM) 레짐에 따른 이유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독상품의 국제경쟁력 부족과 동서독 경제가 동서경제블록에 각각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직간접투자와 같은 경제협력 역시 미진했다. 여기에는 동독정권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있었다. 서독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동독정권은 서독기업의 대동독 직접투자를 거부했기 때문에 자본투자 방식의 동서독 경제협력은 분단기간 내내 가능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제분야에서 상호주의적 교류협력은 잠재성보다 한층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4. 동서독 관계에서 상호주의의 특징

이상에서 보듯이 분단이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동서독 사이에는 상호주의적 관계가 지속되어 왔으며, 그 적용 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의 전과 후에 적용되었던 상호주의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기본조약 체결이전에는 점령시기 전승 4대국 간에 확립된 제도를 기반으로 동서독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졌다. 물론 당시 동서독 당국이 서로 직접 대화를 거부한 탓에 공식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상호주의라고 말하기가 정확할지는 좀 불분명하지만, 민간(서독)과 정부(동독) 사이의 상호주의적 거래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972년 이전의 상호주의는 몇몇의 예외(정치범 석방거래, 이산가족 재회 등)를 제외하고 대부분 특정 이슈별로 전개되었으며, 교역분야를 제외하고 사안마다 매번 새롭게 협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50년대에는 체제대결의 일상화 속에서 동서독 관계에서 적용된 상호주의는 전략적 계산을 중심으로 하는 TFT 방식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사건을 계기로 서독사회의 분단인식에 변화가 발생하면서 동서독 사이에 적용된 상호주의는 점점 이슈간 연계(issue-linkage)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패전국이라는 독일의 특성 탓에 안보이슈는 기본적으로 동서독 사이의 협력 대상이 아니었다. 동서독 모두 미·소 중심의 집단방위 구조에 종속되었고, 군사적 자결권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동서독 국경에서 자행되었던 동독국경수비대의 탈출자에 대한 총격이나 탈출방지 지뢰매설 등의 군사이슈는 서독정부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안보이슈라기보다 인도적 사안으로 간주되어 동독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인센티브를 통해 해결하려는 서독정부의 의지가 강했다.

둘째, 이슈간 연계에 중점을 두는 상호주의 방식의 변화과정에는 특히 서독 내부의 정치사회적 갈등이 수반했다. 이슈간 연계에서는 적절한 교환가치의 계산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분단 직후 공산주의자들에게 축출당한 실향민이 서독인구의 약 1/5을 이루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교환가치의 불명확성을 안고 있는 상호주의 방식의 적용은 내부적 반발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 사건을 비롯하여 정부수립이후 지속되었던 시민정치교육과 1970년대 초반 ‘탈물질주의적’ 사회문화의 확산 등을 배경으로 형성된 서독사회의 분단 인식변화는 그러한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반공주의와 자유를 우선시 했던 서독사회가 베를린 장벽 설치를 계기로 점차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1970년대 들어와 마침내 분단의 평화적 관리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보수 세력은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을 여전히 버릴 수 없었고, 동서독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TFT 방식의 상호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렇지만 사회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 정치적 논쟁과 갈등이 있었지만, 극단적인 사회갈등으로 비화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시민정치교육의 효과가 있었다. 서독은 정부수립이후 탈나찌화 및 민주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차원의 정치교육을 집중적으로 추진해왔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국제환경과 분단 상황을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베를린 장벽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서독국민들은 분단극복이 자신들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통해 분단의 평화적 관리의 현실적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러한 분단인식의 변화 덕분에 서독에서는 인권 및 인도적 이슈와 경제적 이슈 사이의 연계, 즉 인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독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지불하는 것의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슈간 연계에서 교환의 등가성 판단 기준이 단지 합리적 이익 계산이 아니라 규범적 정당성에 근거를 두게 됨으로써 상호주의의 실천방식의 변화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었다.

셋째, 서독사회가 동서독 관계에서 이익계산을 넘어 규범과 가치도 중시하는 상호주의를 점차 수용하는 과정에는 암묵적으로 역사의 효율성보다는 비효율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서독이 경제적 대가를 치루면서 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등 동서독 관계 개선에 노력했던 주된 이유가 동독의 붕괴 유도를 비롯한 통일에 있었다기보다 “분단으로 인한 민족적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분단의 평화적 관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서독 관계의 정상화이후 각 분야의 교류협력에서 서독의 대동독 경제지원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첫째는 중장기적으로 독일인들이 분단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에 동독이 동의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경제지원이다. 예컨대 동독인프라 사용료 지불, 금융차관, 생산재 지원 등을 통해 통행·통신·통상 분야의 제도정착을 꾀했다. 둘째로는 단기적으로 교류협력을 증진 내지 원활하게 하기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지원이다. 예컨대 최소의무환전금 인상과 같은 동독정권의 여행 통제조치를 완화하거나, 탈출자를 막기 위해 동독이 국경지대에 설치했던 자동화기를 철수시키기 위해서도 다양한 경제지원을 제공했다. 어떠한 목적이든 서독의 대동독 경제지원은 인도적 문제의 해결 내지 통제완화를 관철시키는데 주효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서독은 동독과 협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진행했고, 동독이 약속을 어길 수 없도록 다양한 이슈간의 연계를 철저히 지켰다. 이렇듯 서독정부가 추진했던 분단의 평화적 관리 정책은 의도치 않게 독일통일의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말 동독내부에서 평화혁명이 분출한 것은 표면적으로 소련의 개혁정책 덕분이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나, 동독사회의 내부에서 동서독 교류협력의 영향이 오랫동안 누적되는 가운데 서독체제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동경이 점증한 결과가 동독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촉발시킨 에너지원이었던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요컨대 동서독 교류협력에서 서독사회의 저변에 자리 잡았던 역사의 비효율성에 대한 생각이 역설적으로 효율적 결과로 나타났다.

넷째, 1982년 보수정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란트 총리가 시작했던 분단의 평화적 관리 중심의 독일정책은 지속되었고, 1970년대 정착된 상호주의적 협력이 유지·확대될 수 있었다. 1972년말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해 보수정당인 기사당(CSU)이 위헌소송을 제기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82년 콜(H. Kohl) 총리의 기민당 정부가 이전의 사민당 정부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대동독 현금차관을 공여했던 배경에는 신냉전이라는 국제환경변화가 초래할 동서독 관계의 경색을 막으려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분단의 평화적 관리에 대한 한층 진전되고 확고해진 서독사회의 변화가 미친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브란트의 사민당 정부보다 더욱 큰 경제적 호혜를 동독에 베풀었던 콜 정부가 브란트 정부의 독일정책과 비교하여 국민들로부터 더 큰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5)

다섯째, 동서독 관계 정상화이후 새로운 상호주의 방식이 적용된 교류협력에 대해 동독정권이 딜레마 상황을 경험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슈간 연계를 통해 교류협력의 제도적 발전을 수용한 것은 단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부분적으로는 동독정권의 대내적 정통성 부재도 한 몫을 했다. 동독정권은 정부수립부터 소련군을 등에 업고 국가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동서독 교류가 동독체제에 영향을 아무리 준다고 해도 소련군이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한 체제붕괴의 위험은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일정 수준의 동서독 교류는 동독주민들의 불만을 완화시키는 ‘통풍효과’(ventilation function)를 발휘함으로써 정권유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동독정권은 서독의 요구를 온전히 거부하지는 않았고, 대내외 환경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수용했다.


5. 맺음말: 시사점

1970년대 초부터 동서독 교류협력에 적용되었던 상호주의적 접근방식은 의도치 않았던 통일을 가능케 했던 주요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사이의 인과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1960년대를 기점으로 변화한 상호주의 방식이 동서독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되었던 배경에는 동서독의 국내 환경 및 유럽 지역질서의 변화를 포함한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이 있었다. 본 논문은 이에 관한 구체적인 주요 사례들을 통해 독일에서 상호주의의 작동 방식 및 변화를 소개하고 그 특징들을 요약했다. 이 중에서 독일분단과 한반도분단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시사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상호주의 적용 방식의 변화를 이끌었던 요인들 가운데 서독 사회의 분단인식 변화이다. 과거의 서독이나 현재의 한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역질서나 분단구조를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거 서독이 관계개선에 수반하는 서독의 영향력 침투를 두려워했던 동독을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듯이 지금의 북한에 대한 남한의 입장도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서독이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어떻게 스스로 해결하려 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분단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사점 모색의 맥락에서 먼저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1960년대 분단질서의 변화와 맞물려 서독의 정치·사회문화적 변화가 동서독 관계에서 상호주의 방식의 변화를 야기했던 것과 유사한 과정이 한국사회에서도 과연 재현될 수 있을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답과 긍정적인 답이 공존할 수 있을 듯하다. 부정적으로는 무엇보다 한반도는 독일과 달리 동존상잔의 전쟁을 경험한 탓에 상대방에 대한 불신의 정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용서나 화해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남한사회의 민주화 수준이 과거 서독과 비교하여 낮으며 특히 남남갈등이 심각하다는 점, 북한은 동독과 달리 너무나 패쇄적이고 호전적이며 방어적이라는 점, 당시 다자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유럽의 지역질서와 달리 동북아는 양자주의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 등이 지적될 수 있다.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볼 여지도 전혀 없지는 않다. 남한사회의 민주화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으며 참여민주주의의 확산에 따른 혼란스러움은 학습과정일 수 있다는 점,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안정화되고 성과를 거두게 된다면 남북관계 개선 및 발전의 동력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쨌든 한반도와 과거 독일의 분단 상황에 차이가 적지 않음을 직시할 때, 1970년대 이후 동서독 교류협력을 추동했던 상호주의를 남북관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 또 적용할 수 있더라도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이는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경험에서도 확인된다. 남남갈등이 심각한 남한사회에서 정치문화 및 분단인식의 변화가 조만간 촉진될 수 있을 개연성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단은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인내력을 가지고 한국사회의 민주적 역량을 증대하는 노력과 더불어 국내외 환경변화를 반영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상호주의 방식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지 분단문제 해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사회적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더욱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향후 북한의 체제생존 전략을 충분히 감안하여 합리성을 강조하는 상호주의(TFT) 전략과 규범 및 제도 발전에 중점을 두는 상호주의적 접근이 모두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북한이 동독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과거 서독보다 더 큰 노력을 배가해야 할 필요도 있다.

끝으로, 분단의 평화적 관리에 집중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했던 독일사례를 선망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분단 현실에서 스스로 당장 잘 할 수 있는 것, 노력하면 가능한 것, 당장은 노력해도 어려운 것 등을 분별해서 중장기적 시각으로 독일에서 성과를 거두었던 그러한 상호주의 방식을 창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항상 효율적으로 전개되지 않을 개연성을 염두에 둔다면, 서둔다고 문제의 해결책을 그만큼 빨리 찾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따라서 역사적 제도주의의 논리처럼 기존의 경로의존을 벗어나는 분기점에서 적절한 대안을 새롭게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내부적으로 만드는 노력이 오히려 더 중요할 것이다.


Notes
1) 학술적으로 reciprocity는 ‘상호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상호주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상호주의나 상호성을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2) 이 장에서 언급된 동서독 관계의 주요 사건 및 자료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 참조(김학성, 1996; 김학성, 2006, pp. 41-134).
3) 1968년 동독이 IOC에 가입할 때까지 IOC 대표권은 서독에 있었다. 이는 동서독 단일팀 구성이 가능했던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4) 1970년 3월과 5월 각각 동독의 에르푸르트와 서독의 카셀에서 개최되었던 동서독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동 서독의 입장 차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5) 1980년대 후반 서독정부의 대동독정책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민당 정부보다 기민당 정부에 대한 서독주민들의 지지도 내지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왔다(Glaab, 1999, p. 136). 이는 냉전시기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 그러했듯이 국민들은 공산주의와의 협상에서 같은 양보를 하더라도 진보정부보다 보수정부를 더욱 신뢰하는 경향과 일치한다. 이는 이념적 신뢰나 의심 여부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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